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타월을 입어야 하는 이유
2018.01.09.
뽀얀 수증기, 알몸에는 타월 한 장.
촉촉하게 물기가 맺혀 있는 피부. 뽀얗게 드러난 쇄골과 어깨선, 그리고 목덜미.
습기를 머금어 평소보다 더욱 순진하고 야릇해 보이는 눈동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은 참 이상해.”
살짝 젖은 머리칼을 조심조심 틀어올리며 백이 중얼거렸다.
작은 손을 휘휘 저어 수증기를 퍼트리던 도래가 백의 목소리를 들었다.
[응? 뭐가, 백아?]
“미혹술이라는 건 말이야, 기본적으로 상대에게 예쁘게 보여야 하잖아.”
[그렇지.]
“그럼 예쁘게 꾸며야 하는 거 아냐? 예쁜 옷도 입고 말이야.”
[그렇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런데 어머니가 그렇게 예쁘다고 하신 샤넬이니 프라다니 하는 것을 놔두고 왜 굳이 타월을 입어야 하는 걸까?”
[글……쎄?]
그것은 대모산에서 평생을 살아온 산의 일족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작은 타월로 어렵사리 틀어올린 머리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 삐져나와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그게 간지러웠던지 백이 그곳을 살짝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애초에 옷도 아니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말이야.”
[그건 그래.]
[맞아. 나는 당주님이 예쁘다고 하신 것들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타월보다는 그게 더 나은 거 같아.]
도도와 도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역시나 결론은 인간은 알 수 없는 아랫세상 것들이라는 게 전부였다.
냐아아아옹.
그때 욕실 문 밖에서 안드레아가 작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백아, 백아.]
[오고 있나 봐. 준비됐어?]
백이 눈을 꼭 감고 심호흡을 했다. 제 안에 쌓여가는 영기와 그것을 다룰 자신에게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어제보다 더 영기가 커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응. 됐어.”
[좋았어.]
그 말을 끝으로 도도와 도래가 재빨리 욕조 안으로 숨었다.
탁탁.
예의상 기척을 죽인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이었다.
“아무도 없나?”
백이 숨을 죽였다.
끼이익.
다음 순간 욕실문이 열렸다.
* * *
“…….”
또 당했군.
수증기가 뽀얗게 어린 욕실 안에서 타월을 두르고 있는 백을 보자 든 생각은 그 하나였다.
젠장. 방심하면 안 되겠어.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이현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쾅 닫고 돌아서는 게 맞을 텐데 시선은 본드칠이라도 한 것처럼 백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래서 더 환장할 노릇인 격하고 다급한 욕구가 피어올랐다.
“아직도 못 알아들었나?”
백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촉촉이 젖은 눈을 하고.
별이 잔뜩 내려앉은 밤바다 같은 눈이었다. 이현은 누군가가 세상에서 제일 야한 장소를 묻는다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밤바다. 별이 많은.”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기하라고 했잖아.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고.”
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소용이 없기는 개뿔.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 지는 쪽은 그가 될 것이다.
욕조 끝에 걸터앉은 백이 발끝을 까닥였다. 귀엽게. 귀여워서 야하게. 야해서 돌아버리게.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건데요.”
“어째서. 소용없을 거라니까.”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어쩐지 그 말이 다부진 다짐처럼 들려왔다. 백이 타월 한 장 두른 채 맨발을 까닥대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번쯤 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 땅이 대체 왜 그렇게 탐이 나냐고.
다른 건 안 되겠냐고.
너는 정말로 내게서 그 땅만을 원하는 거냐고.
“포기해.”
“싫어요. 아니, 안 돼요.”
백이 주먹을 꼭 쥐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뜻밖에도 그녀의 눈에는 물기로 형상화된 감정들이 고여 있었다.
아까 별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던 게 이 감정들이었던 모양이었다.
“현이현 씨가 아무리 저를 싫어하셔도 그럴 수 없어요.”
“……싫어한다고?”
이현은 순간 무척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싫어한다니.
차라리 싫어할 수 있으면 다행일 텐데.
사실 그는 자신이 없었다.
만약 백이 지금 그렁그렁 고인 감정을 혹시라도 흘리게 된다면 지금처럼 딱 잘라 “포기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네. 이건 저희 식구들에게 너무 중요한 일이니까요.”
백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백은 있는 힘을 다해 영력을 끌어올려 미혹술을 준비했다.
그간 있었던 실패가 배움이 된 것일까.
백은 스스로 두 팔을 들어올려 이현의 목덜미에 감았다. 그렇게 하면 눈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를 봐주세요.”
울 것 같았다.
자꾸만 실패하는 이 상황이 안타까워서.
괜찮다 하지만 숲의 가족들 모두가 걱정에 애가 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아직 이렇게 어려서. 왜 내 영력은 아직도 부족해서.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냉정해서.
왜 이렇게 꼼짝도 하지 않아서.
왜 나를 싫어해서.
왜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리고 백은 낮고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었다.
이런 말과 함께.
“울지 마.”
“……네?”
“부탁이니까 제발 울지 마.”
그럼 더는 못 참을 것 같으니까.
백은 울음을 참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이현이 그대로 저에게 마음을 놓기를 바라며.
“……젠장.”
이현이 뭐라고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낸 것 같았다. 백이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이현은 백의 턱을 붙잡아 입술을 겹치는 중이었다.
오늘의 충동은 눈물이 더해져서인지, 아니면 저녁 식사 때의 작은 혼란 탓인지 한층 더 제어가 어려웠다.
복숭아 즙으로 빚은 것 같은 입술을 삼키며 이현은 온전한 충족감을 느꼈다.
마치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빈 곳이 빈틈없이 꽉 채워지는 느낌.
그건 백이 제 상처를 핥을 때 느꼈던 치유의 감각과도 비슷했다.
제 팔 안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고 지금 자신이 해야 마땅한 일은 이렇게 그녀에게 키스하는 일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너도 그렇다고 해.
너도 나와 같다고 해.
이유가 뭐였든 나를 원하는 거라고. 내가 너를 원하는 것처럼.
사탕처럼 매끄러워진 입술을 미끄러져 내려온 이현의 입술이 쇄골에서 멈췄다.
이현의 손이 천천히 등을 타고 내려갔다. 알몸을 감싼 타월이 손바닥 아래서 뭉클거렸다.
한 장의 타월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게 되어버렸다.
“아……,”
백의 두 발이 들렸다. 그러나 타월에 감싸인 허리를 이현의 두 손이 단단히 받치고 있는 상태라 조금도 불안정하지 않았다.
백이 이현의 목덜미를 꼭 붙든 채로 물었다.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요?”
너를 안고 싶은 상황.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이현은 그런 말이 나오려는 입술을 백의 살갗에 묻었다.
“너는?”
“……네?”
“너는 어떠냐고 묻는 거야. 여전히 내게 바라는 건 하나야?”
“…….”
백이 천천히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백을 들어올려 안은 채로 그녀가 내는 모든 소리를 들었다.
눈꺼풀이 세차게 감기는 소리에 이어 감은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에게는 대모산의 땅문서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게 꼭 필요해요.”
……그렇군.
이번에는 이현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제 바람이 깃털처럼 허무해졌다.
“그렇다면.”
탁.
이현이 백을 욕조 가장자리에 앉혔다.
두 사람은 키스하기 이전의 구도로 돌아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나 역시 달라질 일은 없어.”
그리고 이현이 등을 돌려 욕실을 나섰다.
이현의 등은 늘 속도가 빨랐다. 아주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안 돼.”
백이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백아.]
[오늘도 실패한 거야?]
욕조에서 도르륵 기어 올라온 도도와 도래가 양쪽에서 백의 발목을 꼭 끌어안았다.
백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엉망이었다. 도무지 친구들한테 보여줄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괜찮아, 백아. 내일 또 하면 되잖아.]
[응응. 괜찮아, 괜찮아.]
“…….”
그럴까. 정말 또 하면 될까.
그런데 이상해. 또 하고 싶지가 않아. 너무 마음이 아파.
저 사람의 등이 아파.
저 등을 다신 안 봤으면 좋겠어.
또 저 등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그래.”
백이 작은 목소리나마 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이 더 흐른 뒤의 일이었다.
* * *
“빌어먹을.”
이현은 호박색 액체가 담긴 술잔을 들어 이마에 올렸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자세는 편해 보이는 것과 정반대였다.
“안 식어.”
술은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현은 술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그가 찾은 것은 전화기였다.
[오, 현이현? 웬일이야? 이 시간에 먼저 전화를 다 하시고?]
친구는 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이현은 날카롭게 일어선 짜증을 감출 생각도 없이 빠르게 내뱉었다.
“지금 어디야?”
[음? 나오려고? 나야 이 시간에 있는 곳은 뻔하지. 저번에 거기야.]
이현이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8시 55분.
밤은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삼십 분 정도 걸릴 거야.”
[뭐? 진짜?]
친구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역시 저속한 뉘앙스를 숨기지 않았다.
[더 걸려도 괜찮아. 세팅해 놓을게. 어떤 게 좋아, 오늘은?]
하얗고 달콤한 복숭아. 그런 게 있다면.
“아무거나 상관없어.”
이현은 방금 샤워를 마친 몸에 셔츠와 슬랙스를 걸쳤다.
평소와는 달리 덜 마른 머리가 느슨하게 흘러내린 채로 그가 집을 나섰다.
친구가 마련해 놓았을, 평소라면 거들떠볼 이유가 없었던 밤의 향락을 향해.
* * *
“예? 어딜 가신다고요?”
한밤중에 불려나온 박 과장은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지금 현이현 본부장이 간다는 그곳이, 요새 들어 돈 좀 쓴다는 인간들 사이에서 제일 뜨겁다는 그 ㅊ동 ㄱ클럽이라고?
클럽에 간다고?
저, 인간이?
“혹시 거기서 무슨 비밀회의 같은 거 주최하십니까? 이를테면 비자금용 차명계좌 개설이라든지, 아니면……,”
뒷좌석에 앉은 이현이 귀찮은 듯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이미 술이 한 잔 들어가서 별수 없이 저를 불렀다는 인간이 퍽도 멀쩡해 보여서 부아가 치밀었다는 것은 박 과장만의 비밀이었다.
“술 마시러 갑니다.”
“에…… 외람되지만, 본부장님이요?”
“네.”
“거긴 엄밀히 말하면 술 마시는 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현이 피식 웃었다.
박 과장은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꽉 밟을 뻔했다.
허, 참. 저 인간이 웃기도 하는구나.
저런 걸 보면 확실히 술이 들어가긴 한 모양이지.
“하지만 술 안 마시는 인간도 없는 곳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요. 그런데 본부장님은 그런 곳은 안 다니시는 분 아니었습니까?”
이현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에, 물론 뭐가 더 그르다 낫다 그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니고요. 아이고, 제가 어디 감히 그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밥줄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요.”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이현의 답은 불쑥, 예상치 못한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예? 뭐를 말입니까?”
“뭐가 다른지.”
“예? 다른 게 뭡니까?”
그 답은 이현도 몰랐다.
친구가 기다리는 그곳에는 백과 같은 여자들이 잔뜩 있을 것이다.
필요에 의해 다가서는 여자들. 필요에 의해서 사랑할 수 있는 여자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랑스러워질 수 있는 여자들.
손 내밀면 얼마든지 골라잡을 수 있는, 복잡할 것 하나 없는 여자들이.
그런 걸 알기에 단 한 번도 욕망해 본 적 없는 그런 것들이.
“제가 그새 다른 인간이 됐나 싶기도 하고,”
이현이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의 외출이 있을 거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그 여자가 정말 다른 건가 싶기도 하고.”
“예? 여자요?”
“……모르니 확인하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박 과장도 더는 묻지 않았다. 단지 짐작을 할 뿐이었다.
이현이 답지 않게 어렴풋하게나마 개인적인 일을 꺼내놓는 이유가, 어쩌면 그가 두 번 다시 발도 안 붙일 것 같던 본가에 제 발로 들어간 일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그게 뭔지 저는 조금도, 요만큼도, 하나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부디 잘 확인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현의 차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고급차들이 즐비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 * *
“여기야, 친구. 어서 와서 앉아.”
클럽 내부는 이현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세팅을 마쳤다는 친구는 그날보다는 조금 더 멀끔한 모습으로 이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친구는 이현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일을 인생의 새로운 목표로 삼은 사람처럼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겠어? 한 매니저가 룸마다 탈탈 털었어. 현이현이 온다는데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이현은 저에게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흘려넘기는 대신 일일이 맞부딪쳤다.
클럽이 아니라 그대로 연말 시상식장으로 가도 될 만큼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들이 그에게 아찔한 미소를 보내왔다.
“자자, 뭐 이런 건 천천히 하고. 술부터 하지 그래? 네가 마시는 게 뭐였더라? 하도 밖에서 술 마시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알 수가 있나.”
그러면서 친구는 이현이 집에서 마셨던 것과 비슷한 호박색 술을 골라 들었다.
기호를 모른다는 말은 그저 엄살이라는 소리였다.
“얼음? 아니면 스트레이트? 아, 이걸로 괜찮아?”
“아무렇게나.”
“나 참. 그런다고 내가 속을 줄 아냐. 아주 빌어먹게 까다롭다고 사방팔방 소문 다 난 마당에.”
친구가 술잔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탁!
이쪽에서 사람을 부르지 않는 이상 열리지 않아야 할 문이 열렸다.
“뭐야?”
친구가 짜증스럽게 문 쪽을 쳐다봤다.
“누가 함부로 이 방 문을 열어?”
“제가요.”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또각대는 구두를 먼저 밀어넣는 여자는 이현도 익히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익숙한 배우. 강남대로 가장 큰 전광판 두 개의 주인공.
“현이현 씨 오셨다는 얘기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어요. 이 정도면 여기 들어올 자격 되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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