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데온은 그저 어른의 품을 그리워하는 아이였다. 샬럿이 따뜻한 손길로 등을 몇 번 쓸어 주자 금세 잠이 들었고, 카우치에 눕혀도 세상모르고 잤다. 안쓰러운 마음에 무릎을 베고 잠에 든 아이의 뺨을 쓰다듬자 끓인 차를 내온 제레미가 운을 뗐다.
“핏덩이일 때 부모를 잃고 정을 모르고 커서 그런지 어리광이 많은 아이죠.”
“그렇군요. 어쩐지…….”
정이 많이 고파 보였다. 말없이 아이를 쓰다듬던 샬럿이 조심히 물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4년 전 남은 카르델 저항군과 정부군의 전쟁에 휘말렸어요. 부부의 아이라고는 이 아이뿐이었죠. 이 아이를 구한 건 윈클레 씨였습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고아원이 없어서 임시로 만든 고아원에서 제가 데리고 있었죠.”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샬럿이 홱 고개를 들었다.
“4년 전이라면…….”
“아, 민감한 이야기였다면 죄송합니다. 그때 샬럿 양도 마음고생이 심하셨겠군요.”
제레미의 말에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가 실종된 게 바로 이 섬이었구나.
제럴드와 식사 자리 때도 과거가 나오면 묵묵히 듣기만 하던 그였다. 그래서 어렴풋이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 이 섬이었을 줄이야.
“아니에요.”
어째서 그가 자신을 이곳에 오라 한 건진 몰랐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어쩌면 ‘그날’의 진실에 다가갈 기회라는 것을. 그는 대체 누구이고 이 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상체를 숙인 샬럿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레미가 진지한 얼굴에 결국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하자면, 조금 긴 이야기입니다.”
***
에셀우드가 카르델 섬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취한 건 5년 전 겨울이었다.
사실 이렇다 할 유혈 투쟁이나 전쟁도 없이 얻게 된 영토였다. 작은 왕정제 국가로, 오래 독재로 인해 썩어 들어가던 독립 국가였으니까.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 가자 혹시 모를 반역에 전전긍긍하던 왕은 말 그대로 섬을 팔아넘겼고, 나라는 공식적인 협정을 거쳐 에셀우드 여왕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러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지배층에 대항하던 피지배층 세력이었다. 섭정관을 시작으로 속속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에셀우드의 세력에 거부감을 느낀 그들은 그로부터 1년 후 급기야 반군을 조직했고 독립을 주장했다. 결국 첫 섭정관은 납치되어 잔혹하게 살해됐다.
소식을 접한 여왕은 곧바로 군대를 파견했고, 첫 2년 동안 지리멸렬한 전쟁이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이도 저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수없이 희생됐죠. 혼돈의 나날이었습니다.”
리하르트 또한 그때 파견된 장교 중 하나였다. 입대하여 막 임관해 별을 단 젊은 하사. 거의 막바지인 줄 알았던 전쟁이 마지막 장렬히 불을 태울 때가 그가 이곳에 발을 디딘 지 세 달째 되던 즈음이었다.
“양쪽에 극심한 피해가 있었지요. 결국 에셀우드 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런 것치곤 곳곳에 무장한 군인이 보이던데요.”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알게 모르게 이 섬에 깃든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임 군인의 딸인 올리비아 또한 외출 시 호위 군인을 서넛 대동했다.
“반군에게 항복을 받아 낸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니 아직 그 잔당이 남아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군요.”
대답과 달리 샬럿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다.
“윈클레 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허술한 분이 아니시니까.”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다는 듯한 말에 흐려졌던 안색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샬럿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데온은 어떻게 구한 걸까요.”
“그건…….”
“나한테 직접 물어보면 될 텐데요.”
언제 문이 열렸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리하르트가 놀란 그녀의 찻잔을 뺏어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사선에 놓인 카우치에 앉았다.
“오셨군요.”
반갑게 인사하는 신부에게 눈인사한 그가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옮겼다.
“무슨 얘기 중이었습니까?”
“우응…….”
깜짝 놀라 일련의 동작을 가만히 바라보던 샬럿이 정신을 번쩍 차린 건 무릎에서 뒤척이는 데온 때문이었다. 동시에 날카로운 시선이 아이를 향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 제레미가 벌떡 일어나 데온을 안아 들었다.
“데온. 방 침대에서 계속 자자꾸나.”
“응….”
잠이 덜 깬 데온이 익숙한 품에서 다시 곯아떨어졌다.
“저는 아이를 눕히고 다시 오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아이를 안아 든 제레미가 퇴장하자 넓지 않은 응접실에 그와 단둘이 남았다.
샬럿은 조금 전 제레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분명 왜곡된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무릎베개를 해 준 아이에게조차 질투하는 남자 아닌가. 분명 자신이 구했던 아이인데도.
“늦었네요.”
“가는 도중 일이 생겨서.”
“그런데 이곳엔 왜 오라고 한 거죠?”
“심심해했잖아.”
자연스럽게 긴 다리를 한쪽 다리 위에 올려놓은 리하르트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인 것 같으니 취미생활이라도 하라고.”
“취미 생활?”
“개나 고양이는 질색이니까. 전염병 위험도 있고.”
“리하르트!”
부모 잃은 아이와 길가의 동물을 똑같이 취급하는 그의 말을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난 샬럿을 힐긋 올려다본 리하르트가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이곳은 일손이 부족해. 신부라곤 저 원장 신부와 다른 한 명뿐이지.”
그러니 원한다면 틈틈이 가서 일을 도와도 된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동행은 있어야겠지만. 낯선 남자와 가볍게 말을 섞어도 의처증처럼 몰아붙이고 집 안에 가둬 둔 그답지 않게 관대한 제안이었다. 어깨에 힘이 풀린 샬럿이 털썩 다시 카우치에 주저앉았다.
“…어쩐 일이에요. 가둬 두지 못해 안달인 사람 같더니.”
“네가.”
반면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리하르트가 샬럿에게 손을 뻗었다. 움찔대며 눈을 감은 것이 무색하게, 큰 손은 이마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쓸어 넘겨준 뒤 떨어졌다.
“말라비틀어지면 안 되니까.”
“…….”
“선량하고 천사 같은 헤겔 양이 동정하지 않는 건 나뿐이지.”
안 그래? 나직이 이죽거린 그가 어느새 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단 시간은 낮뿐이야. 세 시간.”
“…….”
“싫다면 말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말없이 선 뒷모습을 향해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할게요.”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의욕이 생겼다.
***
고아원 봉사는 기대한 것보다 즐거웠다. 세탁과 청소를 하고 싶었지만 동행한 카나의 만류에 포기했다. 대신 샬럿은 아이들의 헤진 옷을 수선해 주고 동화를 읽어 주고 간단한 셈을 가르쳤다. 대부분의 아이가 잘 따랐지만 그중 데온은 완전히 껌 딱지가 되어 그녀 옆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샬럿. 내일 또 오지?”
“그럼.”
“꼭 올 거지?”
“그럴게.”
봉사 온 첫날, 돌아간다니 울면서 떼를 쓰던 아이가 보름이 지난 지금은 한층 의젓해졌다. 그래도 불안한지 거듭 맹세를 받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아가씨. 지금 가야 해요.”
“알았어요.”
세 시간. 자기가 뱉은 말은 철저히 지키는 남자답게 딱 시간이면 마차가 왔다. 한숨을 내쉰 샬럿이 아이를 힘주어 꼭 끌어안고 놓았다.
“내일 또 보자. 데온.”
“응 내일 봐.”
손 흔드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마차에 타자 바로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데온에게 한참 시달린 터라 뻐근한 어깨를 누르는데 마주 앉은 카나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네?”
“참 친절하시네요. 저만한 또래의 동생이라도 있으세요?”
“아. 아니에요. 다만. 조금.”
동질감이 들었다. 고아였던 건 아니지만 의지할 데 없는 처지인 건 같지 않나. 말을 삼키는데 그런 그녀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가만히 바라보던 카나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참 아이러니하네요.”
“뭐가요?”
“저 아이들의 부모를 죽인 게 누구일까요.”
“…….”
가해자들과 같이 사는 주제에 성녀 행세를 하다니.
들리지 않는 말이 비수가 되어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샬럿의 안색이 흐려지자 뒤늦게 제 말실수를 알아차렸는지 카나가 다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
“얼마 전 실종된 제 오빠가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가씨 잘못이 아닌데…….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울먹이는 얼굴은 약하디약해 보였다. 잔뜩 상처 입어 하악거리는 고양이처럼. 화를 내려도 낼 수 없었다. 샬럿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나라도 괜찮으면, 오빠 이야기를 해 주겠어요?”
어떻게 해 주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혼자 품고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는 게 얼마나 나은지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진다면.”
카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카나의 사연은 가슴 아팠다. 부모님이 전염병에 일찍 세상을 뜨고 혈육이라고는 오빠 하나뿐이라고 했다. 확실하게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분쟁에 휘말려 생사조차 알 수 없어진 오빠를 애타게 그리워했다.
긴 이야기를 들으며 샬럿은 그 마음이 안타깝고 슬펐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 주고 싶었다.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달칵.
“리하르트.”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그녀와 침실을 같이 쓰는 유일한 남자였다. 평소와 달리 잠옷 차림의 샬럿이 팔을 뻗어 리하르트의 외투를 받아 들었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에 그가 조소했다.
“무슨 일이지? 날 다 기다리고.”
“그냥. 이런 날도 있는 거죠.”
순순한 대답에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다행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안도한 샬럿이 이어 그의 조끼를 받아 정리했다.
“인사가 늦은 것 같아서요.”
“무슨.”
“고마워요. 조금이나마 자유를 허락해 줘서.”
“허튼짓 하면 목줄을 다시 조일 거라는 걸 명심해.”
이번에 미간을 찌푸린 쪽은 그녀였다. 재회한 지 벌써 3개월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도 냉수를 퍼붓듯 맥을 끊어 버리는 남자였다. 아직도 밉고 두려운 남자였지만, 그가 그녀에게 질려 놓아줄 때까지는 서로 상처 입히고 물어뜯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답을 강요하듯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샬럿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 그에게 말할 본론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할 말이 있는데요.”
그 순간, 강한 힘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