#20. 키스하기 싫은 이유
2018.02.06.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백의 식구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라현의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안 돼. 시간 없어.”
둔갑술을 부릴 수 있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 중이었다.
“더 뭉그적대고 있다간 집에 돌아가지도 못할걸. 다들 그만 일어납시다.”
“아, 벌써 그렇게 됐어?”
“벌써가 다 뭐야. 진작 나섰어야지. 백이 보고 간다고 무리했어.”
“아이고, 그럼 가야지.”
가족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음? 아니, 그냥 간다고?”
라현이 당황해 신용카드를 떨어트렸다.
“하는 짓이 현 씨 집안 인간치고 퍽 기특하다지만 어쩌겠나. 시간이 다 된 것을.”
돈 때문에 착하디착한 막내딸을 위장 취업까지 시켜대는 악질 계모 사단은 의외로 초연했다.
돈이라면 쉽사리 제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 젠장. 이러면 안 되잖아.
그럼 나는 뭐로 점수를 따란 말이야.
“조금만 더 있다 가시죠. 원하시는 건 다 사드리겠습니다.”
“아, 시간 없다는데. 왜 이렇게 끈질겨. 하여간 인간 사내란.”
둘째 언니가 찬바람이 쌩 도는 발언을 했다.
다행히도 큰언니는 조금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기특하잖아. 그럼 사서 보내. 신상이면 뭐든 괜찮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막 고르진 말고.”
“사서…… 보내라고요?”
“그래. 그렇게라도 받아주겠다는 거니 감사히 여기도록.”
사주는 입장에서는 뭔가 상황이 뒤바뀐 것 같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라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쓸모없으니 꺼지라는 말은 안 했다. 그게 어디랴 싶었다.
“어머니, 언니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백은 서운해 어쩔 줄 모르면서도 더 머물다 가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인간 세계의 독기가 얼마나 독한지, 얼마나 치명적일지 아는 탓이었다.
“오냐, 우리 막내. 조만간 또 보자꾸나.”
“힘내, 백아. 우리는 너만 믿어.”
“언니, 애 잡는 소리 그만하시우. 백아, 어렵다 싶으면 구 씨 보내서 언제든지 얘기해. 우리도 더 방법을 찾아볼게.”
백은 애써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았다.
“예, 그럴게요. 제 걱정은 마세요.”
작별 인사 와중에 큰언니가 소리쳤다.
“에그머니! 나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아니, 벌써?”
“아이고, 그럼 이럴 시간도 없지. 빨리 움직여!”
모친이 스카프를 풀러 큰언니에게 던져주었다. 큰언니가 그걸로 얼굴을 꽁꽁 감싸더니 후다닥 달려갔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말로는 우리 막내 어쩌고 해대지만 막상 하는 짓을 보니 애달픈 것은 백 혼자였다.
순식간에 가족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백이 참았던 눈물을 글썽였다.
“……그게 뭔지 알아.”
라현은 망설이던 손을 백의 어깨로 가져가 도닥였다.
“나도 그랬거든.”
대모산 영수 일족의 사연을 모르는 라현에게는 백의 모습이 제 사춘기 시절과 겹쳐 보였다.
외롭고 슬플 것이다. 자신만 혼자 바닥이 없는 곳에 기우뚱, 불안해하며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라현이 저 혼자 기분에 취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가자. 가서 대모동 땅을 어떻게 가져올 건지 알아봐야겠어.”
그 말에 백이 젖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 그 땅을 돌려주실 거예요?”
“정말이야. 맹세해.”
라현은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빼앗을 것이다.
대모동 땅도,
“아아……. 감사합니다, 현라현 씨.”
그렁대는 눈으로 활짝 웃는 백도.
* * *
“어딜 간 거야.”
이현은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야 백이 집 안에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백의 방에는 주인 대신 이 집 고양이가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베개 냄새를 킁킁 맡다 그와 눈이 마주친 뒤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는 모양새가 현장을 들킨 변태 스토커를 연상시켰다.
“냐아아아앙.”
[오, 오해 말라냥. 내가 뭐 막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고…… 그, 그냥 백님 냄새가 너무 좋은 거다냥. 나 그런 고양이 아니다냥.]
게다가 고개를 열심히 저으며 뭐라고 냥냥대는 게 꼭 변명을 해대는 것 같기도 했다.
“백이는? 없나?”
……아니, 이상한 것은 자신이었다.
백이 저 고양이와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 광경을 하도 본 탓인지 저도 그러고 있었다.
“냐앙.”
[아유, 눈에 안 보이면 없는 거지 뭘 또 굳이 묻고 있냥. 스토커냥?]
그리고 왠지 안드레아가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미쳤나.”
이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금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백과 관계되면 사고가 비정상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지금도 그랬다.
그는 주인 없는 방을 함부로 둘러보는 건 몰상식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다.
“왠지…….”
느낌이 좋은 방이었다.
거실을 지나면 곧장 맞은편에 있는 제 방과는 많이도 달랐다.
포근하고 아늑했다. 숲 속에 있는 것처럼 청량한 냄새가 났다.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희한해.”
이현의 시선이 소파 옆의 티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는 백이 읽고 있었던 잡지가 펼쳐진 채로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주 열심히 읽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현은 백이 그은 게 분명한 밑줄을 발견하고는 쓰게 웃었다.
“대체 뭘 읽고 있는……,”
그러다 웃음이 멎었다.
하필이면 모태솔로가 차도남을 유혹하는 방법에 대한 기사였다.
[다섯 번째. 그의 취향을 공략할 것.
차도남은 취향이 확고해 타인이 끼어들 틈새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정면승부. 부지런한 정보수집으로 그의 취향부터 파악하도록. 혹시 또 아는가.
그가 이런 노력을 귀엽게 여길지도. 취향이 확고한 사람일수록 자기영역을 존중받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백은 취향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어놓고 뭐라고 적어두었다.
-흰 가운(그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았음). 타월은 별로. 다시 해야 할까?
“…….”
다시, 라는 말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얇은 흰 가운 아래 알몸이라던 백을 마주하던 그날의 기억이 와락 덮쳐왔다.
말캉대던 입술과 손바닥 아래 전해지던 체온과 맨살에서 번져오던 향기. 그 모든 게 생생히 되살아났다.
“하…….”
이현이 미간을 손으로 짚었다.
백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취향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백이 두르고 있는 게 수의사 가운이건 쌀가마 포대이건 간에 한번 익힌 감각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강렬한 성적 충동 외의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제 백과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해묵은 상처가 아물어 가는 듯한 그 따스한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고 싶어졌다.
잠시 생각하던 이현은 잡지 옆에 얌전히 놓여 있던 볼펜을 집어들었다.
흰 가운이라는 글자에 줄이 두 줄 그어졌다.
-이런 걸 취향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걸로는 부족할 것 같아 한마디 더 추가했다.
-직접 물어. 알고 싶으면.
볼펜과 잡지를 내려놓은 이현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다 시선이 창문에 닿았다.
창문에는 백이 대모산에서 가져온 적송 가지와 솔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지기를 맑게 하기 위해 일부러 모양을 잡아 놔 둔 것이었지만 인간의 눈에는 독특한 장식품으로 보였다.
“이런 걸 좋아했나.”
의외였다.
늘 브랜드 제품만 쓰는 백을 보면 취향은 더 화려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방은 정갈하고 깔끔하기만 했다.
알면 알수록 모를 여자였다.
그렇게 적송 가지를 보고 있자니 정원을 지나 대문 너머의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
차가 한 대 멎었다.
멀리서도 사촌의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요란한 차를 탈 인간은 사촌밖에 없었으니까.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가 몸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한눈에 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집에 머물고 있는 저 연령대의 여자가 백밖에 없다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백이기 때문이었다.
백이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 있거나, 혹은 아주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둘이 나갔다 왔다고?”
이현은 이렇게 말하는 제 이마가 주름 잡히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사이 운전석의 문이 허겁지겁 열렸다.
막 내리려던 백이 잠시 동작을 멈췄고 반대편에서 달려온 사촌이 조수석의 문을 마저 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먼저 내리지 말고 내가 문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
그런 대화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마의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안 하던 짓을 하는데.”
사촌의 연애사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 하는 짓이 사촌답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그가 아는 현라현은 타인을 배려하거나 친절을 베푸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현라현이 진심으로 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는 뜻이었다.
“어이가 없군그래.”
어이가 없었다.
끼어들지 말라는 말을 하루 만에 잊어버린 사촌이. 그걸 생각하며 삽시간에 기분이 나빠지는 자신이.
다음 순간 이현은 등을 돌려 백의 방을 떠났다.
탁탁탁탁.
그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조용한 집 안에 번졌다.
* * *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차에서 내린 백이 꾸벅 인사를 했다.
라현은 그런 백이 유독 더 예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사준 구두를 신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럼 나한테도 뭐 해줘.”
“네? 어떤 걸요?”
당황했던지 백이 귀를 쫑긋거렸다.
아, 젠장. 귀여워 죽겠네.
라현은 한 손으로 심장께를 쓸어야 했다. 이 정도 되면 진지하게 병이 아닐까 싶었다.
“음…… 볼키스. 어때?”
“어…….”
백이 그저 쳐다보고만 있자 라현은 설마 그 말도 모르는가 싶어서 제 볼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여기다. 키스해줘.”
사실 오늘 저가 백에게 베풀었던 친절에 비하면 약소한 대가였다.
단순히 차를 태워주고 새 구두를 사서 신겨준 게 다가 아니었다.
가족들에게 이용당하고 혹사당하는 백을 지키기 위해 사촌형을 상대로 지저분한 집안싸움을 시작할 각오도 했다.
그런데 고작 볼키스라니.
약소하다 못해 스스로가 기특할 지경이었다.
“꼭…… 해야 하나요?”
그런데 백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술을 오물대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백을 보는 라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내가 싫어?”
“음…….”
대답을 하자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라현은 산 아래 사는 인간 중 하나일 뿐이었다.
대모산을 지켜준다면 고맙고 기특한 인간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전부였다.
영수와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는 것처럼 라현에게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하지만 키스는 싫었다.
‘당연하지. 키스는 독기가 옮아오잖아. 그건 싫단 말이야.’
머리가 멍해지는 게 싫었다. 열이 오르고 가슴이 쿵쿵대며 발끝이 아득해지는 느낌도 모두 싫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해. 독기를 많이 쬐면 해가 돼.’
“다른 건 안 될까요?”
“다른 거 뭐?”
라현이 볼멘소리를 냈다.
“나는 키스가 좋은데. 아니, 그거 말고 당신이 해줄 게 뭐가 있어?”
“음…… 대모산에서 가져온 적송 가지를 나눠 드릴게요. 그건 공기를 맑게 하고 지기를 다독여준답니다.”
“아니, 제길. 헛소리 말고.”
“헛소리가 아니라 사실인데요.”
라현이 눈가를 구겼다.
“내가 그렇게 싫어? 입술도 아니고 볼에다 하라는 건데도?”
“그건…….”
후. 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나.’
아주 잠깐이라면 독기가 그렇게 많이 옮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그렇다면 고개를 숙여 주세요.”
라현이 표정을 바꿔 활짝 웃었다.
“어.”
그가 냉큼 허리를 숙여 뺨을 들이댔다.
“자, 어서.”
쿵덕쿵덕.
제 심장이 달이라도 됐는지 방아 찧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려왔다.
“예. 그럼 하겠습니다.”
백이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행여나 몸이 닿지 않을까 조심하며 라현 쪽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하지 마. 하기 싫으면.”
누군가의 손이 제 입술과 라현의 뺨 사이로 끼어들었다.
백은 얼떨결에 손바닥에 입을 맞추게 되었다.
“……? 현이현 씨?”
이현이 묘하게 흐트러진 앞머리를 한 채 저를 보고 있었다.
“미친……. 뭐하는 거야?”
라현이 대뜸 이현의 팔을 붙들어 홱 잡아당겼다.
“이 키스가 얼마짜리였는 줄 알아?”
이현도 반대편 팔로 라현을 붙들었다.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엉킨 팔 너머로 이현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라현은 저를 움켜쥔 힘에 움찔하면서도 고개를 뻣뻣이 유지했다.
“뭐하긴. 데이트했어. 마무리로 키스하는 중이었고. 형이 본 그대로야.”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냐. 그렇다니까.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인간이 왜 이렇게 구차하게 굴어.”
이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에게 붙들린 팔이 시선을 따라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데이트라면 왜 저렇게 싫은 표정을 짓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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