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4화 (4/68)

#04. 한밤의 초대

2017.12.12.

무난하고 순조로운 사흘이었다.

낙하산 인사로 뒷말이 많았던 것치고는 팀 전체가 수월히 굴러갔다. 이현이 본부장에 취임하며 강행했던 사내복지 변경 건으로 반발하던 임원진도 이제는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경영기획팀이 주도하는 굵직한 프로젝트 두 개가 차질 없이 진행 중이었으며 신사옥 건설 관련 업무도 빠른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음, 본부장님. 외람되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박 과장의 목소리에 이현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모든 게 무난하고 순조로운 지금,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묻습니까?”

“그야 이 시간까지 일만 죽어라 하고 계시니까요.”

“…….”

박 과장의 말은 멀어졌던 시간 감각을 되살렸다.

이현은 어느샌가 불이 꺼진 채 인기척이 사라진 사무실 안을 쳐다보았다.

경영기획팀 본부장실은 팀원들과 유리벽 하나로 구분되는 곳이었다.

블라인드를 걷어놓으면 사실상 같은 공간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고 있었다니 정신이 없긴 했던 모양이다.

“원래 일 많은 거 아시잖습니까.”

이현의 낙하산 승진에 대한 반발이 수그러든 것은 그가 배경과는 상관없이 제 몫을 해내기 때문이었다.

승진이 몇 배나 빨랐던 만큼 일도 몇 배나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이현은 남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업무를 처리했다.

덩달아 격무에 시달리게 된 경영기획팀 전원이 몸보신용 홍삼을 단체 주문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는 요즘이었다.

“예, 그야 28층에서 가장 퇴근이 늦으신다는 얘기는 저도 벌써 들었지요.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9시라는 마지노선이 있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요 사흘간은! 계속 10시를 넘기시지 않았습니까!”

요는 제 퇴근시간도 계속 늦어졌다는 말이었다.

박 과장이 억울할 만도 한 게 무난하고 순조로웠던 지난 사흘간 스토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현이현 본부장의 스토커 존재설은 사실 이제껏 월급도둑으로 편히 놀고먹는 저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지어낸 게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퇴근 시간까지 계속 늦어지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박 과장은 비록 현이현 본부장이 아무리 까마득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소리는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저도, 좀! 집에 가서 잠을 자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놈의 스토커가 나타났을 때 말짱한 정신으로 이 한 몸 바쳐 본부장님을 지켜드리지요! 물론 그 스토커란 아가씨는 지난 사흘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사실 스토커 같은 건 없는 게 아닌가 싶……지는 않고…… 기특하게도 알아서 먼저 스토킹 같은 흉악범죄를 때려치운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입니다.”

기세 좋게 할 말을 한 박 과장은, 그러나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제 풀에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현이 달라 보였다.

평소 생각만 있지 감정은 없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무표정이 디폴트인 인간이라 대번에 감정 변화가 읽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요 며칠 붙어 다녔다고 뭔가가 달라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어딘가가 예민해진 것처럼.

“먼저 가십시오, 그럼.”

“아니, 그게…… 제가 꼭 퇴근이 너무 하고 싶어 그런 건 절대 아니라…… 저야 물론 본부장님과 한 몸이 됐다는 심정으로 이까짓 야근 정도야 아무렇지도, 아아무렇지도 않습니다만…….”

“더 있고 싶다면 말리진 않습니다.”

“않습니다만…… 예? 에이, 그건 아니지요. 퇴근은 해야지요.”

예의상 해본 말인데 진심으로 알아들으면 매우 곤란했다. 11시까지 붙들려 있었으면 저도 할 만큼 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본부장님.”

박 과장이 사라졌다.

그러자 사무실은 적막해졌다. 이제껏 모르고 있었던 제 행동을 돌이켜 보기에 충분할 만큼.

“기분이 나쁘다고?”

이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왜.”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짚어주자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이 나빴었다는 사실이 인지되었다.

이현이 엄지로 미간을 눌렀다.

기분이 나쁠 이유는 한 가지였다.

무언가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그렇게 기다렸나.”

이름밖에 모를 스토커를.

그녀가 몰고 오는 강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온갖 감각들을.

“어떻게 찾는다.”

답이 없을 혼잣말이 갑자기 무게감을 띠었다.

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마치 저 밖 어딘가에 그가 찾는 답이 있을 거라는 듯.

그리고 이현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백은 준비를 마친 뒤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 *

[준비됐어?]

[그럼. 물론이다냥.]

역삼동에서 논현동 빌라단지로 이어지는 골목길.

어둠이 짙게 깔린 그곳에서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중 하나는 꼬리가 토실토실한 청설모였고, 다른 하나는 앞발로 열심히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고양이였다.

사나운 눈매와 이마에서 눈썹까지 이어지는 흉터가 험악하고 야무진 인상을 주는 고양이는 머리에 빨간 무언가를 치덕치덕 바르고 있었다.

도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럴싸하다. 진짜 피처럼 보여.]

고양이가 바르고 있는 것은 케첩이었다.

[아유, 그렇다고 했잖냥. 내가 이 짓으로 그간 벌어먹은 참치캔이 얼만데. 역삼동 길거리 생활 3년차 우습게 보지 말라냥.]

오늘로써 세 번째로 시도되는 미혹술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오늘은 제법 많은 준비를 했고, 그래서 더욱더 실패할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구구 울었다.

[온다! 준비해!]

부웅.

차 소리가 들려왔다.

퇴근하는 이현이 운전하는 차였다.

어둠 속에서 뾰족해진 고양이의 눈이 매섭게 한번 빛났다. 이어서,

끼익!

텅!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이현의 차가 멎었다.

앞서 굴린 돌조각을 타이어에 정확히 맞춘 고양이가 잽싸게 달려가 타이어 사이에 드러누웠다.

“……이런.”

차에서 내린 이현이 머리 쪽에 빨간 게 잔뜩 묻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냐아아아오옹.”

고양이가 앞발을 휘저으며 애처롭게 울었다.

[설마 이대로 뺑소니칠 거냐옹? 그러면 안 된다냥. 이거 보라냥. 나 이렇게 다쳤다냥.]

평범한 인간인 이현이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의미전달은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가 고양이를 들어 올려 주변을 훑었다.

마침 보란 듯, 바로 눈앞에 이 늦은 시간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동물병원이 있었다.

* * *

[온다, 온다! 백아, 준비됐어?]

“어, 응. 자, 잠깐만.”

하얀색 수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백이 어색한 표정으로 옷감을 쓸어내렸다.

[왜 그래, 백아?]

전면 유리창에 붙어 밖을 살피고 있던 도도가 뽀르르 달려왔다.

“별일 아니야. 그냥 처음 입어 보는 옷이라 이상해서. 피부가 따끔한 것도 같고.”

[그래? 그럼 갈아입어야 하나?]

“아냐. 이 옷을 꼭 입어야 한다고 했잖아. 조금 참으면 되겠지.”

[응. 이제 곧 금방이니까. 우리 백이가 만날 고생이지 뭐야. 하찮은 인간 사내 하나 때문에.]

양 볼을 씰룩대는 도도를 향해 백이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공물을 받아야 하는 건 우리니까 하찮다고 말하면 안 돼.”

[흥. 인간이야 영수한테 비하면 다 하찮지 뭐. 더군다나 그 사내는 불손하고 무례하잖아.]

불손하다는 말은 그가 했던 어떤 행동을 떠올리게 했다.

백이 뜨듯하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둘째 언니가 그런 거 아니라고 하셨잖아. 내가 잘못 안 건데 계속 무례하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뭐 그야 다친 동물을 데리고 병원으로 오는 걸 보니 아주 글러먹은 인간은 아니다 싶지만…… 아, 왔다!]

도도가 큰언니의 그랜드샤핑 백 안으로 쏙 모습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딸랑!

동물병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케첩을 바른 고양이를 안고 있는 이현이었다.

“지금 진료 가능합니까?”

긴장한 백이 숨을 훅 들이쉬었다. 그 바람에 단추를 채워놓은 가운이 들썩였다.

“어서…… 오세요.”

이현의 눈이 백을 향했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손이 느슨해지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여기서 보게 되다니. 수의사였나?”

“아니……요.”

백이 고개를 저었다.

“수의사가 아니라고?”

“네. 여긴 잠시 빌린 곳이에요.”

“그럼 왜……,”

이현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가 홱 몸을 틀어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바람에 말이 잠시 끊겼다.

“왜?”

백은 저도 모르게 가운 앞을 손으로 쥐며 대답했다.

“현이현 씨를 유혹하려고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요.”

“이해가 안 가는데. 왜 동물병원이지?”

“하얀 가운을 입어야 한다고 해서요.”

“가운?”

백은 이현이 저를 훑는 눈을 느꼈다.

이현은 지금 앞뒤가 안 맞는 지금 상황을 빠르게 짜맞춰 보는 중이었다.

고양이를 치었다. 마침 보이는 동물병원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혹하기 위해 가운을 입고 있노라 말하는 그녀는 티 한 점 없는 말간 얼굴로 이현이 아는 가장 야하고 자극적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뭐야, 이건.

심지어 바닥에 내려앉아 앞발로 열심히 머리를 닦아내는 고양이는 어디가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고양이까지 이용했다는 건가.

그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따위가 무슨 상관이냐며 머릿속을 헝클이는 마음의 소리였다.

저벅.

이현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가운은 왜?”

그가 움직이자 백이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서려다가 진료실 책상에 가로막혔다.

“제가 본 책에서 그런 말이 있어서요.”

물기가 많은 커다란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는 게 열심히 답을 찾는 모습이었다.

불현듯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아니, 위험해 보였다.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느껴왔던 그 위험한 감각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전에.”

또다시 이성보다 동작이 앞서기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저벅.

다시 한 걸음이 가까워졌다. 단단히 뒤가 가로막힌 백은 꼼짝도 없이 서서 이현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너는 대체 누구야.”

점점 가까워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백은 어쩔 줄 모르고 가운의 목깃을 더듬었다.

“제가 누군지는 처음 만났을 때 알려드렸습니다.”

“대모동 고 씨 일족 32대손 고백. 그것 말고.”

백이 눈을 깜박였다.

“그것 말고요?”

백의 표정을 본 이현이 낮게 혀를 찼다.

이쯤 되면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 순진한 표정은 진짜인지, 혹은 연기인지. 능란한 노림수인지, 아니면 타고난 재능인지.

게다가 백이 입고 있는 낙낙한 가운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단추를 목까지 채운 흰 가운은 별다른 점이 없었지만 기묘하게도 계속 시선을 잡아챘다.

백이 작은 동작을 이을 때마다 가운이 조금씩 몸 선을 드러냈다.

들러붙는 사람만큼은 취향이 아니라고 했던 발언도 이제 더는 써먹지 못할 때가 온 모양이었다.

왜냐면 이제 스토커라는 사실을 더는 의심할 수 없게 된 저 스토커는, 지금 이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제 취향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다못해 동그스름한 분홍색 손톱이나 가운 안에서 얼핏 보이는 쇄골의 모양까지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한번 인식하기 시작하자 감정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걸음은 그보다 더 빨랐다.

“뭐하는 사람인지, 나는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그런 것들.”

“그건 아직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정체를 밝히는 것은 유혹이 성공한 다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쉬운 것부터 하지. 며칠 동안 뭐했어.”

백이 근 일주일간 한 일을 성실히 되짚는 동안 둘의 거리는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음…… 말씀드렸듯이 책을 봤어요.”

“책?”

“네. 사진이 많이 실린 책이요. 외래어가 많아서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이현이 피식 웃었다.

들려오는 답마다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별 문제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책을 보느라 나는 뒤로 미뤄놨어?”

“음…… 그건 아닙니다. 책을 본 건 현이현 씨 때문이었는데요.”

한 걸음 더.

“나 때문에? 왜?”

“이번에는 꼭 성공하려고요. 그러니까…… 유혹하는 일을요. 그래서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발끝이 닿을 정도가 되었다.

백이 저를 쳐다보면서 눈을 깜빡일 동안 속눈썹이 어떻게, 얼마나 떨리는지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게 뭔데?”

“어…… 그러니까 그게……,”

백이 곤란한 듯 뺨을 붉혔다. 손으로 쓸면 붉은색이 묻어나올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백을 내려다보는 이현의 시선이 집요해졌다. 시선만 놓고 보자면 누가 스토커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난처해하던 백이 입을 열었다.

“[가끔은 섹시하고 도발적인 모습으로. 고전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에디터는 가운 속의 알몸을 추천!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니다. 아무리 비싸게 굴던 남자라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비장의 무기.]”

“…….”

잠깐 사고가 정지하는 듯했다.

이제 팔만 뻗으면 백을 붙들 수 있는 거리에서 이현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 아무것도 안 입었다고?”

#Private collectio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