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여우는 프라다를 신는다(1)
2018.01.30.
[헥헥. 숨차다.]
[왜 누나가 숨이 차? 숨이 차도 백이가 차야지.]
[아, 몰라. 나도 같이 걷는 기분인데 뭐 어쩌라고. 이봐, 구 씨. 아직도 택시는 안 보여?]
가방 안이 시끄러웠다.
이게 다 평창동이 이상한 동네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택시 승강장이 아주 멀리 있었다.
길은 널찍하니 잘 닦여 있었지만 걸어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간혹 덩치 큰 차들이 지나쳐 갈 뿐이었다.
평창동 구 씨 말로는 택시 승강장은 저 아래 큰길가에 있다고 했다.
앞장서서 날개를 퍼덕이는 구 씨를 따라 열심히 길을 내려가는 백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가족들이 인간 세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저가 늦으면 그만큼 위험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다.
백이 종종걸음으로 달리듯 언덕길을 내려가자 가방 안에 타고 있던 도도와 도래도 덩달아 급한 마음이 되었다.
“……앗!”
그러다 사달이 났다.
앞이 뾰족한데다 뒷굽은 연필처럼 얇아서 발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발이 문제였다.
“엄마야.”
휘청하던 백이 간신히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백아?]
[무슨 일이야?]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백이 서서 한쪽 신발을 벗었다.
굽이 또각 부러져 있었다. 내리막길을 급히 달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걸 어쩌지? 다시 가서 다른 걸 가져오자니 시간이 없어.”
[그러게. 어쩌면 좋지.]
[인간 세상은 정말이지 너무 불편해. 어디를 가려고 할 때마다 차라는 걸 타야 한다니. 산이라면 쌩 달려가면 되는데.]
[맞아, 맞아. 산이라면 축지술을 써도 되잖아.]
[어휴, 그러니까.]
도리가 없었다.
백은 양쪽 신발을 모두 벗어서 손에 쥐었다.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아.”
[저런. 괜찮겠어?]
[여기는 산이 아니잖아. 바닥이 이렇게 딱딱하고 거칠어서 발이 상할 거야.]
백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 내가 늦으면 그만큼 어머니와 언니들이 괴로우실 거야.”
다시 가방을 추슬러 어깨에 멘 백이 아스팔트 도로 위를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확실히 대모산의 정결한 흙을 밟는 것과는 달랐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보드라운 발바닥이 따끔했다.
‘괜찮아. 잠깐이니까.’
큰언니가 빌려준 구두를 꼭 쥐고 다시 본격적으로 달리려던 참이었다.
부우웅, 끼익!
뒤에서 다가온 차가 스치듯 백의 옆에 멈춰 섰다.
차문이 성급하게 열리고 그 안에서 라현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뭐하는 거야, 고 선생님. 신발은 왜 벗고 있어.”
“아, 현라현 씨로군요. 방금 전에도 뵈었으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많이 급해서요.”
백은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을 서둘렀다.
다른 차들에 비해 유난히 납작하다 싶은 라현의 차가 줄레줄레 백의 뒤를 따라왔다.
“대체 왜 맨발로 다니는 건데!”
“굽이 부러져서요.”
“그럼 갈아 신어야지!”
“말씀드렸듯이 급해서요.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백이 라현을 무시한 채 신발을 꼭 쥐고 걸어갔다.
“어휴.”
라현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기서 아는 척을 하면 안 되었다.
그의 목적은 백이 밖에서 누굴 만나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래 염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슬슬 따라가며 차 안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지켜보는 건 잠깐이었다.
루부탱 같은 신발을 신고는 내리막길을 용케 달려간다 싶더니 백은 곧 발목을 휘청했다.
그 다음에는 아예 신발을 벗어서 들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제정신이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문을 열고 있었다.
염탐은 물 건너갔다. 차마 맨발로 걷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 하는 말이 웃기지도 않았다.
바쁘니까 먼저 갈게요, 라니.
“문을 열어줬으면 타라는 소리잖아. 그런 것도 몰라?”
라현은 입술을 질근대다 다시 백을 불렀다.
“고 선생!”
“……바쁩니다.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백은 숨이 차는지 두 볼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후. 일단 타. 태워다 줄게. 어디 가는데?”
“어……?”
그때서야 백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라현이 입술을 비죽였다.
환장하겠네. 이런 말을 해야 쳐다보는 건 또 뭐야.
나라는 인간한테 정말로 관심이 하나도 없는 거야?
이런 캐릭터는 또 간만이네. 내 이름이 현라현인데.
“왜 그러고 서 있어? 안 탈 거야?”
백이 일단 가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뭐라고 속닥였다.
하여간 이상한 여자. 가방 속에 그 다람쥐 같은 것들이라도 숨겨가지고 다니는 건가.
“음……. 그럼 택시 승강장까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왠지 비위가 상했다.
태워준다 했더니 정말로 기사 취급이네. 그렇게는 안 되지.
“택시 승강장이 어딘지 몰라. 택시를 타고 다닐 일이 있어야지.”
“아, 그럼 저는 괜찮……,”
“나는 안 괜찮아. 그러니까 택시 타고 어디를 갈 건지 말해. 거기까지 태워다 줄게.”
숨어서 엿보는 게 안 된다면 아예 동행이 되는 방법도 있었다.
라현은 태워다 준다는 핑계로 백의 곁에 내내 붙어 있을 생각을 했다.
“택시 승강장을 모르신다면서 다른 데는 아시나요?”
“별 걱정을 다 하네.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들어나 보자.”
“압구정 백화점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패밀리 세일을 하는 곳이래요.”
그 말에는 조금 허탈해졌다.
“아, 뭐야……. 맨발로 달려갈 정도로 바쁘다더니 볼일이 고작 쇼핑이었어?”
어쨌거나 모르는 곳은 아니었다.
“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테니.”
한 번 더 가방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속닥대던 백이 차에 올랐다.
“그럼.”
라현이 혀를 찼다.
“더럽게도 비싸게 구네. 태워준다는 건지 제발 타주세요 하는 건지 모르겠잖……,”
투덜대고 있자니 차에 오른 백이 이쪽을 보며 생긋 웃었다.
“친절함에 감사드려요. 현라현 씨는 예의가 바르고 선량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겠잖…… 젠장.”
“네?”
“아니, 별말씀을 다 한다고.”
넋을 놓고 백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던 라현이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타줘서 이쪽이 고맙지.”
답지 않게 이게 무슨 저자세인가 싶었지만 기분은 들떴다.
친절하고 선량한 인간이라는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웬 미친 소리냐며 흘려듣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이 하면 달랐다. 진심으로 하는 말일 테고, 그러니 저가 그런 인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인간이 되라고 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럼 출발할게.”
“아, 잠시만요.”
백이 안전벨트를 맸다.
“차에 타면 이렇게 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현라현 씨도 벨트를 착용하세요.”
“…….”
라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벨트는 어쩌다 생각나면 하는 식이었고, 신호등의 빨간불은 더 빨리 가라는 신호로 이해하는 인간이었다.
“착용하는 법을 모르세요? 제가 가르쳐드릴까요?”
라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자 백이 물었다.
“아니, 그걸 모를 리…… 어, 몰라. 가르쳐줘. 아니, 해줘.”
백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긴 했다.
“운전은 할 줄 알면서 왜 안전벨트는 할 줄 모르시는 거죠?”
“그럴 수도 있지 뭘. 사람이 어떻게 다 알고 살아.”
“음…… 하긴. 저도 외래어는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뭐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배워 나가는 것 같아요. 아, 이게 안전벨트고요, 이렇게 끝의 고리 부분을 잡아서 당기는 거예요.”
백은 라현 쪽의 안전벨트를 붙들고 설명을 이었다.
“그런 다음 이 끝을 여기 빨간 곳에 끼우면 됩니다. 달칵 소리가 날 거예요. 쉽지요?”
“…….”
라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긋한 손이 어깨를 스쳐 허리께로 내려갔다.
백이 저를 만지는 것도 아닌데 손이 너무 가까웠다. 시선이 가까웠고 숨소리가 가까웠다.
그래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성과의 접촉에 면역력이 전혀 없는 애새끼처럼 되어버리는 자신이.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다시금 들려오는 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라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잘…… 모르겠어. 다시 가르쳐줘.”
“네?”
백이 이쪽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런 간단한 것을 다시 가르쳐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을 만도 할 것이다.
백이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학습능력은 개체별로 각자 다르니까요. 그럼 다시 가르쳐드릴 테니 잘 보세요.”
“아냐, 다음에. 다음에 가르쳐줘.”
젠장. 실수였다.
백이 저를 얼마나 멍청이로 볼까 생각하니 갑자기 수치스러워졌다.
라현은 재빨리 핸들을 쥐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라고 했지? 아, 압구정 갤러리아.”
“네. 그런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백이 이쪽을 향해 몸을 약간 틀었다. 양손을 꼭 움켜쥐고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 간절해 보였다.
“저…… 괜찮으시다면 빨리 가주실 수 있을까요. 늦으면 안 되거든요.”
“염려 마.”
핸들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과속이라면 자신 있어.”
부웅!
차가 다짜고짜 속력을 냈다.
확 불이 붙기 시작한 라현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 * *
끼이익!
라현이 운전하는 차는 삼십 분이 넘을 거리를 이십 분 만에 주파했다.
백화점 입구에 차를 세운 라현이 백을 향해 씩 웃었다.
“어때? 굉장하지?”
과속과 신호위반 딱지가 두어 장 정도 집으로 날아올 테지만 모두 감수할 수 있었다.
백이 그의 노고를 알아주기만 한다면.
거기에 감사와 감탄을 곁들여도 좋을 것이다.
정말 멋있어요. 너무 고마워요, 라면서 폭 안기거나 아니면 볼에 키스라도…….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백은 주차요원을 기다리는 그 잠깐의 시간을 못 참고는 벌써 차문을 열고 있었다.
“아니, 잠깐! 기다려봐! 왜 혼자 가고 그래?”
라현이 안전벨트를 풀며 소리쳤지만 백은 저만치 가버린 뒤였다.
대규모의 세일 행사 중인 백화점은 오늘따라 유독 더 번잡했고, 백의 뒷모습은 곧 인파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젠장. 왜 이렇게 늦게 와?”
애꿎은 화풀이는 한걸음 늦은 주차요원을 향했다. 주차요원이 눈을 끔벅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쯧.”
차에서 내리려던 라현의 눈에 문득 백이 두고 내린 물건이 들어왔다.
굽이 부러진 구두였다.
백이 맨발로 백화점 안을 뛰어다니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라현이 구두를 집어들고는 혼잡한 인파 사이로 뛰어들었다.
* * *
“어머니! 언니들!”
백은 혼잡한 인파 속에서 가족들을 찾았다.
사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모친은 프라다를, 큰언니는 샤넬을, 그리고 둘째 언니는 버버리라는 확고한 취향을 지니고 있으니 그 매장들 위주로 찾아보면 되는 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가족들은 샤넬과 루이비통 매장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아이고, 막내야!”
“백아! 여기야, 여기!”
가족들끼리 얼싸안고 난리가 났다.
백이 간만에 막내로 돌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어리광을 피우는 동안 모친과 언니들이 돌아가며 등을 도닥이고 어깨를 안아주고 했다.
도도와 도래도 가방 안에서 덩달아 훌쩍이며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에고, 우리 막내. 멀리서 잘 지내는 게야. 어째 며칠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누.”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백아. 현 씨 사내는 좀 어떠니? 아직도 그리 불손하고 고깝게 구는 게야?”
“네, 언니. 아직은 달라진 게 없어요. 땅문서는 줄 수 없다고 해요.”
“에이, 무례한 인간 같으니. 영수를 그리 대하면 저가 어디 잘되는지 두고 보라지.”
모친과 언니들이 돌아가면서 이현을 욕했다. 백은 그저 어색하게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이에요? 인간 세상에 이리 오래 계시면 안 되잖아요.”
백이 가족들을 걱정하자 큰언니가 까르륵 웃었다.
“웬걸. 오늘이 패밀리 세일이라고 해서 그간 내내 준비를 하지 않았니.”
둘째 언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큰언니를 누가 말려. 오늘 둔갑술을 길게 부려야 하니 영력을 보한다고 내내 산삼만 씹어댔어. 요 며칠 새에 대모산 산삼은 씨가 다 말랐을 게다.”
큰언니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마, 얘 말하는 것 좀 봐. 나만 먹었니, 응? 너도 옆에서 같이 먹었잖아.”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있었는데.”
둘째 언니가 깜박 잊고 있었던 쇼핑 리스트를 생각해냈다.
“여기 까르띠에! 까르띠에가 어디 있지?”
둘째 언니가 고개를 이리저리 빼어들고는 매장을 찾아 눈을 빛냈다.
큰언니가 백의 손을 살살 쓸며 둘째 언니의 흉을 보았다.
“쟤는 요새 시계를 산다 그러지 뭐니. 대체 산에 살면서 시계가 뭐에 필요하다고 그러는지. 해 그림자가 사방에 깔렸는데.”
귀신같이 그 말을 주워들은 둘째 언니가 눈을 부릅떴다.
“하이고, 애 앞에서 왜 남 흉을 보우? 언니는 뭐 퍽도 쓸모있는 걸 산다고. 샤넬 백이나 에르메스 스카프나 예쁘고 쓸모없긴 매한가지지.”
큰언니가 발끈했다.
“어마? 예쁘니깐 갖고 싶은 게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아, 그러니까 하는 말 아냐. 시계나 백이나 거기서 거긴 걸 왜 내 흉만 보느냐고.”
“네 시계가 제일 비싸니까 그렇지. 그렇게 비싼 건 나도 아직 못 사봤어.”
“아, 뭐야. 그러니까 내가 시계 하나 산다니까 그게 그리 아니꼬웠던 게야? 그간 엄마하고 언니가 사들인 게 얼만데?”
“비싸도 좀 비싸야지. 네 시계 하나 값이면 가방 다섯 개 값 아냐?”
돈 얘기가 나오자 모친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왜들 그러고 있는 게야. 채신머리없게. 그리고 둘째 너는 네 언니 말 새겨 듣거라. 아무리 그래도 시계는 너무 비싸지 않니.”
모친까지 가세하자 둘째 언니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나 참. 엄마까지 그러는 걸 보니 둘이 미리 입이라도 맞춘 모양이네. 아, 그럴 거면 다 같이 사지 말든가. 싹 다 환불해버리고 집에 갑시다.”
큰언니가 샤넬 쇼핑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화, 환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농담하는 거지?”
둘째 언니가 콧김을 흥 뿜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백이 저 어린 게 어떻게든 우리 가족 먹여 살리겠다고 혼자 밖에 나가 고생인데 우리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우. 그거 이리 내시우. 내가 냉큼 환불하고 올 테니까.”
둘째 언니가 큰언니의 쇼핑백을 잡아당겼다.
“이리 내!”
“안 돼! 손 떼! 으앙, 백아! 둘째 좀 말려봐!”
“언니들. 싸우지 마세요.”
둘째 언니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백이 너 큰언니 편들지 마. 이참에 우리도 할 건 해야지. 솔직해집시다, 다들. 예전에는 대모산 고 씨 가문이라 하면 한양 땅 알부자로 소문나지 않았냐고. 그런데 그놈의 프라다니 샤넬이니 사재끼면서 곳간 다 거덜 난 거 아니우.”
쇼핑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힘을 주던 큰언니가 둘째 언니의 말을 받아쳤다.
“거덜 나긴! 아직 아니야! 그리고 뭐 곳간 좀 비면 어때! 다시 채워 넣으면 되잖아!”
“나 참.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지금이 이럴 때냐고. 백이가 현 씨 사내를 홀리지 못하면 싹 다 내쫓기게 생겼는데 몇 푼 남은 재물이라도 아껴둬야지! 내놔!”
부욱!
두 언니의 실랑이 속에 그 튼튼한 쇼핑백이 뜯어졌다.
“으앙! 내 샤넬!”
큰언니가 울음을 터트리며 쇼핑백 안에서 쏟아지던 물건들을 주워 담으려던 그때.
“……어,”
백이 주춤거렸다. 주춤대는 백을 따라 둘째 언니가 시선을 돌렸다.
“너 왜 그러니?”
“응? 무슨 일 있어?”
큰언니와 모친도 고개를 움직였다.
“현라현 씨…….”
백이 난처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시선이 닿는 위치에 라현이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험악하게 인상까지 쓰고 있는 중이었다.
“현라현 씨도 쇼핑하고 계셨나요?”
라현의 손에는 구두 상자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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