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64)

54.

모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한 결과, 잡화점은 보름 만에 최소한의 손해를 보고 팔았다. 물건 또한 전부 팔았다. 샬럿의 가게뿐만 아니라 노점까지 가져 나와 열심히 판 덕분이었다. 샬럿도 몇 달치 월세를 미리 내는 등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협조했다.

“이제 하숙집 운영으로 빌렸던 돈만 갚으면 빚은 없어……!”

“정말 잘됐어요, 아주머니.”

“네 덕분이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샬럿을 한껏 껴안은 사라가 눈물을 글썽였다.

“은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받은 게 더 많은걸요.”

진심이었다. 2년간 열심히 의상실에서 일을 배우고, 어엿한 가게를 냈지만 마음은 여전히 허공을 배회하던 나날이었다. 아직도 종종 꿈을 꾸곤 했다. 두 팔을 벌린 어머니가 자신을 힘껏 안아 주는 꿈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떠오르는 어머니 신시아의 빈자리를 채워 준 건 사라였다.

스스로 아닌 척했으나 샬럿 자신은 언제나 가족에 목말라 했고, 정에 굶주려 있었다.

“너만 괜찮다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사라가 포옹을 풀고 샬럿과 마주했다.

“우리 가족으로 널 대하고 싶다.”

“예……?”

“사실 데릭한테 들었단다. 가족이 없다고.”

흔들리는 샬럿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두 손을 꽉 쥔 사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음 둘 곳이 없다면, 세실……. 내가 네 어머니가 되고 데릭이 네 동생이 되면 안 될까?”

“아주머니…….”

샬럿의 손이 덜덜 떨렸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얼어붙은 사라가 난처한 얼굴로 입을 뗐다.

“아. 혹시 싫다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샬럿이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요. 흑…….”

“세실…….”

이래도 되는 걸까. 내 주제에.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두 모자를 볼 때면 정체를 숨기고 사는 주제에 염치없는 욕심이 계속 올라왔다. 저들 사이에 있을 수 있다면. 저들과 가족애를 나눌 수 있다면. 속으로만 삼키고 미처 내뱉지 못했던 소망을 사라의 입에서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 전에 고백할 게 있어요.”

마음을 열고 그녀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모든 걸 말할 것이다. 모든 걸 듣고서도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를.

사라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샬럿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제 원래 이름은, 원래 이름은…….”

띵동.

입을 뗌과 동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사라였다. 미소를 지으며 포옹을 푼 그녀가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마주하는 이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누구시죠?”

“사라 부인 되시죠?”

“맞는데요…….”

“이걸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남자가 내민 건 채무 독촉장이었다. 종이를 읽어 내려가는 사라의 얼굴이 피가 쓸려 나간 듯 창백해졌다.

“말도 안 돼요! 이건…….”

“무슨 일이에요?”

등 뒤로 다가온 샬럿이 사라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받아 들었다. 샬럿의 얼굴 또한 표백한 듯 새하얘졌다.

“난, 나는 분명 이웃 한스 씨에게 돈을 빌렸다고요! 이런 회사가 아니라!”

“네. 그리고 그 한스 씨가 그 채권을 저희에게 양도했습니다.”

태연하게 대답한 남자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럼 채권 납부일 확인하시고 사인해 주시죠.”

“일주일 뒤……? 이건 너무 일방적이잖아요!”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채권자에게 하시죠. 저는 추심인이라 아무 권한도 없습니다.”

혼자 온 줄 알았는데 남자의 등 뒤로 덩치 큰 동행인이 두 명 더 있었다. 당장 데릭도 없는 데다 한 명은 나이 든 여성이었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 어딜!”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손을 밀치고 남자가 막무가내로 들어왔다.

“사인해 주실 때까지 안 나가겠습니다.”

한번 해 볼 테면 해 보자는 얼굴이었다. 어째야 하나 고심하고 있는 샬럿의 눈에 종이에 쓰인 채권자의 이름이 들어왔다.

[제럴드 해커]

“이럴 순, 이럴 수는 없어……!”

장밋빛이었던 미래가 한 순간에 나락으로 처박혔다. 믿을 수 없는 불행을 결연하게 맞기엔 사라는 이미 한차례 밀려든 시련에 모든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 그녀가 무기력하게 사인을 해서 서류를 건네자 남자들은 우르르 집을 떠났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제기랄! 천하의 개자식! 내가 뭘 잘못했다고!”

뒤늦게 돌아온 데릭은 사정을 듣고 분에 못 이겨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찧었다.

“내가, 내가 해결할게요.”

“네가 어떻게. 그 사람들… 상식이 안 통하는 것 같더구나.”

카우치에 기대 간신히 물로 목을 축인 사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서 임대업 쪽에도 손을 뻗는다고 들었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샬럿 또한 들은 적 있던 얘기였다. 도박 쪽에만 신경을 쓰느라 미처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상심에 젖은 세 사람의 적막을 깨뜨린 건 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였다.

“우편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사람이 없다 생각했는지 배달부는 편지를 문 아래로 넣고 이내 사라졌다. 데릭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세실. 이거 세실 거예요.”

보낸 이는 제냐였다. 잊고 있었던 편지.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갔지만 급보라고 써져 있는 게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편지를 건네받은 샬럿이 빠르게 봉투를 뜯었다.

[샬럿에게.

샬럿. 당신이 말했던 사업가에 대해 알아봤어요. 이름을 제럴드 해커. 작은 회사를 운영하던 남자였고 일찍이 아내와 사별했다네요.

실의에 빠진 그는 거의 도산 직전까지 내몰렸고 2년 전 기적적으로 회사가 소생했어요. 그 뒤로 소위 말하는 뒤쪽 세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괴물처럼 몸집을 불려 왔죠.

그리고 그런 그의 동업자가 있어요.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소문이 무성하더군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서른 남짓한 굉장한 미남이라고 들었어요.

변호사 출신의.

그라는 확신은 없지만… 어쩐지 예감이 불길해요.

부디 몸조심해요, 샬럿.

제냐 클리트우드]

“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는 샬럿을 보며 사라가 비명을 터뜨렸다.

허물어지는 시야 속에서 그녀는 깨달았다. 이 따뜻하고 다정한 모자에겐 죄가 없었다. 죄는 자신에게만 있을 뿐.

지리멸렬했던 숨바꼭질은 끝났고, 술래는 자신을 찾아냈다. 이제 도망친 대가를 치러야 할 때였다.

***

충격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다음 날 아침, 마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다. 제럴드가 보내서 왔다고 소개한 남자는 콕 집어 샬럿을 가리키며 마차에 타라고 했다. 마치 이쯤 되면 그녀가 알아챘으리라 확신하고 사람을 보낸 것 같았다.

샬럿은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그가 계획한 일이고 언제부터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는지 궁금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이 끼쳐 몇 번이나 몸서리를 쳤다.

“이게, 대체 무슨……!”

“제럴드의 동업자와 제가 아는 사이예요.”

“세실……?”

“걱정마세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기겁하는 사라와 데릭을 안심시킨 샬럿이 뒤를 돌았다. 이어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제 발로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에 도착 하는 내내 마차 안은 정적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부르르 떠는 작은 여자가 가엾어 보일 만도 하건만 모두 침묵을 지킬 뿐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남자들은 샬럿을 마치 눈을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신화 속 괴물을 대하듯 했다.

“…….”

숨통을 조이는 침묵 속에서 샬럿은 다시 한번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할까 싶었는데 앞장선 남자가 바로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펼쳐진 길에 샬럿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두울 거라는 생각과 달리 응접실 안은 밝았다. 창문 너머로 스며든 햇살이 카펫이 깔린 마룻바닥을 따뜻하게 적셨다. 일전에 들어갔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샬럿은 속지 않았다. 전에도 겪지 않았는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익숙한, 그러나 거의 잊어버렸다고 착각했던 옆모습이 보였다. 언뜻 금발로도 비치는 연갈색 머리카락. 그는 활짝 열린 창문 앞에서 정오의 고양이처럼 햇볕을 받고 있었다. 빛무리가 뚜렷한 이목구비를 따라 날렵한 턱 선에 맺혀 떨어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깊은 늪처럼 응접실에 고였다. 네 걸음을 앞에 멈춰 선 샬럿이 느릿하게 남자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리하르트.”

언젠가는 다시 마주할 거라 생각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한 남자니까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겨우 도망쳤다 생각한 거대한 거미줄 안으로 다시 발을 들이는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리하르트.”

분명한 목소리로 다시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전류가 흐르듯 강한 충격이 샬럿을 덮쳤다.

틀림없이 목을 졸릴 거라고 생각했다. 무자비하게 몰아붙여지고 어쩌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내심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마주한 얼굴은 언젠가 본 호수처럼 잔잔했다. 흉하게 일그러진 쪽은 도리어 그녀였다.

“언제부터였죠……?”

“무엇이.”

“당신,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요.”

많은 게 함축된 질문이었다. 언제부터 그녀의 행방을 알았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짜 놓은 덫이고 그걸 위해 무슨 짓까지 했나.

분노, 부끄러움, 당혹. 모든 감정이 소용돌이 쳐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그녀와 달리 마주한 남자는 태연했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반문했다.

“이제 와 그게 상관있나?”

“뭐……?”

이어진 추궁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 데릭인가 뭔가 하는 새끼는 어딨어.”

“무슨, 무슨 소리를…….”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붙어먹은 그 새끼 어디 있냐 물었어. 이곳으로 간다 하니 꽁지 빠지게 내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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