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
2018.01.16.
“어이, 이제 솔직하게 말을 해줘야겠는데. 이현이 형은 그쪽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데?”
백은 전화를 끊고 저를 보는 인간 사내를 향해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 그야 아무 사이도 아니긴 합니다.”
참 심술 맞은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상황은 이러했다.
라현이 인천공항에서 평창동으로 온 것은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그 역시 본가에 딱히 볼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모친이 보내준 차가 막무가내로 평창동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굳이 귀국하자마자 걸음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그를 본가에 밀어넣을 생각을 버리지 않은 모친을 한심해하며, 그런 모친에게 결국은 장단을 맞춰주게 되는 자신을 동정하며 라현은 본가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문을 열어준 윤 실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집 안 전체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듯 추욱 가라앉아 있었다.
“집안 분위기 왜 이래. 누가 죽어가요?”
아무리 본가에 정이 없다 해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 실장은 울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운이 없으십니다.”
“대고모님이요? 아니, 앞으로도 백 살은 거뜬히 더 사실 것 같은 양반이.”
“아니요. 부회장님은 괜찮으시고요. 고 선생님이…….”
그러면서 말끝을 흐렸다.
“고 선생? 그게 누군데요?”
“안드레아의…… 하여간 들어오십시오. 지금 정원에 계시니 걸음 소리 너무 크게 하지 말아주시고요. 행여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 부탁드립니다.”
“……에?”
어이가 없었다.
대체 고 선생이 누구라고 그가 걸음 소리까지 주의해야 하는지.
“여기 너무 오랜만에 왔나 보네, 내가. 적응이 안 되는데요. 대체 고 선생이 누구라고요? 죽은 할아버지 새 애첩이라도 돼요?”
라현이 빈정대자 윤 실장이 화들짝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아닛, 무슨 그런 말을! 고 선생님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몹시 침울해하십니다. 배려 좀 해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놈의 배려를 뭐 이리 호들갑스럽게 부탁하냐 이거다.
이 집 식구도 아닌 인간이 침울해하는 게 대체 뭐라고.
“누군지 면상이나 좀 보죠.”
“아닛,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제발 별일 없이,”
라현은 곤란해하는 윤 실장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차고에서 안채까지 곧장 이어지는 길이 있었지만 고 선생이라는 인간이 정원에 있다기에 방향을 틀었다.
윤 실장이 뒤에서 펄쩍 뛰는 게 느껴졌다.
“아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야 정원이지.
라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걸 보면 꼭 심통이 난 사춘기 소년 같았다.
사실 라현은 태보그룹 3세 중에서 유독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던 쪽이었다.
두 형의 그림자 아래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던 성장 배경이 원인이라는 점은 전문 심리학자 타이틀을 달고 있지 않더라도 한 번씩은 했을 법한 말이었다.
나름대로 숨 쉬는 법을 찾기 위해 내내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성격이 되어 있었다.
딴에는 기준이 확고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저주상자처럼 여겨질 법한 성격이.
윤 실장이 지레 호들갑을 떠는 이유도 그 성격 탓일 것이다.
윤 실장이 못 따라오게끔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 도달한 라현은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
별은 없지만 유독 달빛이 환한 그런 밤.
고양이를 무릎 위에 앉힌 여자가 달을 배경으로 작게 노래를 흥얼대는 광경이었다.
밤이 너무 까매서였을까.
그러면 사람이 저렇게 희게 보이기도 하는 걸까.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보고 있자 눈치를 챘던지 여자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의아한 듯 턱이 까닥 기울었다.
그녀의 턱을 따라 제 심장도 쿵, 기우는 듯했다.
“당신이 고 선생이야?”
그렇게 묻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덧붙였다.
“예. 대모동 고 씨 일가 32대손 고백입니다.”
“나는 현라현이야. 이 집 식구야.”
입이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는 뱃속이 계속 저르르 떨리기 때문인 것 같았다.
라현은 남 앞에서 이렇게 긴장을 해본 적도, 이렇게 떨려서 자칫 입 밖으로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은 느낌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자 여자가 생긋, 작게 웃었다.
“통성명을 할 줄 아시다니 누구와는 달리 예의가 바른 인간이시네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 웃음이 화살이 되었다. 화살이 되어 그의 가슴 한복판에 인정사정없이 콱 꽂혔다.
“어…… 나도 반가워. 그런데 왜 기운이 없어?”
고백이라는, 이름까지 너무 예뻐서 이상한 여자가 눈매를 조금 구겼다.
라현은 그 작은 표정에도 가슴이 뜨끔해 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왜. 무슨 일인데.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는 건데.
“그러지 마. 기운 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뭐든 해줄게. 필요한 거 있어?”
라고.
그때 백이 방금 전보다 더 큰 웃음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예의가 바를 뿐 아니라 친절하시네요.”
심장이 저 밑, 아주 까마득한 곳으로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끙.”
입술 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그때 라현은 깨달았다.
이게 바로 첫눈에 반한다는 거로구나, 라고.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뒤를 따라온 윤 실장이 곁으로 다가섰을 때 라현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사귀는 사람 있어? 없으면 나하고 사귀자.”
그러자 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놀라서 귀를 쫑긋하는 아주 예쁜 동물을 연상하게 해서 라현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오늘부터 동물애호가가 되겠구나, 라고.
* * *
“아니,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셋째 도련님.”
윤 실장이 저를 부르는 호칭은 늘 애매했다.
도련님이라니. 사춘기 때도 학을 뗐는데 스물일곱이나 된 나이까지 듣고 있자니 목덜미가 근질거렸다.
그런데도 별로 타박할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순전히 백 때문이었다.
지금은 온 신경이 백에게 쏠린 상태니까.
셋째 도련님이 아니라 이 셋째 놈아, 라고 했어도 별말 안 했을 것이다.
“그만 가보시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셋째 도련님이야말로 어서 안채로 드시지요. 부회장님께 인사부터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싸고돌지 않아도 될 건데요.”
“제가 이 집에서 보고 들은 게 어디 한두 개뿐이겠습니까. 여기 계신 고 선생님은 안드레아 때문에 아주 특별히 모셔온 분이고, 절대 저얼대로 함부로 대하실 분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말도 들리지 않았다. 들렸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전부터 제 귀는 백을 향해서만 뚫린 것 같았으니까.
“내가 잘해줄게. 사실 여자한테 잘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당신이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살면서 가장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백이 고개를 갸웃하다 무릎 위에 앉은 뚱뚱한 고양이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저 고양이가 현 부회장이 키운다는 그 안 뭐시기인 모양이었다.
“그러지 말고 나 보고 얘기해. 왜 갑자기 고양이를 붙들어.”
라현이 몸을 숙여 억지로 백의 시선을 붙잡아 왔다.
백이 약간 당황한 듯 두 볼을 붉혔다. 홍조를 띤 뺨이 그렇게나 예쁜 건 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귀는 게 뭔지 몰라서 물어봤어요. 안드레아는 안다고 해서.”
백은 마치 고양이 나라 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게 웬 미친 소리야, 가 아니라 귀여워 죽겠네, 로 여겨졌으니 이건 첫눈에 반한 게 확실했다.
“사귀는 게 뭔지 몰라?”
“네. 그게 뭐지요?”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사귀는 게 뭐냐고 묻는 여자도 처음이었다.
라현이 씩 웃었다.
어쩜 저렇게 말하는 것마다 귀엽지. 사랑스럽지. 사랑스럽다 못해 돌아버리겠지. 게다가 섹시해.
나 정말 큰일난 거 아냐.
“어, 그건…….”
갑자기 라현도 진지해졌다.
그런데 사귀는 걸 정확히 뭐라고 해야지?
이 여자와 하는 거면 뭔가 특별하고 대단해야 할 것 같은데.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거. 그래서 나에 대해서 뭐든 알고 싶어 하는 거. 내가 지금 그러니까.”
백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현라현 씨가 누군지 방금 알았는데요.”
라현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러고 싶어졌다는 뜻이야. 사귀는 건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지 알아보자는 거야.”
그러자 백이 뚱뚱한 고양이를 들어올려 그와 눈높이를 맞추게 했다.
“그렇게 따지면 사귀는 건 안드레아와 먼저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저는 안드레아 때문에 여기 있는 거니까요.”
“냐아아옹.”
심술궂게 생긴 고양이가 그를 비웃듯 나른하게 울었다.
[어딜 들이대냐옹. 주제도 모르고.]
실제로 안드레아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라현이 모르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제길. 고양이하고 사귈 수는 없잖아.”
백의 눈이 더 똥그래졌다.
“왜지요? 저는 안드레아를 아주 좋아하고 안드레아도 그래요. 서로 알아가는 단계이고요.”
“냐아아아아아아앙.”
[저도, 저도냥! 저도 백님하고 백년해로하고 싶어냥!]
엉덩이를 들썩들썩대며 길게 울어대는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저가 말을 잘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제 잘못이었다.
대체 어떤 정규 교육을 받았기에 사귄다는 말뜻을 모르고 있냐며 백을 탓할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게 다르…… 아,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라현이 안드레아를 안은 백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살갗이 닿자 짜릿한 반응이 왔다.
진짜 돌 지경이었다.
첫눈에 반하면 원래 이런 건가.
감각이며 감정이며 롤러코스터처럼 멈추지 않고 위로 아래로 씽씽 내달리는 건가.
“나하고만 손잡는 거야. 나하고만 안고 나하고만 키스하는 거. 그리고 나하고만 데이트하는 거야.”
라현은 속으로 백이 “그럼 데이트가 뭐죠?”라고 물을 때를 대비했다. 역시나 저 나이가 되도록 데이트의 뜻을 모르는 것도 절대 백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답은 의외였다.
“그렇다면 안 됩니다.”
너무 빠른 거절이었다.
“뭐? 왜?”
그리고 라현의 스물일곱 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거절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라현이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물었다.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여자는 거의 없었고, 그것은 굳이 제 이름이 현라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성함 정도밖에 모르는 인간을 두고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더 오래 보고 현라현 씨가 어떤 인간인지 안 다음에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소리야? 아니, 그래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사귀는 거라니까.”
“아니요. 그래서가 아니고요.”
백이 다시 눈매를 찡그렸다.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다던 말을 할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라현은 지금 백이 하려는 대답이 그 안 좋은 일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을 잡고 안고 키스하는 거요. 저는 현이현 씨와 해야 해서요.”
“……뭐?”
이현의 이름이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첫눈에 반한 여자 입에서.
“다른 인간과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
라현이 할 말을 잃었다.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들이 뭔지도 알지 못했다.
다시 말이 나온 것은 윤 실장이 입을 딱 벌리고는 “보, 본부장님과요? 아, 그런 사이셨…… 아니, 이걸 어떻게…… 아니, 사실 두 분이 보통 사이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하고 중얼대는 걸 듣고 난 뒤였다.
“이현이 형하고 사귀어?”
“예? 아니요. 그건……,”
“아니, 대답하지 마.”
기분이 나빴다. 어쩐지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백에게 다른 남자가 있어서 그러는 건지, 그 남자가 하필이면 그놈의 둘째 형이라 그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는 당신한테 물어봤자 소용없을 게 뻔하지. 그러니까 형한테 물어볼게.”
그리고 나는 현이현이 멀쩡하게 연애한다는 말도 못 믿겠고.
라현이 몸을 돌려 윤 실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한테 전화 좀 해줘요.”
“……뭘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윤 실장의 표정은 딱 그거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오자마자 사고 칠 준비냐.
그런데 이렇게 돼버렸다.
그 역시 한국에 돌아온 첫날에 이런 일을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설마 이런 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고작 전화 한 통인데 그걸 이렇게 따지고 들어요? 제가 없는 새 뭐 많이 달라졌나 봐요. 저는 그대론데요.”
내가 사고 칠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알아서 잘 쳐줄 수 있다는 숨은 협박을 윤 실장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외출하셨으니 제 전화는 받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현은 전화를 받았다.
라현이 말했다.
“나야, 형.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긴 하지만 반갑지는 않았다. 특히나 이현의 대답이
[끼어들지 마.]
라면 더더욱.
[그런 꼴 두고 볼 일 없,]
라현은 전화를 그대로 툭 끊어버렸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백과 이현은 아직 무슨 사이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윤 실장이 이제 와서 당황할 일도 없었고 이현이 저렇게 대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형은 아무 사이 아니라는데?”
그게 맞았다.
“아무 사이 아니긴 합니다.”
그러니 이제 시작이었다.
#Private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