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샬럿은 방문을 나서면서 심호흡했다. 데릭의 마음을 거절한 이후 이제 얼굴 보는 것이 불편해지리라 각오했지만, 예상외로 그런 일은 없었다. 일단 마주칠 일이 드물었다.
그녀 입장에서야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지만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침에 사라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더욱 그랬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라.”
“좋은 아침. 세실.”
“요새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별일은 아닌데…….”
샬럿의 앞에 놓인 잔에 커피를 따라 주며 사라가 낯빛을 흐렸다. 그런 사라의 모습을 보며 샬럿이 사려 깊게 입을 열었다.
“하숙생이 또 나가서 그런가요? 금세 사람이 찰 거예요.”
“그것도 있지만…….”
“…데릭이 어제 또 안 들어왔군요.”
“응.”
샬럿의 안색 또한 같이 어두워졌다.
“요새 뭐 하고 돌아다니는지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외박을 하더라고.”
벌써 일주일째였다. 뇌까리듯 털어놓은 사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세실, 혹시 뭐 짚이는 거 없을까?”
반쯤 확신하며 묻는 말이었다. 둘이 저녁 식사를 했던 날 이후 조금씩 이상해졌으니까. 샬럿 또한 그렇게 묻는 사라의 저의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일단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미안해. 괜히 심란하게 한 것 같네.”
“아니에요. 언제든 털어놓으세요.”
애써 밝게 대답한 샬럿이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웃은 사라가 그녀를 배웅했다.
드레스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 여자가 밝게 웃었다.
“자수를 추가하니 내 드레스가 훨씬 멋져졌어요. 고마워요, 세실!”
“만족하셨다니 기쁘네요. 주문이 자세해서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이 드레스를 보면 제 극단 사람들이 질투할 거예요. 괜찮다면 이곳을 소개해 줘도 될까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언제든 소개해 주세요. 엘레나 소개로 왔다고 하면 더 신경 써서 해 드릴게요.”
잔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돌려준 샬럿이 붙임성 있게 웃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일이 처음엔 어려웠지만 점점 수월해지고 있었다. 몇 번 잡화점에서 본 데릭을 따라한 덕분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에 조금 흐려진 안색을 봤는지 손님이 슬쩍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 아니요.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는 때, 생각도 못한 질문이 불쑥 들어왔다.
“혹시 가게 월세가 높아졌나요?”
“네?”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카티아에서 온 사업가 한 명이 점점 여기 건물을 사고 있다고.”
“처음 듣는 얘긴데요.”
“다행이다. 관계없구나. 난 또.”
가슴을 쓸어내린 여자가 갑자기 손을 입가에 갖다 댔다.
“이건 뭐 공공연한 소문이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귀 좀 대 봐요.”
샬럿이 얼결에 상체를 숙이고 귀를 갖다 대자 이야기가 이어졌다.
“얼마 전 카티아에서 건너 온 사업가가 하나 있어요. 한 달 전쯤엔가 왔다더라고요. 중개업을 하는 것 같은데 이곳에도 뭐 볼 일이 있어 왔다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은밀해졌다.
“그런데 요즘 이곳에서 도박과 대부업을 시작하나 보더라고요.”
“도박이요……?”
“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고 그곳을 도박장으로 꾸렸어요. 시장에게 어떻게 동의를 얻은 건지, 자기들 말로는 합법적인 사업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도박이 합법이겠어요? 대부업도 그래요, 모르긴 몰라도 그 도박장에서 빚을 지게 한 다음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막대한 이자를 받으려 하는 거 같은데 그게 등 쳐 먹는 것과 뭐가 달라요?”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동시에 말도 안 되는 가정 하나가 샬럿의 뇌리를 스쳐 지났다. 스스로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상상. 하지만 동시에 ‘그 남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을 달콤하게 꾀였다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능력이 탁월했으니까.
“사업가 이름이 뭔데요……?”
느릿하게 묻는 질문에 긴장을 눈치채지 못한 여자가 대답했다.
“제럴드? 라고 했던 거 같아요. 성씨는 모르겠고.”
“아…….”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얘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
안도하는 샬럿의 안색을 잠시 의아하게 본 손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배웅하기 위해 일어난 샬럿이 문을 열었다.
“오늘 공연이라고 하셨죠. 조심히 들어가시고, 응원할게요.”
“네. 이번에도 고마워요, 세실.”
샬럿을 가볍게 껴안은 여배우가 뒤를 돌아 멀어졌다.
손님을 보낸 샬럿은 하던 일을 마저 하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름은 다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진열창의 커튼을 치고 일찍 가게 문을 닫은 샬럿이 서랍에서 엽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제냐에게.
이렇게 갑자기 편지해서 놀랐을 것 같아요. 부득이하게 알아봐 줘야 할 일이 있어 이렇게 연락해요.]
망설이며 서두를 쓰자 다행히 다음 글이 술술 이어졌다.
퇴근 길, 우체국에 들러 편지를 부치고 하숙집으로 가니 집 안이 떠들썩했다. 아침에 시무룩했던 얼굴이 거짓인 듯 밝은 얼굴로 문을 열어 준 사라가 샬럿을 껴안았다.
“샬럿!”
“사라?”
“아침에 공연히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니에요. 그런데…….”
평소와 달리 잘 차려 입은 옷차림에 의아해하던 샬럿의 시선이 이내 그녀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번듯이 차려 입은 데릭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글쎄, 데릭이 잡화점을 인수하기로 했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사라가 눈을 반짝였다.
“인수요?”
“응. 가게 주인이 사정이 생겨서 이번에 가게를 접게 됐나 봐. 헐값에 양도하는 걸 데릭이 샀다지 뭐야?”
“세상에.”
“그 과정에서 빚은 좀 졌지만 장사가 잘되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야!”
예기치 못한 희소식에 샬럿이 눈을 크게 떴다.
“워낙 조심해야 할 일이라 나한테까지 비밀로 했다지 뭐니. 난 그것도 모르고…….”
“엄마. 그만.”
민망한지 불쑥 끼어든 데릭이 어색하게 샬럿과 마주했다.
“지금 들어와요?”
“네.”
“괜찮으면 같이 식사하러 안 갈래요?”
보아하니 데릭의 성공을 축하하러 가는 듯했다. 모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안도의 미소를 지은 샬럿이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그럼 세실은 다음에 같이 먹자. 친구분도 나온다고 했으니 부담스러울 수 있어.”
살갑게 아들의 팔짱을 낀 사라가 마지막으로 현관 서랍장 위에 놓인 장갑을 끼었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자 샬럿은 식탁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잘됐다. 모든 게. 문제는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애써 찝찝함을 무시하며 샬럿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을 들어 준 거야. 분명히.
데릭은 작은 불행이 그에게 가져온 큰 행운을 되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인복 하난 타고난 게 아닐까 싶었다. 더불어 평생 해 본 적 없던 도박 운도.
“어이쿠, 또 잃었네!”
“좀 봐주게. 벌써 내리 세 판을 이기지 않았나.”
둥근 원형 탁자에 널찍이 마주 앉은 두 남자가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토해 냈다. 그러든 말든 돈을 쓸어 담은 데릭이 히죽 웃었다.
“그렇게 한두 번 봐주다 보면 끝이 없는걸요.”
“정말 얼마 안 된 거 맞아? 하는 족족 거의 이기는데.”
“그럴 리가요. 잃을 때도 있어요.”
사실이었다. 잃는 날도 많았지만 따는 돈이 항상 더 많아 손해 보는 날은 없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잡화점 인수 대금 절반을 내고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술술 풀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읏차, 전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또 따고만 가는구만.”
부러운 듯 눈을 흘기는 남자들을 뒤로한 채 일어난 데릭이 고급스럽게 잘 차려진 도박장을 나설 때였다. 직원들 사이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운 얼굴로 다가가자 길을 트듯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물러섰다.
“제럴드.”
“데릭.”
제럴드라 부른 남자는 마주한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맹수 앞에 선 것처럼 내리누르는 공기에 의식을 잃는 와중에도 몸이 딱딱하게 굳지 않았던가. 인상이 그때와는 약간 달랐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며 이곳을 알려 준 행운의 사자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슥 눈으로 데릭을 훑어 내린 제럴드의 시선이 양손 한가득 들고 있는 코인으로 향했다.
“오늘도 많이 땄나 보군.”
“운이 따라 주는 모양이에요.”
“이만 가는 건가?”
“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그렇군. 잘 가게.”
담백하게 인사한 제럴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홍해처럼 갈라졌던 남자들이 다시 그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신분제는 낡은 관습으로 치부되고 점차 자본과 사업이 우위에 서는 세상이었다. 처음엔 이런 외진 곳에 왜 왔을까 싶었는데 수도에서도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것을 보며 데릭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은 일반 서민들의 출입도 받고 있지만 곧 클럽처럼 되어 사회적으로 재정적으로 인정받은 신사들만의 장소가 될 것이다.
값비싼 와인과 칵테일을 은쟁반에 받치고서 돌아다니는 웨이터들, 판돈을 거는 손님 옆에 앉아 응원하는 아리따운 웨이트리스들, 잘 차려입은 부자들의 손끝에서 우아하게 타 들어가는 궐련. 곳곳에서 맡아지는 부와 사치의 냄새.
나도 성공하겠어. 그리고 당당하게 이곳을 드나들 거야.
그 모습을 동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결심을 다진 데릭이 발걸음을 옮겼다. 교환처로 가 코인을 돈으로 바꾸고 넓고 휘황찬란한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그를 멀찍이 눈여겨보는 시선을 뒤로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