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64)

57.

올리비아 제른은 열일곱 살의 파릇파릇한 아가씨였다. 아버지를 닮아 부드러운 인상에 헤이즐넛 색 머리칼, 그보다 조금 더 진한 고동색 눈동자. 수줍어하면서도 한번 마음을 열면 말이 많았다.

“리하르트 씨는 제 오빠 같은 분이었어요. 말이 별로 없지만 다정했죠.”

샬럿은 브레드가 자신을 약혼녀라 소개했을 때 희게 질렸던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다. 상심한 게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순수하고 솔직한 소녀였다. 성격 또한 유순하고 착해서 같이 있을수록 정이 갔다. 설령 그녀의 연적 아닌 연적이라 할지라도 미워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샬럿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짜 연적이라 한들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렇군요.”

“샬럿은 그와 어떻게 만났나요?”

어느덧 편하게 부르게 된 올리비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반 박자 늦게 정신 차린 샬럿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제 어머니가 그의 유모였어요.”

“어머나.”

눈을 내리깐 샬럿이 저도 모르게 한 차례 두 손을 모았다 폈다. 올리비아는 리하르트와 사는 세계가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노동자 집안 출신인 사실이 어떻게 다가갈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내려앉은 침묵에 자리가 불편해지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샬럿의 손을 꼭 잡았다.

“올리비아……?”

“세상에, 너무 로맨틱해요!”

“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거잖아요. 아닌가요?”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동경과 선망을 담아 반짝였다.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나왔다. 샬럿의 손을 놓아준 올리비아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쩐지 왜 새로운 성을 쓰나 했어요. 그저 백작가에서 독립해 나와서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멀찍이 떨어진 섬에 있다 보니 제가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그때 방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아버님이 부르십니다.”

“알았어, 금방 나갈게.”

현지인 하녀 카나였다. 바로 대답한 올리비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샬럿도 오늘 바쁜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여유가 있었으니까.”

그래. 이렇게 감옥 같은 곳에서 넘치는 건 시간뿐이리라.

샬럿이 지쳐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샬럿은 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곧 리하르트가 말한 시간이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샬럿은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냉랭한 시선이 탁 트인 정경을 향했다.

샬럿 헤겔은 카르델 섬에 온 이후, 날로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침대 위에서 손을 대면 신음을 토해 내며 반응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듯 꿋꿋이 그를 외면했다. 순응보다 소리 없는 저항을 택한 여자가 우스우면서도 오기가 생긴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울을 봐. 이게 지금 나와 너야.’

‘싫어……! 아니야. 아니야…….’

‘음란하게 질질 싸 대면서.’

‘아니야…….’

넌 내 것이야. 이 몸도 영혼도 전부.

한 손에 감기는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저주를 걸 듯 수십 번, 수백 번 되뇌었다.

온통 붉게 물든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체는 부드럽고 땀에 젖어 끈적했다. 빠져나가려는 손을 덮고 도망치려는 몸을 내리누르고. 차라리 목을 졸라 죽여 버릴까 하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몸을 손끝으로 훑어 내려갈 땐 진득한 욕망이 솟구쳤다.

섬에 데려왔으니 이대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가두는 건 어떨까. 쾌락에 굴복하여 머릿속에 오직 그만 가득하게. 그럼 또다시 도망칠 생각 따위 하지 않겠지.

“윈클레 씨.”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동시에 가파르게 치닫던 생각이 멈췄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임시 비서인 에드윈이었다. 높은 계단을 뛰어 올라와 젖은 땀을 손등으로 닦고 있었다.

“헉헉… 여기 계셨군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무슨 일이죠?”

“이곳에 오래 계시는 건 위험합니다.”

“호위가 붙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멀리서 저격하는 총에 당해 낼 사람은 없었다.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는 에드윈을 향해 짧게 조소한 리하르트가 그를 스쳐 지나 계단으로 걸음을 향했다.

“반군을 제압한 지가 언젠데 아직 잔당을 소탕하지 못했다니 이곳 섭정도 알 만하군요.”

“집요하고 끈질긴 놈들입니다. 입에 재갈을 물릴지언정 송곳니만은 여전히 날카로운 들개 같죠.”

겉으로는 평화로운 섬 안에는 아직 채 식지 않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에셀우드 출신의 주요인사가 줄줄이 납치, 살해되기 시작한 지 벌써 1년 째. 반년 전에 간신히 살아 돌아온 한 명은 지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직 제대로 된 의사소통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벌떼에 물릴 줄 모르고 벌집을 건드리는 멍청이들 탓도 있는 것을.”

“그건…….”

이런 끔찍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음에도 미개발지였던 섬 북부에서 풍부한 석탄 자원이 발견되자, 돈 냄새를 맡은 에셀우드의 사업가와 귀족들이 끝없이 밀려들어 왔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목숨의 위협보다 당장 손에 들어올 금전을 택한 셈이었다.

에셀우드의 귀족 남자와 현지 여자와의 사생아인 에드윈이 볼 때 리하르트 윈클레, 그 또한 그중 하나였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곳에서 군 복무를 한 덕택에 다른 경쟁자에 비해 한층 수월하게 일을 진행해 나간다는 것일까.

실종된 적이 있었다던데 혹시 반군과도 연이…….

그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거침없이 앞서 내려가던 리하르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잡혔다던 놈은.”

“역시 독합니다.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아요.”

“재밌군.”

무엇이? 알 수 없는 혼잣말에 에드윈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내려갔다.

“연락하라 했던 쥐새끼는.”

“제안에 응했습니다.”

조소한 입술이 바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다음 일정은.”

“고아원 방문입니다.”

말이 좋아 자선이지, 사실 이곳 주민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방책 중 하나였다. 황급히 상사의 뒤를 쫓으며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샬럿 양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

늘 그래 왔듯 기절 직전의 정사 후 그가 다짜고짜 낮에 사람을 보낼 거라 통보했을 때, 샬럿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인형처럼 꾸민 뒤 연회 같은 곳에 동행하는 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샬럿이 향한 곳은 낡고 허름한 수도원이었다.

“여긴…….”

문 앞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정복을 입은 늙수그레한 신부 한 명이 그녀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여기는…….”

“란첼스 고아원이랍니다. 가난과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의 집이지요.”

“아아.”

의외의 대답에 놀란 마음을 감출 여유도 없이 작은 아이 하나가 신부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를 바라보자 뒤이어 다른 아이들 또한 보였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모조리 한곳에 모였다.

“원장님! 저 사람 누구예요?”

“이 녀석! 손님한테 예의 없게.”

“아야!”

엄한 척 꿀밤을 먹였지만 새털처럼 가볍고 장난스러운 손길이었다.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 벙 쪘던 정신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와 신부를 에워싼 건 꾀죄죄한 얼굴에 소매가 다 닳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었다.

“용서하세요. 헤겔 양. 아직 어려서.”

“괜찮아요. 그런데 사제님은…”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곳 담당자이자 원장인 제레미입니다.”

자신을 소개한 신부가 뒤늦게 악수를 청했다. 마주 잡고 인사하자 그가 바로 안으로 안내했다.

“윈클레 씨의 약혼녀 되시죠?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뵈어요.”

영문 모를 상황의 연속이었다. 얼결에 그를 따라가자 회랑을 가로지르며 제레미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곳은 지은 지 백 년이 넘은 수도원입니다. 전쟁 이후 버려져 있다가 에셀우드 섭정관님의 명으로 1년 전에 고아원으로 재단장했죠.”

본 성당을 중심으로 정방형의 건물이 둘러싼 구조였다. 그 가운데에는 장엄한 느릅나무 주위로 꽃을 심고 벤치를 놓아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건물은 많이 낡았지만 정기적으로 보수하는 듯 튼튼해 보였다.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 또한 일반 아이들보다 옷차림이 조금 추레할지언정 하나같이 밝고 해맑았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곳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먼지 한 톨만큼도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거기까지 의문이 미쳤을 때 다시 설명이 이어졌다.

“윈클레 씨는 정말 좋은 분이죠. 본토의 지원도 물론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날로 많아지는 아이들 때문에 후원이 필요한 상태에서 기꺼이 손 내밀어 주셔서 감사히 생각합니다.”

“네……?”

귀를 의심하며 우두커니 멈춰 선 순간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아조…….”

네다섯 살 정도 되었을까. 조금 전 그녀를 향해 누구냐 물었던 꼬마 아이였다. 어느새 졸졸 쫓아와 샬럿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을 피면서 팔을 뻗었다.

“안아조.”

“데온. 이 녀석이…….”

“안아 주떼오.”

“내가 대신 안아 주마. 응?”

당황한 제레미가 대신 안으려 하자 고개를 저었다.

“안아조.”

“이 녀석…….”

중요한 후원자의 약혼녀였다. 밉보이면 그간 받아 온 후원이 끊길지 몰랐다. 손님에게 철썩 붙은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려는 순간 제레미는 귀를 의심했다.

“그래.”

옅게 웃은 샬럿이 아이를 들어 올려 안았다. 품에 안긴 아이는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자 아이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리광부렸다. 그 모습을 깜짝 놀라 지켜보던 제레미가 뒤늦게 팔을 뻗었다.

“무거우니 제가…….”

“괜찮아요. 아이인데요.”

하나도 안 무거워요. 덧붙인 샬럿이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품에 안기자 얌전했다. 만약 결혼식 날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보다 더 작은 아이를 가졌을 수도 생각하니 기분이 오묘했다.

민망한지 헛기침을 한 제레미가 제안했다.

“그럼 제 방으로 가시죠. 거기 카우치가 있으니 내려놓으면 됩니다.”

“그럴게요.”

샬럿은 제레미의 안내를 받아 원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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