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8화 (8/68)

#08. 뜻밖의 동거(2)

2017.12.26.

‘그 사람이다.’

이현의 목소리가 귀에 휘감겼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어떤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백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 뭐라고 해야 하지. 나는 사기꾼이 아닌데.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백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이현도 느꼈을 것이다.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구나.”

현 여사가 입을 열기 전까지 조금도 시선을 옮기지 않은 것을 보면.

“집을 나간 뒤로는 식구도 아닌 것처럼 전화도 통 받지 않더니. 오늘은 어찌 된 게니?”

대답은 백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현의 시선이 대신하는 듯했다.

저 여자 때문입니다, 라고.

“집에 신원도 알 수 없는 사람을 들이셨다고요.”

마침내 이현이 느리게 시선을 떼어냈다.

식탁 아래로 꼭 쥐고 있던 백의 손을 발견한 안드레아가 냐오옹대며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시냐옹. 어디가 불편하신 거냐옹.]

“오, 그래. 안드레아. 놀랐구나. 하긴, 저 덩치 큰 녀석이 험악하게 인상이나 쓰고 있으니 마음 여린 네가 당연히 놀라지.”

현정숙 여사는 안드레아를 안아들며 달래는 척 이현의 흉을 보았다.

이현은 불필요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이 불쾌하고 불편한 장소에 제 발로 온 이유는 백이었다.

“일어나.”

식탁에 앉아 있던 백이 이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현을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크고 둥근 눈이 꼬리 쪽만 약간 치켜떠진 모습으로.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식사를 대접받는 자리인데 아직 식사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고르지 못했던 목소리가 말을 하다 보니 진정이 되는 듯했다.

백은 가만 내뱉고 싶은 한숨을 꼭 씹어 삼키며 이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런 자세라면 미혹술을 걸기 딱 좋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백은 미혹술의 반동처럼 이어질 이현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난처하고 어려웠다.

“당신이 여기서 식사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을 텐데.”

“있어요. 저는 이제 여기서 일하기로 했으니까요.”

이현의 눈썹 모양이 변했다. 미간에 주름이 잡혀서 그러는 것 같았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 일하는 게 가능하냐고 묻는 거라면, 답은 너무도 그렇다였다.

아무리 인간 중에 동물과 의사소통에 뛰어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수보다 나을 수는 없었다.

“네.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인데요.”

백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둔갑술은 잘하지만 미혹술은 아직 멀었다. 적어도 백 살은 지나야 영력을 제대로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보살피는 것을 제일 잘한다고 해야 했다.

문제는 그게 이현에게는 아주 다른 얘기로 들렸다는 것이었다.

‘당신을 유혹할 거예요. 그건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거든요. 이 집까지 들어온 걸 보면 알잖아요?’

라는 식으로.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했을 때 그 말을 백 퍼센트 부인할 수 없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대체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예쁜 거야.

그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쁜 여자라면 수도 없이 봤고, 외모가 인간의 전부를 말해준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런데 백은 달랐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마치 단 한 번도 예방 주사를 맞아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독감에 걸린 얼치기 소년처럼 들뜨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눈은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사람 눈이 어떻게 생겨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상형의 눈을 고르라면 반드시 저런 눈이 될 것 같았다.

크고, 맑고, 티 없이 깨끗하게 보이지만 당장 감기고 키스하고 싶다는 욕구를 부추기는.

그래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혹은 그가 그녀에게.

“그럴 리 없어.”

그러니 더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위험할 일이 없도록.

“나가. 험한 얘기는 밖에서 해.”

이현이 백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냐앙!”

“구우우!”

[무엄하다냥! 어딜 감히!]

[인간! 이게 무슨 짓인고!]

현 여사에게 안겨 있던 안드레아가 발톱을 세운 앞발을 버둥거렸고 평창동 구 씨가 날개를 퍼덕였다.

그 틈에 인간들도 놀랐고, 덩달아 몹시 불쾌해졌다.

백의 위기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 손 놔라. 어디서 그런 못 배워먹은 짓을 하는 게야.”

현 여사가 백과 이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사이에도 안드레아는 어디든 할퀴려고 열심히 짤똑한 앞발을 휘둘러댔다.

“그리고 사기꾼이라니. 너는 뭘 좀 알아보고 오긴 한 거니?”

이현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니. 그 말을 믿습니까?”

“믿지 않을 것도 없지. 너 오기 전까진 다들 감탄하는 분위기였어. 안드레아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부터 윤 실장 게딱지광인 것까지 알더구나.”

“그쯤이야 미리 알아보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니?”

현 여사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집에서는 마냥 사람 좋은 고양이 집사라고 해도 대외적으로는 태보의 명예 부회장이었다. 사람 다루는 데에는 이골이 난 이였다.

“내가 은퇴했다고 다 네 세상인 줄 알면 곤란하지. 엄연히 아직 내 영역이 있는데. 나 아직 그렇게 안 늙었다.”

“공사 혼동하지 마십시오. 말 그대로 집에 새로 들인다는 사람이 못 미더워서 온 겁니다.”

현정숙 여사가 입꼬리를 비죽였다.

“어마? 언제부터 네가 그리 집안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그것 참 기특하구나. 그럴 거면 도로 들어오지 그러니?”

“신원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한테서 소개받았다. 그리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나간 이상 여기는 내 집이야. 들어올 것도 아니면서 내 집안일에 참견할 생각 마라.”

현정숙 여사가 그쯤에서 딱 선을 그었다.

“나는 네가 공사를 구분 못 할 인물이라고는 생각 않는다. 그런 인간이었으면 그 자리에 앉혀놓지도 않았어. 그러니 내 집안일도 그저 내 일이라고 생각해라. 네가 이래라저래라 나서면 나도 생각이 복잡해질 테니.”

현정숙 여사는 아직도 앞발을 휘두르고 있는 안드레아를 식탁 의자에 내려놓고는 자신도 그 옆 자리에 앉았다.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려무나. 오늘 저녁은 게다.”

더 이상 말해봤자 듣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윤 실장이 나서서 이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본부장님. 그리고 본가 식솔들 말고는 제 식성에 관심 갖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알아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게를 다시 데워 오려던 제천댁이 그 옆에서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아유, 그럼요. 제가 어디 가서 이 댁 분들 얘기를 떠들고 다니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괜히 오해 마셔요.”

“…….”

이현은 하나같이 백의 편을 들고 있는 본가 사람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사람들이야 잘 구워삶았다고 쳐도,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는 저 버르장머리 없는 고양이까지 옆에 찰싹 들러붙어서 애교를 떨게 만든 것은 확실히 수상쩍다고 해야 했다.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에요.

정말로 저 순진하고 맑은 얼굴 아래 살아 있는 것들을 홀리는 페로몬이라도 감추고 있는 걸까.

“저녁은 됐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현이 나갈 기미를 보이자 윤 실장이 예의상인지 한번 말리려 들었다.

“벌써 식사하셨습니까?”

“갑각류 알러지 있습니다. 그럼.”

이현은 왔을 때처럼 빠르게 가버렸다.

그때서야 숨을 탁 놓는 백을, 현정숙 여사가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음식을 권했다.

“저런. 괜히 시간을 뺏었네. 많이 놀랐죠? 내 조카손주인데 성격이 저래 놔서. 어디서 저런 못된 짓을 하는지. 내 대신 사과할 테니 어서 들어요, 응?”

백은 현정숙 여사가 건네는 젓가락을 받아들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놀란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신 말씀은 잘못된 것 같아요.”

“응? 뭐가?”

“못된 짓이 아니라 걱정이 됐을 거예요.”

영수를 위하는 인간이 대부분이었지만 반대로 무서워하는 인간도 있었다. 사람 말을 하는 짐승은 불길하다며 저어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특히나 여우는 인간과 가장 생리가 맞던 영수다 보니 이러저런 뒷소문도 많았는데, 그중에는 여우가 생간을 빼먹는 걸 좋아한다는 악의적인 거짓말도 있었다.

이현이 그런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가족들과 어울리는 게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흐음…… 그렇게 생각해요?”

백을 향하는 그녀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순진한 백은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윤 실장은 알아차렸다.

“저, 그런데 본부장님과는 어떻게 알고 계신 사이십니까?”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둘의 표정을 보면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백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현이현과 자신의 사이를 달리 부를 만한 말을 백은 알지 못했다.

백이 고개를 살짝 떨어트리고는 답했다.

“그게…… 저는……,”

“아니. 괜찮아요, 고 선생님. 둘이 아는 사이일 수도 있는 거지요. 윤 실장, 그러지 말고 밥이나 먹지.”

“……아, 네. 그러겠습니다, 부회장님.”

현정숙 여사가 곤란해하는 백을 거들어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게가 아주 좋네. 많이 들어요, 고 선생님.”

“냐아아옹.”

대답은 안드레아가 먼저 했다.

“응, 그래그래. 우리 안드레아도 많이 먹고.”

이후로는 평화롭고 무난한 식사가 이어졌다.

정신을 놓고 게살을 후르륵 마시려고 드는 안드레아를 말리느라 평창동 구 씨가 진땀을 빼는 일이 간혹 있을 뿐이었다.

* * *

“저녁 잘 먹었습니다.”

식사 후 이현의 등장으로 인해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백은 앞으로 삼 개월간 이곳에 채용되어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 일하게 되었다.

안드레아의 호전 여부에 따라 삼 개월 뒤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창동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한다는 조건이었다.

백으로서는 토 달 데가 없는 조건이었다.

서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자 현 여사 측에서는 곧 계약서를 작성해 보내겠다고 했다.

백이 평창동 본가에 정식으로 입주할 때까지 며칠의 여유가 주어졌다.

“자고 가면 좋을 것을. 시간도 늦었는데.”

현정숙 여사는 벌써 정이 가는지 인사를 하는 백의 손을 붙들고 아쉬움을 흘렸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차로 바래다주시는데요.”

백의 말대로 안채의 현관 앞에는 차가 대기 중이었다.

“조심해서 가고 혹시 더 빨리 올 수 있게 되면 더 빨리 와요, 고 선생님.”

옆에서는 윤 실장이 운전기사에게 안전 운전을 당부했다.

“조심해 모셔다 드려요. 무사히 들어가시는지 꼭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윤 실장님.”

백은 발목에 꼬리를 부비며 떨어지기 싫어하는 안드레아에게도 인사를 했다.

“며칠 뒤에 다시 보자.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가시지 마라냥. 저하고 같이 주무시는 건 어떠냥?]

“금방 다시 볼 거잖아. 나도 여기 오래 있을 준비를 하고 와야 해.”

백과 평창동 구 씨가 현정숙 여사가 내어준 고급 세단에 탔다.

“그럼 모셔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부회장님.”

운전기사가 백이 탄 뒷좌석의 문을 닫아주는 것으로 오늘의 방문은 끝이 났다.

부웅!

긴 검정색 차가 요령 좋게 정원을 지나 대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윤 실장이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회장님.”

“음?”

“좀 전에 왜 묻지 않으셨습니까? 본부장님과 알고 지낸 사이인 게 확실했는데요. 그렇다면,”

“윤 실장.”

윤 실장의 말을 중간에 가로챈 현정숙 여사가 무슨 생각에선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모르는 일을 알고 계십니까?”

“이현이 말이에요. 제 집 사서 나간 뒤로는 여기 온 게 처음이지요?”

“아닙니다. 작년 시월에는 오셨습니다.”

“그건 시현이 제사니 빼고요. 사기꾼이라서 걱정을 했던 거라면 왜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퇴근하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올 필요가 있었냐는 거지요, 내 말은. 그렇게나 발도 붙이기 싫어하는 이 집에.”

“그럼…….”

그때서야 윤 실장도 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 선생이 가짜라면 그건 얼마 안 가 들통 날 일이고. 그야 두고 보면 알지요. 오히려 나는 이현이 쪽이 더 궁금하지 뭐겠어요. 그 애가 안 하던 짓을 할 성격이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요.”

“내 눈에는 왜 그 애가 절절매는 것처럼 보였을까.”

“아, 그 정도였습니까? 표정은 평소와 같으시던데요.”

“먼저 손을 대고 하지 않던가요. 몸이 달아 그런 게지요.”

“저런.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윤 실장이 현 여사를 따라하듯 쌉쌀하게 웃었다.

이현의 성격에 대해서라면 그도 현 여사처럼 할 말이 제법 있었다.

대부분 성마르고 잔정 없이 냉담한 인간이라는 게 주된 의견이었데, 결론은 늘 그러다 저 성격에 연애 한번 못해보는 거 아닙니까, 가 되는 걸 보면 실은 걱정이 반이었다.

“그럼 고 선생을 집 안으로 부르신 게 실은 본부장님을 좀 더 자주 보려는 의도이신 겁니까?”

“고 선생이 있다면 자주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그리고 그 애가 뭐하고 사는지는 나도 알아야지요. 내게 지금 손주라 부를 사람은 딱 둘만 남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멀리 타향살이 중이니 실제로는 하나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실 만도 하지요.”

현 여사가 조금쯤은 할머니 같은 웃음을 거두고는 쌀쌀해진 밤공기를 피해 안채로 들어갔다.

“그럼 고 선생 방을 준비해 주세요. 지내는 데 불편할 일 없게.”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이현과 백에게 서로 알고 지냈던 것 이상의 감정이 있으리라는 현 여사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백이 입주할 예정인 사흘 뒤.

윤 실장은 이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 또한 그가 집을 나간 뒤로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라며 조금은 감격해서 묻는 윤 실장에게 이현이 한 말은

“제가 쓸 방 하나 준비해 주십시오.”

였다.

“예? 오늘 주무실 겁니까?”

라고 되묻자

“당분간 있을 예정입니다.”

라고 했다.

“언제까지 계실 겁니까?”

라고 하자

“그 여자 나갈 때까지 있을 겁니다.”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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