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유전자의 힘
2017.12.30.
“어머니, 언니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백이 대모산 가족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부디 무사히 땅문서를 가져오길 천지신명께 빌어주세요.”
말굽 무늬 스카프 끝으로 눈물을 콕콕 찍어대던 모친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그래. 내 귀하디귀한 막내딸. 잘 다녀오너라. 그간 둔갑술이 그리 훌륭해졌으니 분명 미혹술에도 진전이 있었을 게다.”
백이 식구들과 이별하는 곳은 대모산 입구에서 아흔아홉 걸음을 벗어난 곳, 다시 말해 영력으로 보호되는 산의 경계를 벗어난 곳이었다.
곧 평창동 본가에서 보내온 차가 도착할 것이다.
인간이 제 발로 올 수 있는 곳은 딱 여기까지였다. 덕분에 모친과 언니들은 모처럼 둔갑술로 인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다들 눈이 번쩍 뜨이는 화려한 생김새의 미녀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유독 희고 청초한 백의 미모였다.
“백아. 이거 가져가.”
모친과는 달리 아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던 큰언니는 아끼고 아끼던 클래식 백을 백에게 들려 주었다.
“이거 메고 다녀. 내 가방 중 제일 비싼 거야. 강남 S백화점에 딱 하나 남아 있던 걸 새치기까지 하면서 샀지. 그 뒤부터 이 가방은 나한테 부적이나 다름없었어.”
모친도 질세라 목에 두르고 있던 말굽 무늬 스카프를 휘리릭 풀어내 백에게 감았다.
“다른 건 다 언니들이 챙겼으니 이거라도 하고 가려무나. 어미 냄새가 많이 날 게다.”
둘째 언니가 핀잔을 주었다.
“다들 청승은. 막내가 귀양 가우? 택시 타면 삼십 분 걸리는 곳에 가서 며칠 있다 오겠다는데.”
“그래도 이런 적은 없었잖아!”
큰언니가 얼굴을 감싸 쥐고 으엉, 울음을 터트렸다.
“쯧쯧……. 잘한다. 울어도 백이가 우는 거지 왜 언니가 울고 그러우? 가뜩이나 집 떠나는 애 심난하게.”
하지만 핀잔을 주는 둘째 언니의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게 울렁울렁대는 것도 사실이었다.
둘째 언니는 갈색 로고가 알록달록 박혀 있는 네모진 캐리어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에 도움 될 만한 건 다 넣었어. 얘, 백아. 뜻대로 안 된다고 너무 초초해 말고 책에서 읽은 거 하나하나씩 해보렴. 시간은 아직 많아요.”
백도 눈물이 글썽대는 눈으로 둘째 언니를 마주 보았다.
“예, 언니. 그렇게 할게요.”
“비둘기 자주자주 보내고. 구 씨가 늙어서 기운 빠진다 그러면 다른 비둘기라도 보내. 알았지?”
“예, 언니.”
간신히 눈물을 추슬렀을 무렵 평창동에서 보낸 차가 도착했다.
“벌써 나와 계셨습니까. 전화를 주셨으면 마땅히 제가 집 앞까지 갔을 텐데요.”
후다닥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는 하마터면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아우, 무슨 이런 유전자가…… 짐은 이게 답니까?”
시들지 않는 미모로 칭송받는 프랑스의 모 여배우가 아름다움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DNA라고 했다던가.
오늘 고 선생의 가족들을 보니 너무도 이해가 갔다.
어쩜 이렇게나 아찔한 미녀들일까.
그리고 오늘따라 강남 공기는 왜 이렇게 좋은지. 산이 가까워서 그런지 어제 밤사이에 중국 공장들이 다 망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안이 말랐다. 뭐 하나라도 실수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걸음이 자꾸 꼬였다.
“차에 싣겠습니다.”
그래서 죽어라 땅만 보고 짐만 옮겼다.
짐은 트렁크 두 개에 보스턴 백 하나가 전부였지만 다들 묵직했다.
짐을 싣는 내내 훌쩍이는 소리와 다정한 당부들이 끝도 없이 오갔다. 참 화목한 가족인 모양이었다.
“다 됐습니다. 문 열어드리겠습니다.”
운전기사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러느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백의 가족들을 봐야했다.
“……음?”
그러다 좀 이상한 것을 보았다.
무슨 배우 뺨 후려치게 예쁜 거 아니냐 싶었던 백의 큰언니가, 입가에 수염 한 올을 삐죽 달고 있었던 것이다.
미녀에게 수염이라니. 그것도 굵고 긴, 검은색 수염 한 올이라니.
“저기, 그…… 입술 옆에…….”
실례란 것을 알지만 저도 모르게 손이 수염을 가리켰다.
“입술 옆에 뭐…… 어맛! 난 몰라!”
큰언니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벌써 시간이 다 됐나 봐!”
참 이상했다. 너무 하얗고 길게 쭉 빠진 우아한 손가락이 계속 짧고 뭉뚝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손톱은 검게……
“백아! 너 빨리 가.”
둘째 언니가 백을 떠밀듯이 차 뒷좌석으로 몰아넣었다.
모친은 큰언니의 어깨를 감싼 채 그대로 홱 등을 돌렸다.
아무리 좀 전까지 손을 꼭 붙들고 울었다지만 막상 차에 오르니 손 한 번 흔드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뒤도 안 돌아보고는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어…… 그냥 가시는데요.”
운전기사는 안쓰러움을 담아 백에게 말을 건넸다.
“예. 시간이 다 되어서요.”
기분 탓일까. 가뜩이나 눈물이 그렁대는 눈을 하고 있는 백의 안색이 창백하게 보였다.
그러자니 한층 더 청초한 목련 같은 게…….
‘으아, 정신 좀 차리자, 좀! 모셔가야 할 손님이잖아!’
라고 속으로 외친 운전기사가 백에게서 눈을 떼고 핸들을 잡았다.
“저, 혹시 모르니 안전벨트 꼭 하십시오. 제가 운전을 참 잘하는데…… 진짜 진짜 안전운전에 무사고 경력 십삼 년째입니다만 오늘은 왠지 좀 자신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핸들을 꽉 쥐었다.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다독이며.
* * *
“어이쿠, 그렇게 됐습니까?”
박 과장은 자신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는 본가의 윤 실장이었다.
“아니, 저런. 부회장님까지요? 아이고, 이걸 어쩌나…….”
원래 박 과장은 본가와 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무늬만 남은 보안팀의 팀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사실 현 여사는 박 과장을 이현과의 연락책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과장의 낙하산 인사에 용케 동의한 이현은 보란 듯 보안팀을 난도질해 버렸다. 기존의 경비팀 업무와 인원을 보강해 신생 보안팀을 무능력의 표본으로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박 과장의 존재는 또 다른 낙하산 인사인 이현의 경우를 희석시키는 데 톡톡히 제 몫을 했다.
본부장님 낙하산이잖아, 라고 하면 그래도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보안팀보다야 일 열심히 하는 본부장님이 백 배 낫지, 라는 식이었다.
이현과 현 여사, 거기에 회사 동료들까지. 삼면에서 눈총을 받고 있는 박 과장의 인생은 고달팠다.
보아하니 본격적인 고난은 이제 시작될 듯싶었다.
“에…… 에, 사실 뭐 그런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박 과장은 윤 실장의 집요한 추궁에 결국 백에 대한 이야기를 실토하게 되었다.
“본부장님께서 갑자기 스토커가 생겼다고…… 예? 에이,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하시는 것은 본부장님뿐이시고, 저야 스토킹에 대한 증거는 문자 하나 본 적이 없지요. ……예? 아니, 그럼 됐다고요? 아니, 그건 또 좀……,”
박 과장이 곤란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였다.
“그래도 본부장님이 또 헛소리를 남발하시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야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입장입니다만…… 아하, 그런 의도시면…… 네? 뭐라고요?”
콰당!
박 과장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벌렁 자빠졌다.
“뭐라고…… 본부장님이 본가로 들어가신단 말입니까? 하, 이런.”
이현과 본가의 관계가 어떤지는 박 과장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가 삼면초가 월급 벌레 인생을 사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으니까.
그런데, 뭐? 본가로 들어간다고?
그것도, 본인이 스토커라고 말한 여자 때문에?
그 스토커에 대해 말하자면 이현은 이름 두 자로 신원을 알아내라 저를 닦달했으며, 그럴 거면 경찰을 부르자는 말은 깡그리 무시했다. 물론 이유 같은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스토커가 나타나지 않던 며칠간은 화풀이 업무로 저를 밤 11시까지 회사에 붙들어 두었으며, 스토커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말 이후에는 얼음 같은 무표정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괜히 겁먹게 만들었다.
“예, 뭐. 아주 잘 알겠습니다. 허허, 네.”
박 과장은 저도 모르게 이를 슥슥 갈며 말했다.
“저도 기꺼이 돕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윤 실장님.”
전화를 끊은 박 과장은 갑자기 상쾌한 얼굴이 되어 사무실을 나섰다.
“본부장님께 이사 도와드리겠다고 해야지. 후후.”
윤 실장의 말에 의하면 오늘 그 수상쩍은 스토커 겸 애니멀 커뮤니케이터가 본가에 입주한다고 했다.
이제까지 이현이 했던 짓을 생각해 보면 분명 오늘 자기도 본가로 옮기겠다고 나설 테니 이참에 핑계를 대고 따라가서 이현이 스토커를 어떻게 대하는지 봐둘 작정이었다.
박 과장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오늘 그 스토커가 본가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본부장님 짐도 미리 옮겨놓을까요?”
라는 말에 이현은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럼 부탁드립니다.”
라는 답을 내놓았다.
* * *
“냥냥!”
“까아악! 깍!”
“구구구구!”
“멍! 멍!”
“꼬오꼬오!”
백이 따듯한 환대를 받으며 평창동 현 씨 본가에 입주한 지 한 시간 뒤.
적당히 짐을 푼 백은 안드레아와 함께 사랑채로 이어지는 정원으로 나왔다.
명분상으로는 안드레아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입주했으니 뭐라도 하는 표시를 내야 했다.
다행히도 인간 문물에 박식한 둘째 언니가 우울증 치료법을 몇 개 알려주었다.
충분한 산책과 햇볕 쬐기는 그중 필수라고 했다.
안드레아는
[냐아앙. 저는 우울증 아닌데냥. 정원 나가는 건 귀찮은데냥. 해는 창문에서 쬐는 거다냥.]
이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백이 품에 안아서 데리고 나간다고 하자
[그럼 좋다냥! 당장 가자냥!]
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둘이 정원으로 나서자 어떻게 알았는지 평창동 구 씨가 날아왔다.
구 씨는 부리에 침이 마르도록 인간 세계를 훤히 밝히는 대모산 백여우의 신령한 자태를 칭송했다.
그 소리가 주변에도 쩌렁쩌렁 울렸던 것일까.
근처 북한산과 인왕산에서 한두 마리씩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세상에! 이분이 말로만 듣던 백영수이신 겁니까악.]
[이거 광영이올습니까악.]
이어서 담 두 개 건너 옆집에서 키우는 셔틀랜드 쉽독이 목을 쭉 빼고는 컹컹대기 시작했다.
[좋은 냄새 난다멍. 재미있어 보인다멍. 나도 끼고 싶다멍.]
그러자 갑자기 낭창한 닭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셔틀랜드 쉽독 장군이가 사는 집은 은퇴한 모 대사 소유였는데, 마지막 주둔 국가에서 교민 아이에게 선물받은 병아리 한 쌍을 차마 잡아먹지 못하고 한국까지 들고 왔다.
그 병아리들이 무럭무럭 자라 셔틀랜드 쉽독 장군이와 정원을 놓고 영역 다툼을 하는 훌륭한 싸움닭으로 거듭났다.
장군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담 위를 껑충껑충 뛰어오르자 각자 병혜와 병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싸움닭들도 꼬오꼬오 날개를 푸드덕대기 시작했다.
[저 바보개만 재미 볼 수 없닭.]
[좋은 건 같이 하는 거닭.]
때아닌 소란에 이웃들도 하나둘씩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엊그제 브레멘 음악대를 영어 유치원에서 읽었던 이웃집 꼬마는 평창동 음악대가 결성된 거냐며 반색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소란이 그저 시끄럽지만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제각각인 소리였지만 뭔가 오묘하게 화음도 맞는 것이 아옹다옹대며 같이 노는 소리 같기도 했다.
“참 이상하지 않아요?”
널찍한 거실 창으로 정원의 광경을 쳐다보던 현 여사가 한마디 했다.
오후를 데우는 차향은 그윽했고, 찻잔을 쥐는 현 여사의 표정은 찻물의 온도처럼 미지근하기만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부회장님. 시끄럽다는 생각이 안 드는군요.”
“참 이상하지. 스토커였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도무지 고깝게 보이는 구석이 없으니.”
“저도 그렇습니다.”
햇살마저 따사롭게 반짝대는 정원의 풍경은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여기를 봐도 예쁘고 저기를 봐도 사랑스러운 백이 고양이와 새들에게 둘러싸여 정원을 거니는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이쪽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 반대라면 말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윤 실장이 헛숨을 삼켰다.
“흠, 본부장님 그 성격에 말입니까?”
“웬걸요. 오히려 그런 성격이 불붙으면 무섭지.”
“에이, 그래도 이제껏 어디 그런 낌새도 한번 없었던 분이지 않습니까.”
“그 성격에 당장 짐 싸서 들어온다고 하잖아요. 엊그제 처음 본 나도 벌써 마음이 가서 어쩔 줄 모르는데 사내들은 오죽할까. 윤 실장은 마음 안 가요?”
윤 실장이 헛기침을 흘렸다.
“어흠, 흠. 아니, 그거…… 너무 짓궂은 말씀 아닙니까. 제 나이가 오십이 넘었습니다, 부회장님.”
“나는 칠십이 다 되어갑니다.”
“아니, 그게…….”
그러니 진짜로 마음이 있냐고 물은 건 아닐 테고, 그만큼 이상하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남녀관계만큼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말이 되는 것도 없을 테니까.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재능을 젖혀두고, 백에게 여러모로 석연치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은 현 여사도 짚고 있었다.
그래도 도무지 나쁜 감정이 안 드는 게 참 수상했다.
“나는 이현이 녀석도 딱 내 심정일 것 같거든. 그러니 스토커니 뭐니 더 그러는 게지.”
“그게…… 예, 저도 말씀하신 바를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현 여사가 찻물을 한 모금 넘겼다. 오늘따라 차가 아주 달았다.
“호호. 나야 뭐 이현이가 집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고 선생 덕을 보는 셈이니 불평할 게 없지. 오늘 저녁은 새우탕 어떨까요, 윤 실장.”
“예……? 하지만 본부장님은…….”
이현이 제 입으로 갑각류 알러지가 있다고 했다.
차향이 묻어나는 현 여사의 미소가 정말로 짓궂어졌다.
“그럼 어떻게 나오는지 좀 보자고요.”
대놓고 불편하게 만들어도 이현이 계속 버티고 있는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백 때문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었다.
“고 선생이 과연 그 녀석을 다루는 회초리가 될 수 있는지.”
공기 중에 번져가는 차향 속에서 윤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옳으신 말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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