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64)

62.

“일어나.”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납치되기 전부터 샬럿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래서일까. 피가 마르는 상황임에도 그녀는 수마를 이겨 낼 수 없었다.

“으응…….”

혼절하듯 눈을 붙인 후 얼마나 지났을까. 어딘가로 사라졌던 카나가 돌아왔다.

“일어나. 샬럿 헤겔.”

그녀의 몸을 흔든 카나가 이내 눈을 뜬 샬럿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다리의 포박을 풀었다.

“네 잘난 약혼자가 널 데리러 왔어.”

“어디……?”

“밑의 층에. 발은 풀어 주지.”

거칠게 그녀를 앞장세운 카나가 계단으로 향했다. 샬럿은 등 뒤로 손을 묶인 채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납치당하면서 신발을 잃어버렸는지 맨발이 싸늘한 바닥에 닿아 추웠다.

층계참에 발을 디딘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

“…….”

“인정하긴 싫지만, 맞는 말이더군.”

“카나…….”

“우린 확실히 무고한 사람들을 휘말리게 했어.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날이 서 있던 낮과 다르게 조금 느슨해진 목소리였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사이. 허심탄회하게 입을 연 카나가 말을 이었다.

“어떤 방식이든 그에 대한 사죄와 대가는 치를 생각이야. 대의가 우선이긴 하지만.”

“잘… 잘 생각했어요.”

진심이었다. 비록 납치를 당하고 험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그렇게까지 내몰린 그녀를 이해했다. 지금 카나의 모습도, 저택에서 보았던 카나의 모습도 어느 쪽이든 전부 그녀였다. 다정한 리하르트도, 차가운 리하르트도 전부 그 사람이듯.

젖은 숨을 들이켠 샬럿이 나직이 대답했다.

“리하르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래?”

“네. 그러니 카온은 무사할 거예요.”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다. 그는 한번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니.

“그랬으면 좋겠네. 그럼 너도 무사할 테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카나가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네 약혼자와 제닌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야. 제닌이 흥분하면 상황이 곤란해져. 어서 내려가자.”

계단을 내려가니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그가 있었다. 말에서 내린 리하르트가 짐처럼 엎어진 인질을 끌어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나가 소리쳤다.

“카온!

까무잡잡한 얼굴에 날카로운 인상. 검은 머리칼. 확실히 카나와 닮은 얼굴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려는 카나를 제닌이 제지했다. 총구를 리하르트에게 겨눈 그가 명령했다.

“먼저 무기가 없는 걸 증명해!”

어두컴컴한 와중에 이쪽으로 고개를 튼 그와 샬럿의 시선이 마주쳤다. 샬럿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 그사이 뺨이 조금 여윈 것 같았다.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정말 혈혈단신으로 왔다는 것.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대답 대신 리하르트가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외투를 벗고 양 주머니를 뒤집어 내보였다. 그다음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완전히 비무장으로 온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카온을 보내!”

카나의 목소리에 그가 거칠게 인질의 등을 밀었다. 휘청거리던 몸이 겨우 균형을 잡고 이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오고 있었다. 중간 지점까지 왔을 때, 결국 못 참은 카나가 달려 나가 혈육을 끌어안았다.

“됐어! 제닌. 이제 샬럿을 보내.”

상처투성이가 된 오라비를 부축하며 카나가 외쳤다. 남매 상봉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샬럿의 등을 그녀가 거침없는 손길로 밀었다.

리하르트.

자신을 기다리는 그가 보였다. 샬럿은 기운 없는 몸을 비척거리며 흙투성이가 된 맨발로 그에게 향했다. 코앞까지 다가간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대로 앞으로 엎어지려는 몸을 단단한 손이 잡아 품 안에 가뒀다. 옅은 머스크 향.

“리하르트…….”

“…….”

“나 할 말이…….”

그녀가 깨달은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우리는 좀 더 대화를 했어야 했다고. 그날, 나는 그런 식으로 도망쳐서는 안 되었고 오해를 풀건 완전히 끝을 내건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했다고.

“쉿.”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대로 막혔다. 뒤통수를 더 가까이 끌어안은 그가 그녀를 말에 앉혔다. 그대로 이곳을 벗어나나 싶었던 그때.

“꺄악!”

“제닌, 너 이 자식!”

공기를 찢는 비명에 시선을 돌린 샬럿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이쪽으로 총구를 겨눴던 제닌이 남매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게 대체…….”

“장관이군.”

무슨 상황이지, 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머릿속이 표백된 듯 새하얗게 물들었다. 상황 파악이 좀처럼 되지 않아 그대로 생각이 멈춰 버렸다. 소리 없이 미소한 리하르트가 제닌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데려와.”

“리하르트……!”

고개를 끄덕인 제닌이 카온과 마찬가지로 카나의 손을 포박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을 끌고 이쪽으로 향했다. 정지했던 사고가 조금씩 돌아왔다. 리하르트가 손의 포박을 풀어주지 않아 높은 말안장 위에서 혼자 내려올 수도 없었다. 경악한 샬럿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서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 조금 더 느긋하게 두고 보다 때가 되면 싹 다 잡아들이려 했더니 말이야.”

“서, 설마 사전에 계획된 거였어요……? 전부……?”

“내가 그 정도 조사도 하지 않고 저 여자를 네 곁에 뒀을까.”

“어, 어떻게…….”

“인간이란 쉽게 변절되고 눈앞의 황금에 쉽게 넘어가지. 누구도 다를 게 없는 거야. 피를 나눈 동지라고 하더라도.”

안 돼.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들을 살려 주지 않을 것이다. 다급하게 헐떡이며 샬럿이 애원했다.

“…약속, 약속한 거잖아요.”

“약속은 지켰어.”

“이게 어, 어떻게 지킨 거예요?”

따지는 말에 리하르트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인질 교환은 성공적이지 않았나?”

“…….”

그 태연한 말에 말문이 탁 막혔다.

“내 착각이었어. 전부. 역시 당신은…….”

열이 올랐던 눈시울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건조한 입술이 달싹였다.

“그대로야…. 변하지 않았어.”

목소리가 건조하다 못해 갈라졌다. 겨우 잡은 구명줄이 사실 그녀를 더 나락으로 처박기 위한 함정임을 알았을 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지독해.”

말이 이어질수록 빙벽 같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해 갔다. 하지만 발밑의 절망에 사로잡힌 샬럿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명령대로 데려왔습니다.”

이윽고 다가온 제닌이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흘깃 씨근덕대는 남매를 번갈아본 리하르트가 그제야 뒤를 돌았다.

“두 사람은 그대로 군에게 넘겨. 이만하면 섭정관도 만족하겠지.”

말고삐를 잡은 그가 발받침에 발을 얹으려는 때였다.

탕.

“히히히힝!”

“꺄아아악!”

신호탄처럼 제닌의 총이 불을 뿜었다. 날카롭게 총신을 통과한 총알이 말의 다리를 뚫고 지나갔다. 앞발을 치켜든 말이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샬럿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 위로 끔찍한 고통이 달려들었다.

“아아아악!”

“샬럿!”

새파랗게 질린 리하르트가 빠르게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태를 살폈다. 말에 깔린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아아! 아파! 흑, 아파요……!”

말의 몸에 짓이긴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비명을 지르는 샬럿의 머리 위로 큰 손이 닿았다. 리하르트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덮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리하르트…….”

“좀 자는 게 좋겠어. 샬럿.”

“…….”

“눈 감았다 뜨면 전부 끝나 있을 테니.”

한순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러나 짧은 찰나, 눈에 담긴 그는 낙인처럼 가슴에 박혔다.

위태롭고 초조하고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는 힘껏 부딪혀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빙벽 같은 남자였다. 차갑고 무자비하고 단단한.

그런 남자가 차마 꿈에서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때, 솨아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총알을 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눈물 나는 사랑이군.”

동시에 주변에서 쇳소리와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언제 숨어 있었는지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반군들이 그들에게 총칼을 겨눴다.

“…….”

그녀의 눈을 감긴 뒤 말을 들어 올리던 리하르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함하는 카나가 주위를 돌아보고는 제닌의 팔을 잡았다.

“안 돼. 제닌. 이러면…….”

“비켜!”

“꺄악!”

“카나!”

거칠게 카나의 몸을 밀친 제닌이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총구를 목전에 두고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얼굴로 리하르트가 물었다.

“언제부터지? 마음이 바뀐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니.”

“마음에 드는군. 초연한 태도가.”

그럼, 하며 제닌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때였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또 무슨 제안. 그 제안에 뒤통수를 맞았는데도?”

“살려 달라는 건 아니니 걱정 마.”

흥미로운 미소가 제닌의 입가에 걸렸다. 재미있는 사내였다.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죽음을 앞두고서도 이리 초연한 모습이 불쾌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들어나 보지.”

“날 죽이는 건 괜찮지만, 이 여자를 죽이면 네 가족도 죽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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