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64)

61.

같은 시각, 어둠 속에서 여자는 자신을 부르는 말에 눈을 떴다.

“카나.”

“제닌.”

창문을 열고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한 남자가 몰래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제닌. 반군의 리더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지금 적지 한가운데 들어온 상황이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됐어? 상황 진척은?”

“샬럿 헤겔이라면 반쯤 넘어온 상황이야.”

“언제쯤 되겠어?”

“이르면 다음 주쯤…….”

“그럼 늦어!”

남자가 우악스럽게 카나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카온이 위험해.”

“그게 무슨 소리야.”

“소식통에 의하면 이번 주말에 처형된다고 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얼어붙은 카나를 바라보며 제닌이 당부했다.

“계획을 좀 더 앞당겨야겠어, 카나. 시간이 없어.”

***

샬럿은 머릿속이 온통 번잡했다. 마치 복잡한 미로 안에 갇힌 것 같았다. 더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누구의 편을 들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전날 리하르트에게 카온의 정체를 들은 뒤 그녀는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분이 저조해 누군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데 때마침 오늘 저택에는 그녀 혼자였다. 식사는 간단히 방에서 했고, 카나의 얼굴을 당장 볼 수 없어 침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한 상태였다.

양측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어떤 게 진짜 리하르트의 모습이고 카나의 말은 진실일지.

창가를 보고서서 산을 바라봤다. 한참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만졌다.

“아가씨.”

“…카나……?”

문은 분명 닫았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지?

커다래지는 눈동자를 본 카나가 빙긋 웃었다.

“물어보셨어요?”

“뭘…….”

“…….”

“아.”

멀거니 반문하다 샬럿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오. 아직…….”

“그렇군요.”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표정을 정리한 샬럿이 간신히 입가를 끌어 올렸다.

“오늘 물어보려고요.”

“못할 거예요.”

“뭐?”

“못할 거라고.”

놀란 숨을 들이켤 새도 없었다. 주춤, 뒤로 물러서기 무섭게 샬럿의 팔이 끌어당긴 카나가 손날을 세워 그녀의 급소를 가격했다.

“아윽……!”

“미안, 아가씨.”

허물어지는 시야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자요.”

***

“으윽…….”

머릿속이 빙빙 울렸다. 속이 메스껍고 욕지기가 올라왔다.

샬럿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버려진 폐허였다. 그녀는 낡은 카우치 위에 손발이 묶인 채 앉아 있었다.

“일어났어?”

혼자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샬럿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던 걸음이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아니, 아직.”

“너무 세게 친 거 아니야?”

“지금쯤 일어나야 하는데.”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지척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목소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뭐 그건 됐고. 그놈은?”

“연락을 했으니 지금쯤 받았을 거야.”

“혼자 오라고 한 거 맞지?”

“응. 아니면 약혼녀를 죽인다고 했어.”

약혼녀.

누구를 가리키는지 단번에 알았다. 동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카우치 너머 서 있던 남자와 대화하던 여자가 고개를 내렸다.

“일어났네. 샬럿.”

“…카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릎을 접은 카나가 눈높이를 맞췄다.

“조금 불편해도 참아.”

완벽하게 존대를 집어치운 말투. 하녀였을 때가 아닌 지금이 그녀의 진짜 모습으로 보였다.

“여긴 대체 어디…….”

“알 것 없어. 어차피 곧 떠날 테니까.”

어디로 떠난다는 걸까. 돌려보내 준다는 걸까, 아니면…….

깊어지는 생각을 애써 차단하는데 샬럿의 목에서 묵은 기침이 튀어나왔다. 연신 콜록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카나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뿌리치고 싶었으나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의외로 자존심이 세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저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야.”

“오라비 얘기는 거짓말이었어……?”

“아니. 그건 진짜야.”

언제 친절했냐는 듯 다시 일어난 카나가 제닌에게 시선을 던졌다.

“몇 시에 오라고 했지?”

“오늘 저녁. 이제 두 시간 남았어.”

“그래. 난 이 여잘 감시할 테니 나가서 망을 좀 봐.”

“알았어.”

더는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리하르트.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샬럿이 버둥거리며 팔을 내밀었다. 간신히 카나의 옷자락을 잡고 노려봤다.

“그를 어쩔 셈이야.”

“너는 건드리지 않을 거야. 너에겐 죄가 없으니까.”

“말 돌리지마……!”

흥분한 나머지 실핏줄이 터졌는지 눈이 따끔거렸다. 그런 샬럿을 보며 안됐다는 듯 카나가 가볍게 혀를 찼다.

“내가 말했잖아. 카온 이야기는 진짜라고.”

“…….”

“그 남자가 카온을 데려오면 너와 카온을 교환할 거야. 일종의 거래지.”

“그럼,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어째서?”

돌아온 물음에 샬럿의 말이 막혔다. 정말로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

“그 저택에서 일하면서 본 바로,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걸쳐도 너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놈이 억지로 가둬 두던 게 아니었나?”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녀는 도망쳤고, 그는 찾아냈다. 그리고 주변을 옭아매 결국 자신에게 오게 만들었다.

분명 그는 지독했다. 그리고 미웠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남자는 자신의 숨통도 항상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

“죽이지 마. 부탁이야. 인질만 교환하면 끝난다고 약속해.”

영원히 살 것만 같은 그가 죽는다는 상상만으로 눈앞이 새카매지는 기분이었다. 숨이 콱 막히고 세상 전부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암담함.

정적이 싸늘하게 두 사람을 에워쌌다. 냉정한 눈으로 샬럿을 내려다보던 카나가 실소했다.

“…너도 결국 똑같은 인간이구나.”

“무슨…….”

“자기 자신의 고통과 상실만 중요하지. 남이 어떤 끔찍한 일을 겪었는지, 어떻게 버텨 왔는지 관심조차 없는 이기적인 족속들.”

“카나.”

“네 약혼자가, 네 조국이 우리나라에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아?”

짓씹는 듯 분을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아무런 문제 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섬에 침입해서, 현지인들을 약쟁이로 만들고 호화로운 물건들로 눈을 멀게 만들었지. 그리고 그 틈을 타 이 섬의 자원을 탈취하고 점령했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점점 들을수록 섬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느낀 위화감이 설명됐다.

“네 약혼자가 공동 대표로 있는 회사도 마찬가지야. 이 섬을 수탈하고 한 조각도 남김없이 갉아먹는 해충 같은 것들.”

꽉 쥔 주먹,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 오랜 시간 삭여 왔던 울화가 느껴졌다. 아무 말도 없이 카나의 말을 듣던 샬럿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느릿하게 물었다.

“그래서… 공사 현장에 폭탄을 던졌나요?”

“…닥쳐.”

“죄 없는 인부들은요. 그들도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을 텐데.”

“닥쳐!”

쾅. 주먹 쥔 손이 매섭게 그녀의 머리 바로 옆을 쳤다. 거센 위협에 겁에 질릴 법도 하지만 샬럿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당신들의 명분은 옳아요. 분노할 만했고 분노해 마땅하죠.”

“…….”

“하지만 방식이 틀렸어요. 당신들의 울분을 풀고자 무고한 희생에 눈 감아선 안 됐어요. 한 번쯤은 그들과 대화를 하고 풀어 나갈 시도를 해야 했어요. 지금은 그저 그게 싫다고 도망치고 분풀이하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말려들게 한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고요.

한참 동안 샬럿을 노려보던 카나가 고개를 돌려 멀어졌다. 점점 작아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샬럿은 눈물을 삼켰다.

이제야 깨달았다. 말하는 와중에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방식이 틀렸다.

자신은 누구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자신 또한 그랬다.

그날, 그 끔찍한 악몽 같던 밤. 목도한 게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 해도 그에게 한 번쯤 제대로 물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어째서 두 사람이 죽어 있냐고.

당신은 왜 또 그 꼴이냐고.

‘…샬럿.’

‘다가오지 마!’

‘…….’

‘흑. 흐윽… 이 괴물. 끔찍한…….’

그러나 묻지 않았다. 대신 도망쳤다. 비겁한 방식으로, 잔인한 방식으로. 남겨진 사람 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그 바람에 자신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또 다쳤다.

그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첫날, 응접실에서 본 그 포대 자루, 프란츠가 말한 유전병. 그리고 가끔 세로로 길게 찢어지는 동공.

어렴풋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자신은 그의 이상함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 섬이 그가 실종되었다던 섬인 것을 알았을 때, 그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가 보여 준 약간의 다정함에 취해 결국 또 눈을 감아 버렸다.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만큼은 피해자일지도 몰랐다. 연인에게 오롯이 인정받지 못해 점점 삐뚤어져 간 불쌍한 피해자.

그 호숫가에서. 그날 밤에. 다시 만난 날. 자신이 그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면 지금쯤 우리 관계는 달라졌을까.

“흑흑…….”

결국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리하르트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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