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64)

63.

귀를 의심했다.

“무슨 개소리야. 지금 상황이 파악이 안 되나 보지?”

“에셀우드에 가족이 있더군. 일이 잘못되면 화가 미칠 수 있으니 망명시킨 건지 모르겠지만.”

“너 이 새끼……!”

단숨에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제닌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연인의 앞에 무릎 꿇은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며 제닌이 눈을 부라렸다.

“어떻게 안 거지?”

“그야 기본 아닌가. 길들이지 않은 개한텐 목줄을 매어 두는 건.”

순순히 옷깃을 내어 준 리하르트가 무감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황이 역전됐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내 말만 들으면 네 가족들은 손대지 않겠어.”

“…….”

“하지만 분은 풀어야겠지. 이렇게 둘 다 보내면 어떻게든 내 뒤를 추적해 주위에 해를 입힐 거야. 아닌가?”

속을 읽힌 기분이었다. 말문이 막힌 제닌을 향해 그가 도리어 명령했다.

“그러니 지금 날 쏴. 이 여자는 살려서 돌려보내.”

정말 제 목숨을 논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야.”

“리하르트……! 안 돼!”

무거운 몸에 깔린 와중에도 샬럿이 발버둥 쳤다. 퍼붓는 빗속에 눈물이 섞여 짠맛이 났다. 그를 보고 싶었지만 눈을 덮은 손은 견고히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안 돼, 제발! 제발……!”

애원은 통하지 않았다.

탕.

눈을 가리던 손이 허물어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와 일순 눈이 마주쳤다.

샬럿.

순간이 영원처럼 흘렀다.

사랑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쓸데없는 장식일 뿐.

“아아아아아아……!”

총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갑자기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몰려나온 제국군들과 반군들이 서로 뒤엉키며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샬럿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기어이 발밑으로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암전이었다.

***

또 잠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손을 덮은 온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침대에 엎어질 뻔했다.

“샬럿.”

“올리비아.”

“괜찮아요? 좀 쉬지 않고.”

“난 괜찮아요.”

염려 가득한 표정의 올리비아가 콘솔을 끌어다 옆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샬럿의 배로 향했다.

“그러다 정말 쓰러지겠어요. 홑몸이 아니잖아요.”

“…….”

대답 대신 샬럿이 배에 손을 얹었다. 3개월째. 슬슬 살이 붙어 티가 나는 배였다.

임신을 안 건 총상을 입은 그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아직도 되짚으면 오한이 드는 기억이었다. 치명상을 피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모두 방아쇠를 당긴 순간, 필사적으로 몸을 던진 카나 덕분이었다.

‘카나……!’

‘착각하지 마. 리하르트 윈클레와 계산을 끝내야 했기에 구한 거니까.’

‘…….’

‘이건 고아원을 후원해 준 목숨 값이야.’

‘…카나.’

‘총상이 나으면, 이곳을 떠나. 이제 영원히 볼 일 없을 거야.’

카나와 카온, 제넌은 그 소란 속에서 모습을 감췄고, 그 이후로 정말 그들을 볼 일은 없었다. 남은 잔당은 브레드와 함께 온 제국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리하르트가 이런 상황까지 대비하여 미리 부탁을 했다고 했다.

의사는 두 사람 다 천운이라고 했다.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급소를 빗겨간 것도, 말에 깔린 그녀가 임신 초기에 유산되지 않은 것도.

“괜찮아요. 이 아이는 무사할 거예요.”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악운을 물려받아 어떻게든 건강하게 태어나리라는 믿음. 가만히 그녀의 배를 내려다보던 올리비아가 불쑥 물었다.

“아들일까요, 딸일까요?”

“아들 같아요.”

“어떻게 확신해요?”

“그냥. 예감이요.”

옅게 웃은 샬럿이 고개를 들어 침대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남자는 오늘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이제 곧 봄이네요.”

“네.”

“금세 일어나실 거예요.”

“그렇겠죠.”

올리비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샬럿이 그의 차가운 이마와 콧등을 쓸었다. 이러고 있으니 첫 만남이 생각났다.

푹신한 카우치에 등을 기대듯 앉아 눈을 감고 있었던 그는 순간 정교한 비스크 인형인 줄 알았을 정도로 혈색이 없고 아름다운 미모였다.

‘그 눈은 장식인가 보지?’

물론, 그 인형이 눈을 뜬 순간 그 환상이 와장창 깨졌지만.

“예정일이 언제였죠?”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 짓던 샬럿에게 질문이 날아들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셈하던 샬럿이 대답했다.

“가을이에요.”

“가을에 태어난 아이는 추수의 여신에게 축복을 받는대요. 평생 값진 결과만을 얻도록.”

부드럽게 웃은 올리비아가 샬럿이 뜨고 있던 아기 턱받이를 흘긋 봤다.

“아기가 선선하고 좋은 날씨에 태어나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창밖으로 달콤하고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곧 있으면 꽃이 필 것이다. 정원 가득 흐드러지게.

***

오전에 내내 그의 곁을 지키다, 태교 겸 1층으로 내려와 난로 앞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다. 노크를 한 뒤 들어온 하녀가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윈클레 부인. 편지입니다.”

그녀의 임신이 알려지면서 호칭을 고심하던 고용인들은 브레드의 명에 따라 그녀를 윈클레 부인으로 대접했다.

“아, 고마워요.”

편지라. 제냐의 답장인가 싶었다. 혹시나 걱정하고 있을 그녀에게 심각한 부분만 빼놓고 편지를 보냈었다.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고 오해가 풀려 재결합했다는 내용이었다.

반색하고 은쟁반 위의 편지를 집어 든 샬럿이 고개를 갸웃했다.

“발신인 이름이 적혀 있지 않네요.”

“네. 저도 그게 조금 이상해서…….”

“음. 일단 알겠어요. 나가 봐도 좋아요. 고마워요.”

“네.”

하녀를 보낸 샬럿이 잠시 심호흡한 뒤 봉투를 꺼내 편지지를 펼쳐 들었다. 읽어 내려가는 눈이 점점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샬럿 헤겔, 아니 샬럿 윈클레 부인에게.

이 편지를 받는다면 무사히 당신 손에 전달됐다는 뜻이겠죠. 제발 그러길 바랍니다만.

우연히 리하르트와 당신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갑자기 이리 편지를 받고 놀랐겠지만.

혹여 언젠가 멀리서 내 소식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따로 알아보지 않은 이상, 리하르트의 성격상 아마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겠죠. 조금의 흠이나 결함은 견디지 못하는 아이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아. 당신이 가장 최근으로 기억하는 일부터 되짚어 가죠.

당신이 그와 섬에서 나온 날, 세오렌 홀에 화마가 일었습니다. 많은 것을 집어삼켰고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죠.

나는 심각한 화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내 아내 클로에와 아들들은 무사했습니다. 물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아직도 애도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놀랄 것을 앎에도 이리 편지를 보낸 이유는, 우리 가문의 추악한 과거에 대해 당신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눈치 챘겠지만, 가정부였던 제니스 브라운은 내 옛 연인이자 첫사랑이었습니다.

한때 그 여자와 도피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게 필요 없을 만큼 간절하고 격렬한 사랑이었죠.

하지만 제니스는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돌아왔습니다. 배가 부른 채로.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난 결혼을 했고 그녀를 깨끗이 지운 상태였으니까. 당연히 아버지가 내쫓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아이가 제 아이라는 것을 안 순간, 내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떠나면 거액을 주겠다는 말에도 제니스는 꿋꿋이 버텼어요. 두 번은 제 발로 나가지 않겠다면서. 그런 그녀에게 내 아버지는 가정부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난 아이를 사랑했지만, 그만큼 증오했습니다.

그 어미와 마찬가지로 밉고 증오스러웠습니다. 겨우 끊어 낸 첫사랑의 미련이 끝끝내 나를 붙잡아 버려졌었다는 사실을 일깨웠죠.

아이는 커 가면서 점점 나를 닮아 가더군요. 그는 제게 형이라 불렀습니다. 내가 저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도 모르고 나를 좋아하고 따르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입대를 결정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됐으니 떠나겠다며.

차라리 잘되었다 여겼습니다. 두 번 다시 껄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되겠지 싶어 가능한 한 그대로 그 섬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토록 지독한 아비였습니다. 머지않아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 아이는, 리하르트는 죽으러 간 겁니다. 추악한 출생의 비밀을 알아 버려서.

죄책감과 그리움에 더는 견딜 수 없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던 어느 날, 천둥 치는 밤에 리하르트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이되, 더는 그 아이가 아니었죠.

샬럿.

나는 그날 저택에서 일어난 살변에 대해 들었습니다.

당신이 어머니의 장례식 날 도망쳤고, 몇 년 뒤 다시 그에게 붙잡혔다는 것도.

당신은 그날 아주 끔찍한 걸 목격했을 겁니다. 피투성이인 방. 그 앞에서 포식하던 남자.

예상했다시피, 그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닙니다. 그 섬에서 무언가가 바뀌어 돌아왔어요.

그게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오랜 기간 우리 조상의 내력을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한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우리 선조에서부터 내려온 유전병이 그에게도 어떤 계기로 인하여 발병했음을.

켄싱턴 백작가에선 격세를 주기로, 혹은 그보다 드물게 돌연변이가 하나씩 태어납니다.

남다른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태어나 비상한 머리와 우월한 체력을 자랑하죠. 칼에 찔리면 죽고, 총에 맞으면 절명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지만 스물여섯 이후엔 노화가 다른 이들의 세 배는 느립니다. 선조들처럼 일찍 세상을 뜨지 않는다면 당신이 여든 살이 되어 노년을 살 때, 그는 갓 사십대 쯤 된 장년이겠죠.

그리고 피를 마십니다.

피를 마시지 않으면 급격한 갈증에 휘말리다 미쳐 버리거나, 끔찍한 살육을 저질러 죽임 당하거나, 아니면 괴로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죠.

알아본 바로 최근에 그는 피를 마신 적이 없습니다. 그 참혹했던 날의 밤 이후로.

아마도 그 나름대로 억제를 하려 하는 것이겠지만, 그 부작용이 언제 나올지 그것이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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