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5화 (5/68)

#05. 비장의 무기

2017.12.16.

“아니요.”

백이 고개를 숙인 채 가운을 살짝 잡아당겼다.

“보다시피 옷 대신 가운이라는 걸 입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해요. 다른 옷도 다 한 겹인데 이건 계속…… 가렵다고 해야 하나. 자꾸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어마.”

그러는 백을, 이현이 어깨를 붙들어 가만히 있게 만들었다.

“움직이지 마.”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네?”

“벌어지니까.”

이현의 손이 가운의 제일 첫 번째 단추를 눌렀다.

백이 당황해 그를 쳐다보고 있자 이현이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추를 누른다 싶었던 손가락은 이제 단추를 풀 것처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그가 졌다.

스토커라서, 위험할 수도 있어서, 그러니까 정체를 알아야 해서 그녀를 다시 보고자 했던 게 아니었다.

지금 같은 순간을 원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거면 더 움직여도 좋고.”

“…….”

백은 이현의 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열기 같은 게 일렁이고 있었다.

백이 그 눈을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이건…… 성공인가요? 이제 저한테 유혹 당하신 건가요?”

순진한 건지 순진함을 가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질문조차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현이 손을 뻗어 백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직접 확인해.”

몸을 바짝 밀착시킨 이현이 다른 손으로 백의 턱을 쥐었다.

엄지에 힘을 주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현이 백의 입술을 삼키듯 덮었다.

기가 막히게도 사람 살갗이 달았다. 타액도 달고 혀를 긁어오는 자그마한 송곳니의 감촉도 달았다.

“아으……,”

백이 품 안에서 움찔거릴 때마다 하얀 가운이 바스락거렸다.

맨살 위에 옷감이 비벼지는 소리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툭.

턱을 놓은 이현의 손가락이 가운의 맨 윗단추를 하나 풀었다.

“……저, 저기요. 현이현 씨.”

백이 맞닿은 입술로 뭔가를 말하기 위해 애를 썼다.

툭.

이현이 그 소리를 무시한 채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생각을 멈췄다. 이성을 깨끗이 날려버린 그는 단추를 풀고 있는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스쳐가는 감각에 집중했다.

이제 남은 단추는 네 개.

그의 손가락은 세 번째 단추를 건드리고 있었다.

“현이현 씨!”

갑자기 손이 허전해졌다.

백이 둥글게 등을 말아 마치 고양이처럼 쏙 그의 품을 벗어났다.

둥글고 커다랗지만 꼬리 쪽이 살짝 위로 치켜올라가 순진하면서 동시에 묘하게도 야한 인상을 남기는 눈에 혼란이 그렁그렁 엉켜 있었다.

“…….”

이현이 뜨거워진 숨을 흘렸다.

흰 얼굴에 뺨만 붉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나 생생하고 자극적이었다.

저 순진해빠진 얼굴이 이제껏 그가 보아왔던 어떤 여자들보다 선정적이었다.

“왜?”

이현이 묻자 백은 단추가 풀린 가운 앞을 꼭 움켜쥐고는 이런 말을 했다.

“유혹 당한 게 맞다면…… 그러면 이제 공물을 바치세요.”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현이 미간을 짚었다. 순간 귀가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공물?”

“네. 제가 현이현 씨를 찾아온 이유는 공물을 받기 위해서예요. 현이현 씨밖에 줄 수 없는 공물입니다.”

“…….”

이현의 얼굴에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목적이야 뻔했다.

태보그룹 3세 현이현의 이름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모두가 그 범주 안에 속했다.

공물이라는 처음 듣는 표현을 쓰거나 말거나, 백이 바라는 것도 같은 범주 안에 있었다.

“뭘 원하는데?”

이현이 물었다.

이 순간에도 백의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를 자극하던 그대로 선정적이었다.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인간들에게 가지던 반감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왜 백만 다르게 느껴지는지. 저 달콤한 복숭아 향은 왜 이렇게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지.

“땅 문서입니다.”

백의 답이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모동 산 1번지. 여기가 현이현 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했어요. 그곳의 땅 문서를 주세요.”

백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이현이 백의 얼굴을 쥔 탓이었다.

백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열기가 일렁이던 눈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입 안에 밀려드는 씁쓸함이었다.

백이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 현이현 씨?”

이현의 대답은 시간을 두고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 무섭도록 들끓어 오르던 감각들을 잘라내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아쉽게 됐군.”

“……네?”

“나는 네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데. 씀씀이에 관대한 애인 노릇을 바라는 거라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다고.”

이제 이현은 박 과장 같은 사람이 보는 그대로의 현이현으로 보였다.

매사 정확하고 빈틈없는 성격에 감정을 느끼는 인체 부위가 고장 나 있을 거라는.

“그야…… 저에게는 미혹술이…… 인간은 원래……,”

이현은 그가 알지 못할 말을 중얼대는 백의 뺨에 입술을 댔다.

짧고, 산뜻한 키스였다.

“하지만 그 땅은 못 줘. 금액도 문제지만 쓸 데가 있어.”

그래서 이별에 어울리는 키스였다.

“그럼 이젠 다시 볼일 없겠군.”

이현은 그 말을 끝으로 백에게서 몸을 돌렸다.

“실패……한 거구나.”

백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이현은 듣지 않았다.

백이 그렇게나 덩치 큰 재산을 구체적으로 노리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 시점에서 끝나야 할 일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이현이 그대로 동물병원을 떠났다.

* * *

톡톡.

장지문 밖에서 그림자가 어른댄다 싶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로 이어졌다.

“얘, 백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백이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뭣 좀 먹어야지. 좀 나와 봐라, 응?”

상냥한 목소리는 모친이었다.

“배가 안 고파서요. 괜찮아요, 어머니.”

“아니다, 얘. 너 굶은 지 하루도 넘었다. 그러다 몸 상한다.”

“어…… 벌써 그렇게 됐어요?”

“그래. 좀 나와 보거라.”

모친과 함께 왔던지 첫째 언니의 음성도 들려왔다.

“너 그러다 모질 나빠져. 모름지기 여우란 털에 반질반질 윤기가 돌아야지.”

백은 양손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밤새 눈물을 참지 못했던 눈이 아직도 퉁퉁 부어 있었다.

이런 모습은 가족들을 더 많이 걱정하게 만들 것이다.

백은 일부러 졸린 목소리를 냈다.

“그게…… 아직 너무 졸려요. 둔갑술을 너무 오래 하고 있었나 봐요. 괜찮으면 저는 조금만 더 잘게요.”

“아이고……. 그랬구나, 우리 막내. 그럼 어쩔 수 없지. 좀 더 자거라.”

백의 말을 다 믿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른대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백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조금 안 좋기도 했다.

단순히 미혹술에 실패하고, 그로 인한 실망감으로 기운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서 옮아온 독기는 쉬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몸을 괴롭혔다.

-아쉽게 됐군.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들었는데.

이현이 했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꾸만 가슴이 따끔거렸다.

-공물은 줄 수 없어. 이제 다시 볼일은 없겠지.

따끔대다 못해 아팠다. 누군가가 꽉 밟아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현은 볼에 키스했다.

짧고, 어쩐지 담백한 키스를.

이전까지와는 아주 다른 키스를.

백은 실패가 아픈 것인지 아니면 그 키스가 더 아픈 것인지 통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는데.’

백은 눈물을 꾹 참으며 생각을 다듬었다.

‘일족의 터전을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계속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영력은 날마다 조금씩 늘어갔다. 미혹술도 계속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니 더 애를 쓰면 될 것이다.

다신 보지 않겠다는 말이 독기처럼 마음 밑바닥을 찌르고 있었지만, 인간의 말 한마디에 기운을 잃을 수는 없었다.

조만간 인간들은 이 산을 파헤칠 것이라 했다.

나무를 베고 바위를 깨고 산을 없애 평지를 만들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곳에 아주 큰 건물을 지을 것이라 했다.

아직 공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산의 일족 모두가 겁을 먹고 있었다. 산이 사라지면 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떠나야 할 것이다.

백은 이제껏 터전을 잃은 영수 일족의 얘기를 수도 없이 들어 왔다.

청송동 낭 씨 늑대 일족과 제주도 녹 씨 사슴 일족은 터전을 잃고 떠돌다 지금은 동물원에 몇 마리 남은 신세였다. 지리산 웅 씨 반달가슴곰 일족도 곧 그리 된다 했다.

산을 떠난 산의 일족은 자연 힘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더는 영수라 할 수도 없다 했다. 인간의 말과 문자를 잊고 그저 동물로 남았다 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슬프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백이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면 안 돼. 힘을 내야 해.’

백이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이현이 한 말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에서, 또 뭐라고 했지. 비장의 무기가 열 개나 된다고 했는데.”

백이 그간 열심히 공부했던 둘째 언니의 책을 떠올리는 와중이었다.

톡톡.

[백아, 백아!]

이번에는 머름창이었다.

머름창으로 드나드는 건 도도와 도래였다.

백이 이불 너머로 뻐끔 고개를 내밀었다.

[백아. 들어가도 돼?]

[백아. 다 잤어?]

“아, 응……. 들어와.”

머름창이 드르륵 밀리고 도도와 도래가 달려왔다.

둘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방 안에서 전부 지켜보았다. 이현이 떠난 뒤 백이 독기 탓인지 마음이 아프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을 때 곁에서 계속 걱정하고 위로해 주었다.

이불을 타고 올라온 도도와 도래가 백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헉. 백이 얼굴 봐.]

[퉁퉁 부었어. 어떡해. 독기를 너무 쐬었나 봐.]

백이 애써 웃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 부운 건 늦잠을 자서 그래.”

[정말이야? 그게 정말이야?]

“응. 이렇게 늦잠 잔 적 없잖아. 그간 계속 인간 세상에 다녀오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야.”

[에고, 우리 백이. 힘내.]

도도가 백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래. 힘내, 백아.]

반대쪽 어깨를 도래가 따라 두드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던지 백의 무릎으로 풀쩍 뛰어내려 물었다.

[있지, 백아.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 그게 뭐야?”

[그때 역삼동 묘 씨하고 같이 작업했던 비둘기 있잖아. 그이가 다른 비둘기를 소개시켜줬어. 평창동 구 씨라는 양반인데 그 일대를 꽉 잡고 있는 터줏대감이래. 그 양반 말이 평창동에 현 씨 집안 인간이 살고 있댔어.]

도래가 신이 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듣기로는 현 씨 집안에서 제일 어른 같은 존재래. 얼마든지 그 집 소식을 물어다 줄 수 있다고 했어. 그 집에 사는 고양이하고도 벌써 얘기를 다 해놨대. 그 고양이는 이름이…… 아, 뭐랬더라? 복성이었는데.]

도도가 코웃음을 쳤다.

[야야, 고양이면 묘 씨지 무슨 놈의 복성이야.]

[아냐. 이름이 네 자였단 말이야. 안도…… 아, 안도래아라고 했다.]

평창동 본가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정확한 이름은 안드레아였지만 도래는 아직 외래 문자에 익숙하지 않았다.

도도가 혀를 찼다.

[하여간. 이래서 인간 세상에 사는 족보 없는 것들은 격이 떨어진다는 거야. 세상에 안도 씨가 다 뭐니.]

도래는 도도의 비아냥거림을 그러려니 넘겼다. 대모산 출신이라는 것은 도도의 자부심이었다.

[어쨌거나 안도 씨가 대모산 영수 일이라면 자기도 돕겠다고 했대. 뭐든 할 일을 말해주면 열심히 해주겠대. 잘됐지?]

“아…… 그랬구나. 정말 고마운 일이네.”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생각은 캄캄하기만 했다.

이젠 무얼 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 그는 다시 보지 않겠다고 했고 제 미혹술은 아직 멀고도 먼 것 같았는데.

[그럼 안도 씨한테 뭐라고 할까? 말만 해, 백아. 평창동 구 씨가 냉큼 가서 일러줄 거야.]

“음. 그럼…….”

백이 양손으로 머리를 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동안 머리를 쥐어짜던 백이 결국 울컥 한숨을 터트렸다.

[앗, 백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도도와 도래가 깜짝 놀라 백의 팔을 붙들었다.

“……모르겠어. 뭘 어째야 하는지. 생각이 안 나. 인간은…… 인간은 너무 어렵고 특히 그 사람이…….”

……무서워.

백은 뒷말을 삼켰다.

그 사람하고 있으면 자꾸만 열이 나. 그 사람만 유독 독기가 너무 강해. 자꾸 맥박이 빨라져.

어머니께서 인간은 하찮은 존재고 마땅히 영수를 떠받들 것이라 하셨는데.

인간들의 쓸모는 프라다와 샤넬을 만들어 내는 것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지기를 읽을 줄도, 다독일 줄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니 가엾게만 여기라 하셨는데.

그런데 왜 그 사람을 보면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지…….

그때였다.

“쯧쯧. 내 이럴 줄 알았지.”

도도와 도래가 들어온 머름창으로 둘째 언니가 날렵하게 뛰어 들어왔다.

“둘째 언니…….”

[어마, 견님이다.]

[안녕하세요, 견님.]

둘째 언니를 발견한 도도와 도래가 공손히 양손을 모아 꾸벅 인사를 했다.

“그래. 적당히들 앉아.”

대충 인사를 받은 둘째 언니가 백을 향해 말했다.

“자긴 뭘 자. 꼬리 축 늘어트리고 돌아왔을 때부터 내 무슨 일 있을 줄 알았다. 자는 게 아니라 자학을 하고 있었네.”

백이 할 말을 못 찾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언니…….”

“알아. 왜 그런지. 걱정 하나라도 줄이려고 그랬겠지. 알아, 안다고. 너 혼자 저 밖에서 이리저리 발 동동대며 고생하는 거 다 알아. 말도 못 하게 기특하고 대견하고 그래.”

“언니…….”

둘째 언니가 백을 안고는 토닥였다.

“미혹술이 쉽지 않은 거, 그게 어디 네 잘못이겠니. 세월이 너무 빠른 게 세상도 통 예전 같지 않은 게 제일 잘못이지. 날마다 지기는 탁해지고 영기는 쪼그라들고. 네가 아무리 백여우라 한들 인간 세상의 탁기는 그보다 더한 것을 어쩌겠니. 오죽하면 관악산 산신령도 다 내팽개치고 잠이나 처자고 있을까.”

“하지만 우리 사정이 급하잖아요, 둘째 언니.”

“그래. 그게 문제지. 머리로야 알아도 별수 없이 일흔일곱 살밖에 안 된 우리 막내 등을 떠밀어 내려보낼 수밖에 없다는 거. 그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니.”

둘째 언니 고견의 다정한 말이 어제부터 내내 아프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 아무래도 생각해 봤는데 그놈의 탁기 탓인지 예전처럼 미혹술이 척척 잘 먹히지는 않는 것 같다. 첫 술에 배부른다는 생각 말고 천천히 해야 될 듯하다.”

백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자세한 거야 모르지. 그야 인간의 일이니. 하지만 공사라는 게 원체 시끄러운 게야. 아직 그런 기색은 없으니 너무 걱정 마라. 그사이 현 씨 인간을 다룰 방법을 찾아야지.”

둘째 언니는 일부러 골라온 인간 세상의 책을 꺼내들었다. 이번 것은 석 달 전 보그 지였다.

“여기 보렴, 백아.”

둘째 언니가 펼쳐든 페이지는 코스모폴리탄에 실린 것과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다만 보그 지에서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차도남일수록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 너무 과도한 섹시 공세 일변도는 오히려 그가 냉정하게 마음을 닫아걸도록 만들기 쉽다. 그렇다면 최대한 그의 주변을 맴돌며 자연스럽게 내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데 노력해 보자. 오래 보아야 더 사랑스럽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잖은가.]”

백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반은 알아듣겠고, 나머지 반은 모르겠어요. 차도남이 뭔가요?”

“인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차도남은 현 씨 같은 종을 말하는 거야.”

“어떤 건데요?”

“미혹술이 더디 먹히는 인간. 잔정 없고 매사 찬바람 쌩 돌고 시건방진 인간 남자를 말하는 게다. 어때? 현 씨 놈이 딱 그렇지?”

현을 떠올리던 백이 귀밑을 은은히 붉혔다.

“잘…… 모르겠어요, 둘째 언니. 아주 차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이현은 닿을 때마다 너무 뜨거워서 문제였다.

이런 문제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둘째 언니는 백이 너무 어려서 뭘 잘 모른다는 식으로 그 말을 흘려 넘겼다.

“아냐, 분명 그럴 게다. 요는 장기전으로 가야 한다는 거야. 진득하니 정이 들러붙도록 한 지붕 아래 한 이불 덮고 지내는 게지. 그럼 제깟 놈이 안 넘어오고 배기겠니?”

“…….”

백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현과 계속 들러붙어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쿡 밟히는 듯했다.

둘째 언니는 백의 속도 모르고 제 말이 맞다 쐐기를 박았다.

“백이 네가 그 집에 들어가는 게야. 마침 그 집 고양이가 거들겠다고 나섰다며? 그럼 그 집에서 자리를 잡는 게 어디 일이겠니.”

백은 잠시 고개를 돌려 도도와 도래, 둘째 언니와 머름창 너머로 펼쳐지는 대모산의 전부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을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백이 소리 나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

“……예, 언니. 그렇게 해볼게요.”

그 뒤로 며칠 내내 평창동 구 씨가 서울 시내를 바삐 날아다녔다. 둘째 언니는 머리에 천까지 질끈 동여매고 인간사 공부에 나섰고, 안드레아가 구 씨를 통해 평창동 내부 사정을 바지런히 전해 왔다.

모친은 그전에 미리 몸보신을 시켜야 한다며 송이니 산삼이니 바지런히 따다 백에게 먹였다.

첫째 언니는 모름지기 여자는 패션으로 완성되기 마련이라며 인간 세상에서 백이 입을 옷과 가방, 액세서리들을 요모조모 맞춰 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백이 이현과 한 집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 완성되었다.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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