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생의 법칙
2018.01.27.
휙!
그리고 이현은 라현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뒤로 홱 잡아당겼다.
“앗!”
백이 깜짝 놀라 일어서는 동안 라현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미친! 뭐하는 거야!”
이현은 별다른 표정 없이 소리치는 라현을 내려다보았다.
다짜고짜 사람을 바닥으로 팽개친 것치고는 여전히 차분한 모습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이젠 멀쩡해?”
“뭐?”
라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충격이 없지는 않은지 허리를 짚고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사람을 패대기치고는 무슨 개소리야. 진단서 끊어와야겠어?”
“멀쩡하군.”
“원래도 멀쩡했어!”
라현이 욱해서 소리쳤다.
“왜 여기서 형이 튀어나오고 그래? 지금이면 회사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아무리 낙하산이라지만 이렇게 날로 먹으려 드는 건 너무 양심 없잖아.”
“너한테서 회사 걱정 들을 건 없고. 나가서 세수라도 하지그래. 그리고 정신 차려.”
“정신 차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형 아냐?”
기가 찬지 라현이 턱을 저었다.
“형이 뭐라고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둘이 아무 사이라도 아니라지 않았어?”
“끼어들지 말라고도 했지. 네 능력으로는 못 가질 여자라고.”
“그러니까 그걸 형이 왜 걱정해주고 지랄이세요.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사이가 좋았다고?”
“그게 왜 걱정으로 들리는 건데. 말 그대로 끼어들지 말라는 소리야.”
“아오, 그러니까 형이 왜……!”
라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분위기가 예상외로 험악해지자 똑같은 현 씨 사내들이 왜 저러나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던 동물들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그만들 하세요.”
백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팔을 벌렸다.
두 사촌형제는 백의 팔 길이만큼 떨어지게 되었다.
“싸우면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
“…….”
그 말에 다들 순순히 입을 다물었던 것은 백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백은 싸우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산의 일족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게 순수하고 선량했지만, 그들에게도 일관된 생의 법칙은 있었다.
포식자는 사냥을 했고, 약한 이들은 사냥을 당했다.
한쪽은 먹이가 되어 소화가 되었다. 먹이를 먹은 쪽도 언젠가는 생이 다해 죽고 다시 산의 일부로 돌아갔다.
크게 보면 모두가 산의 일족으로서 제 몫을 다하는 것이었지만 하나하나 살피면 그래도 죽음은 슬펐다.
간혹 서로 자신이 더 강하다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납득할 만한 결과가 나오는 것과는 상관없이 싸움은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지금 백의 눈에는 두 사촌형제가 딱 그런 꼴이었다.
“일부러 다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참 위험한 일이에요.”
백의 생각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저 둥글고 커다랗고 촉촉한 눈을 글썽대며 이쪽을 올려다보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지긴 했다.
“……싸울 생각은 없었어.”
이현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라현도 혼자 계속 삐죽대고 있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할 얘기가 있어서 일찍 왔어. 시간 좀 내주겠어?”
그 말은 좀 열 받긴 했다.
“그럴 거면 줄 서. 내가 먼저 얘기 중이었던 거 몰라?”
끼어들지 말라더니 누가 끼어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현의 입장에서는 라현이 끼어든 게 확실했다. 어쩌면, 백의 입장에서도.
“얘기……라니요. 어떤 걸요?”
백이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일전에도 이현이 얘기하자며 방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한 말은 빨리 나가라는 것이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그가 다른 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우리 사이에 할 얘기라면 제법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방에 있을 테니까 괜찮을 때 와줘.”
그리고 이현이 자리를 떴다. 아니, 자리를 뜨려다 말고 몸을 돌려 라현의 옷깃을 쥐었다.
“너도 그만 나가.”
“뭐? 뭐라는 거야, 진짜. 이거 놔. 내가 사고치는 꼴이 그렇게 보고 싶어?”
“여기 계속 놔두면 그게 사고겠지. 목숨도 준다는 게 제정신이야?”
……탁!
꽤나 실랑이를 하긴 했지만 결국 이현은 사촌동생을 백의 방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톡톡.
이현이 라현을 끌고 나간 직후였다.
평창동 구 씨가 부리로 창문을 콕콕 두들겼다.
[어라? 구 씨다.]
구 씨는 막 대모산에서 날아오는 길이었다.
[백님.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이 몸 또한 백님의 은덕으로 무탈히 지내고 있습지요.]
도도가 팔짱을 꼈다.
[아유, 매일 보는 사이에 별래무양은 다 뭐야. 할 얘기나 빨랑 해줘.]
도래가 토도독 달려와 창문을 빼끔 열어주었다.
[미안, 구 씨. 너무 상처 받지 마. 오늘 누나가 기분이 안 좋아.]
도도가 짜증을 토했다.,
[그럼 화가 안 나고 배겨? 현 씨 사내가 다 된 밥에 잿물을 한 됫박 들이부었는데.]
[거야 그렇지. 잿물을 부은 게 아니라 아예 솥을 통째로 뒤엎었지.]
쿵!
약이 잔뜩 올라 있던 도도가 발을 굴렀다. 하지만 몸집이 작은 짐승인 탓에 뭘 해도 앙증맞아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다.
[내가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그 현 씨 사내. 꼭 복수할 테다!]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이지요.]
[시끄러워! 아무것도 모르는 비둘기는 조용히 하라고! 다른 현 씨 사내한테는 미혹술이 완벽히 걸렸었는데……!]
다시 생각해도 분했던지 도도가 풍성한 꼬리를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누나. 그러다 모질 나빠져.]
도래가 도도를 토닥이며 입가에 묻은 꼬리털을 떼주었다.
[으잉? 미혹술이 성공했습니까?]
뒤늦게 도착해서 상황을 알지 못했던 구 씨가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말 마라냥. 그러지 않았겠냥. 그런데 형놈이 방해했다냥.]
백의 다리께에 찰싹 달라붙어 꼬리를 부벼대던 안드레아가 말해주었다.
[형놈이라면……? 그렇다면 동생놈한테 성공했다는 말입니까?]
[그랬다냥. 동생놈은 형놈보다 더 포악하고 덜떨어졌다고 했는데냥, 이제 보니 안 그런 거 같다냥. 말도 잘 듣고 착한 인간이다냥. 형놈이 나쁜 거다냥.]
안드레아가 이마로 백의 손을 살살 문질렀다.
[너무 속상해 마시라냥. 저도 형놈한테 복수하겠어냥. 이번에는 콧등을 확 긁어줄 거다냥.]
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지 마, 안드레아. 그러다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
[아유, 걱정 마시라냥. 인간 따위가 뭐 대수라고냥. 고양이가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다냥.]
“아냐, 그래도 하지 마.”
안드레아가 시무룩해져서 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하면 안 되어냥? 왜 안 되어냥?]
“복수는 무의미한 일이야. 끝이 없거든. 그리고 말이야, 음…… 어쩌면 그 사람 말이 맞을지도 몰라.”
[냥? 뭐가 맞어냥?]
도도와 도래, 구 씨도 그 말을 들었다.
[백아? 뭐가?]
[현 씨 사내가 뭐라고 했는지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라현에게 미혹술이 제대로 걸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들어둔 대로 라현은 아주 공손해졌고 어떤 공물이든 바치겠다고 했다.
문제는 뒤늦게 등장한 이현이 한 말이었다.
라현은 그 땅에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했다. 그건 라현이 땅문서를 줄 수 없다는 뜻 같았다.
“못되긴 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만약 현 씨 일족 아무나 상관없었다면 어머니나 언니들이 처음부터 그 사람만 염두에 두진 않으셨을 거야. 그건 아무래도 다시 여쭤봐야 할 것 같아.”
도도와 도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그냥 현 씨 사내면 되는 게 아니었나?]
[에이, 그래도 되는 거면 좋을 텐데.]
구 씨가 반색을 했다.
[어이구, 그런 거라면 참으로 잘되었지 말입니다. 때마침 대모산 당주님께서 하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김에 백님도 보시겠다고 하셨습지요.]
도도와 도래가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
[뭐?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서 해?]
[맞아, 맞아. 당주님이 언제 하산하시는데? 벌써 돌아가신 거 아냐?]
구 씨가 당황해 고개를 좌우로 휘휘 내저었다.
[당치도 않으십니다. 분명 해 지기 전까지 오면 된다 하셨습지요.]
[그래? 어디로?]
[압구정 갤러리아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패밀리 세일이 있는 날이라시면서요.]
[……응? 패…… 뭐?]
대모산 식구들은 낯선 외래 문자에 눈을 끔벅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곳이 있습지요. 크고 네모진 건물입니다.]
[여기야 다 크고 네모진 걸, 뭐.]
어쨌거나 해 지기 전까지라면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백아,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겠다. 나가서 택시도 잡아야 하고.]
백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냉큼 일어섰다.
간만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가 오신다니. 언니들도 오시는 걸까?”
고작 며칠 집을 떠나 있었을 뿐인데 가족들과 집이 너무 그리웠다.
백이 허둥지둥 옷장을 열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나가야겠다. 기다리시게 만들면 안 돼.”
모친이 둔갑술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두 시간.
인간 세상에 머무는 단 일 분이 아까울 것이다.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백이 큰언니가 내어준 가방 중 하나를 골라들었다.
도도와 도래가 재빨리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냐아아앙. 저도! 저도 데려가면 안 되어냥? 저도 가고 싶어냥!]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 안드레아. 네가 들어갈 만큼 큰 가방이 없어.”
[저 아주 조그맣게 될 수 있어냥! 고양이는 유연해서 몸이 이렇게 이렇게 착착 접힌다냥!]
하지만 아무리 몸을 구겨 넣은다 한들 한계가 있을 테고 무게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백이 서운해하는 안드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냐아아앙. 꼭 돌아오셔야 한다냥. 가버리시면 안 된다냥.]
“그럼, 그럼.”
평창동 구 씨가 날 준비를 했다.
[그럼 제가 대문으로 나가 길 안내를 하지요!]
복닥복닥하던 백의 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시무룩해진 안드레아가 하품을 하더니 이내 백이 앉았던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 * *
“망할 인간 같으니.”
라현은 2층 거실의 소파에 드러누워 서까래 형태를 강조한 고풍스러운 천장을 노려보았다.
이현의 협박 아닌 협박에 굴해 얌전히 이만 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방금 전 백의 방에서 있었던 일은 그에게도 조금 낯설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목숨이라도 주겠다 했다고…… 내가?”
기가 막혔다.
“그게 말이 되나?”
그런 말을 자신이 여자한테 했다는 것도 기가 찼고, 그런 말을 했음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믿겨지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면 맥락이 있어야 하잖아.”
그 맥락이 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정신 나갈 것처럼 예뻐 보였다고 해도 그렇지. 그냥 여자잖아. 이름 빼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백에게 사귀자고 했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렇게나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런 여자라면 진지하게 연애할 마음도 들었다. 끼어들지 말라는 이현에게 느끼는 반발심도 진짜였다.
그런데 갑자기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에이, 어쩌다 보니 튀어나온 말이겠지. 꼬시기 전에 무슨 말을 못 해.”
라현은 미심쩍은 상황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었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는 지나치게 튀는 감도 있었지만, 라현에게는 원래 제 머리색인 듯 잘 어울렸다. 뚜렷하고 시원한 이목구비가 화려한 인상을 주는 탓이었다.
“그나저나 대모동 얘기는 대체 뭐야. 백이가 그 땅에 볼일이 있다는 소리야?”
머리를 굴려보던 라현은 선뜻 몸을 일으켜 이현의 방 앞으로 걸어갔다.
“어이, 사촌.”
라현이 이현을 불렀다.
그러나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전에 방 안에서 두런두런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실합니까?”
이현이 묻고 있었다. 무엇을.
“딱히 반대하는 임원진은 없다고요. 부사장 쪽은 알아보셨습니까?”
부사장이라는 얘기에 귀가 쭈뼛해졌다.
TB물산이 아니라 보험이었지만 라현의 부친은 부사장 직함을 달고 있었다.
“……니오, 그건 아니고. 그 땅에 지분을 갖고 계시니까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 물산과 유통, 칼텍스 쪽을 합해 평택에 신지구를 만들자는 의견이 초반에 거기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니 부친이 확실했다.
강남 쪽 노른자 땅은 대부분 이현에게 넘어갔지만 그 대신 라현의 부친은 생전에 증여받은 경기도 일대의 부동산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게 평택 인근이었다.
“……흠. 그렇다 해도 좀 더 알아보십시오. ……아니오. 물증은 없습니다. 생각이 전부입니다. ……게 해주세요. 불평은 안 듣습니다. 그럼.”
통화가 끝났다.
라현의 머리가 제법 복잡하게 굴러갔다.
외국에 있던 언젠가 모친이 평택 땅 얘기를 하며 이현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험담을 늘어놓던 게 기억났다.
그 땅이 걸려 있는 얘긴가.
듣자 하니 평택은 물 건너갔고 대모동 어쩌고 하는 곳으로 결정이 난 모양인데.
그런데 거기서 백이가 왜 나와?
그때 문 안쪽에서 이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올 거면 들어오든지.”
라현이 혀를 찼다.
귀신같은 인간. 전화하면서도 내가 엿듣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거로군.
“아, 뭐…….”
그러다 라현이 입을 다물었다.
보였다. 저쪽,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휙 내려가는 푸른색 그림자가.
백이었다.
그것도 옷을 갈아입은.
‘외출하나? 어디?’
라현이 돌연 씩 웃었다.
“……아냐. 됐어, 형. 고맙게도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아. 다음에 놀자고.”
어디로 가는 걸까. 저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네 능력으로 감당 못 할 여자야.
불쑥 이현의 충고도 머릿속을 스쳐갔다.
‘다른 남자라도 있나? 그런 여자였다는 소린가?’
모를 일이었다.
말도 안 되게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보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할 것만 같은 여자였지만 이현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숨겨둔 무언가가 있을지도.
게다가 라현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간들을 많이 겪어왔다. 표정쯤이야 배우 뺨치게 꾸며댈 수 있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 뭐, 직접 한번 봐줘야지.”
라현은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갔다.
백의 뒤를 밟을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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