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64)

64.

이 편지를 읽으며 새하얗게 질렸을 당신의 얼굴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도망친 게 옳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맹세하건데, 전쟁터에서는 모르겠지만 리하르트는 에셀우드로 돌아온 이후 한 번도 피를 마시겠다고 인간을 죽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황야에 나가 사냥한 짐승의 피로 목을 축이거나, 제니스가 구해 온 피를 마시며 버텼습니다.

샬럿.

켄싱턴가의 추악한 과거 외에도, 나는 사실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이리 길게 편지를 썼습니다.

모든 상황이 정리 된 뒤 당신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즉시 아무도 몰래 신시아와 제니스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를 만났습니다.

신시아의 사인은 날카로운 흉기로 인한 과다출혈이었습니다. 제니스의 손에는 흉기를 꽉 쥔 흔적이 있었죠.

샬럿. 당신의 어머니는 짐승에게 습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시아를 죽인 건 제니스였습니다.

그리고 제니스의 사인은 자살이었습니다. 스스로 손목을 그어 목숨을 버렸죠.

리하르트에겐 어떤 죄도 없습니다. 자신의 ‘체질’을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뿐.

판단은 당신 몫에 달렸습니다.

다만 내가, 이 못난 아비가 부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입니다.

그가 눈을 뜬다면, 살아난다면 그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기를.

모든 건 내 업보이고 죄악의 소치였습니다. 날 원망하고 증오해도 좋으니 당신과 당신의 삶을 스스로 망치지는 않기를.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부디 행복하길.

세이모어 아서 켄싱턴]

마지막 문장을 읽고 수신인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손에 힘이 풀렸다. 극심한 피로와 슬픔, 비통함과 분노 등이 뒤섞여 가슴을 치고 심장을 옭죄었다.

“리하르트…….”

또르르 떨어져 턱에 맺힌 눈물이 편지에 뚝 떨어져 글자가 번졌다. 편지를 꼭 쥔 샬럿이 허리를 숙여 숨을 토해 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샬럿?”

“…올리비아.”

“편지가 왔다면서요?”

“아.”

올리비아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녀가 쥔 편지였다.

“무슨 내용이에요? 누가 보냈길래…….”

눈물이 흐르는 샬럿의 얼굴을 본 올리비아가 걱정스레 옆에 앉았다.

“별것 아니에요.”

“…….”

“그냥… 예전에 알던 사람이 보낸 거예요.”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샬럿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편지를 찢었다.

누구도 알면 안 돼.

그런 당부가 쓰이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이야기가 누구에게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편지를 잘게 찢은 샬럿은 올리비아가 말릴 새도 없이 화르르 타오르는 장작불에 편지를 넣었다. 먹이에 달려드는 짐승처럼 불길이 순식간에 편지를 집어삼켰다.

“피곤하네요. 하루 종일 뜨개질을 했더니.”

“부축해 줄까요?”

“그래 주면 고마워요.”

올리비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샬럿이 문 앞에 서서 잠시 멈춰 섰다.

“…샬럿?”

뒤를 돌아 흔적도 없이 불길에 잡아먹힌 종이를 더듬던 시선이 이내 거둬졌다.

“뭐 두고 왔어요?”

“아니요.”

고개를 저은 샬럿이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미소였다. 의아하게 보던 올리비아가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부, 부인……! 아가씨!”

방금 전 편지를 가져온 하녀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윈클레 씨가……!”

공기가 멈췄다. 느리게 맥동하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샬럿!”

언제 힘이 없었냐는 듯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린 샬럿이 드레스 자락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뒤따르는 올리비아와 하녀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하아, 하아…….”

뛰듯이 빠르게 걸어 침실 앞에 멈춰 선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따스한 봄의 햇살 속에 그가 있었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햇살을 맞고 있었다.

반짝이는 연갈색 머리칼,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 긴 목과 흐트러진 잠옷 사이로 보이는 목울대. 깊은 쇄골.

“리하르트…….”

밭은 숨을 헐떡이며 샬럿이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느릿하게.

“다녀왔어요.”

마치 오늘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온 듯 여상하게 그가 인사했고.

“…어서 와요.”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길었던 겨울을 지나, 비로소 봄이었다.

***

[세이모어 아서 켄싱턴 백작님께.

뒤늦게 인사 올립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입니다. 잘 지내고 계셨는지요.

지난번 보내 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아 조금 놀랐지만,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지 그대로 전해져 감사했습니다.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얼마 전 리하르트가 눈을 떴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총상보다도 쓰러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뇌에 크게 충격이 간 게 원인이었습니다.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고 해요. 그대로 몇 년 뒤 죽을 가능성도.

하지만 그이는 돌아왔습니다. 보란 듯이.

아직 완전히 몸이 나은 것도 아니고, 꾸준히 재활 중이지만 날로 좋아지고 있어요. 어제는 함께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만개한 꽃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를 함께 봤어요.

혹자는 그럴 겁니다.

어떻게 모친을 죽인 여자의 아들과 살 수 있느냐고.

백작님. 저는 이번 달로 임신 6개월에 접어듭니다.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안 순간.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그 기분을 어떻게 전할까요.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래도 영원한 제 편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 무서우면서도 무섭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니스도 아마 그런 기분이었겠죠.

부른 배를 안으며 미스티무어 홀로 찾아왔을 때 어떤 심경이었을지, 저는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니스에게 리하르트는 하나 남은 희망이자 전부였어요.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은 보물이었을 겁니다. 그랬기에 더욱 집착했고 극단으로 치달았겠죠.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 또한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또한 저는 성녀도 아니거니와 천사와는 거리가 매우 멀어요. 질투도 하고 때론 못된 생각도 합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녀가 증오스럽습니다. 부디 제니스가 지옥에 갔기를 바라요. 저지른 죗값만큼 그곳에서 고통 받기를 바라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를 이해합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어머니 대 어머니로.

용기 내어 진실을 알려 주신 백작님께 보답의 뜻으로 말하자면, 저는 운명이 만들어 낸 비극이 세 사람을 고통의 수레에 얽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작님도, 제니스도, 리하르트도 서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어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었던 건 바로 백작님의 긴 편지 덕분입니다. 늦게나마 지면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백작님. 우리는 에셀우드든, 카티아든 어디건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대로 집을 짓고 이 카르델 섬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곳에서 에셀우드가 저지른 모든 만행을 조금이나마 속죄하고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생각입니다.

우려하실 것 압니다. 아직 반군 세력이 잡히지 않았고, 달아난 수장들의 소식을 알 수 없어 어찌 보면 위험한 상황이겠죠.

그러나 전, 그날 밤 차갑게 식어 가는 그를 끌어안으며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더는 그들이 무섭지도 꺼려지지도 않아요.

이해란, 어쩌면 아마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일 테니까요.

그렇기에 저는 그들도, 그리고 그날 밤의 리하르트도 모두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리하르트와 저는 조금씩 섬의 자원을 탈취하고 이 섬의 주민들을 착취하던 구조를 바꿔 나가고 있어요. 모아둔 자금으로 복지를 높이고, 고아원을 정비하고, 학교를 세우고, 자선사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는 아직 우리의 행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지만 그래도 제 뜻을 많이 따라 주고 있어요. 예전보다 그래도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우려하셨던 흡혈에 관한 것은… 제가 권하여 예전과 같이 보충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조금은 무섭기도 합니다. 생피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그리 호감이 될 만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저는 그가 제 곁에 오래 있기를 그 무엇보다 원합니다.

많은 학술 자료를 뒤지고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길 바라면서.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도할 생각입니다.

편지를 쓰는 지금, 비서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이가 침실로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네요.

이만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또 편지하겠습니다.

그럼.

샬럿 윈클레 올림

추신.

끝으로, 제 임신 소식과 함께 또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 드리고 싶어요.

우리는 고아원에서 데온이란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답니다.

아주 착하고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백작님께서도 언젠가 만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날 우리 아이와 함께.]

<꽃을 얽은 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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