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64)

51.

‘샬럿.’

흐릿한 기억 속에서 입술에서 턱까지 뚝뚝 떨어지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저를 쳐다보던 남자. 침몰하듯 허물어지던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에 그가 자신을 받아 주었던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났다.

충격에 빠져 몇 날 며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엄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이 끔찍한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은 그의 눈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쳤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간신히 숨을 들이마신 샬럿이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주어 침대로 걸어갔다.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란 샬럿이 잠시 주저하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이는 바로 데릭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희게 질린 샬럿을 마주하자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밤늦게 미안해요. 세실. 다름이 아니라 엄마가 이걸 갖다 주라고 하셔서.”

“…아…….”

“많이 놀랐어요? 얼굴이…….”

데릭이 내민 건 간단한 요거트와 과일이었다.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사라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데릭을 향해 옅게 웃어 보인 샬럿이 쟁반을 받아 들었다.

“아니에요. 그냥 좀 놀라서.”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멋쩍게 뒷머리를 긁은 데릭이 바로 뒤돌지 않고 머뭇거렸다. 샬럿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잠시 망설이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세실. 저… 괜찮으면 혹시 주말에 시간 낼 수 있나요?”

“주말이요?”

“네. 토요일 저녁이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샬럿이 두 눈을 깜박였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데릭이 푹 고개를 숙였다. 드러난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샬럿이 조용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째서인지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데릭의 나이는 이제 스물이었다. 그녀가 그 모든 일을 겪고 악몽에서 겨우 도망쳐 나왔던 그때 그 나이. 어리고 순진하고 솔직할 수 있는 나이.

“데릭, 나는…….”

“힘들다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정말로.”

난처한 얼굴로 샬럿이 대답하기를 망설이자 데릭이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그 모습에 샬럿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좋아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예?”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뒤돌려던 데릭이 휙 다시 몸을 돌렸다.

“지금, 뭐라고…….”

“좋다고요. 같이 식사하자는 거죠?”

“그건… 그런데.”

조금씩 호감을 표하고 다가가는 그에게 늘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을 보였던 그녀였다. 이번에도 분명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긍정에 데릭의 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럼 일 마치고 제가 데리러 갈게요.”

“네. 그래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꼬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데릭이 재빨리 말했다. 미소 지은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네. 다 먹고 빈 그릇은 제가 주방에 갖다 놓을게요.”

“네!”

고개를 끄덕인 데릭이 드디어 등을 돌려 멀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응시하던 샬럿이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거절했어야 하는데 그의 표정을 보니 그러지 못했다.

쥐 죽은 듯 산 지 2년 3개월. 그 악몽에서, 그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는 조금 편해지고 싶다. 웃고 싶었다. 그러니 잠깐의 행복을 바라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

데릭과의 저녁 식사는 생각 외로 즐거웠다.

그가 데려간 곳은 조용한 레스토랑이 아닌 북적이지만 분위기 좋은 호프집이었다. 샬럿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이곳을 선택한 것 같았다.

사람을 접대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데릭은 말재주가 좋았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불편해 할 화제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친근감 있는 모습에 샬럿 또한 경계심을 내려놓았고,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해서 그때, 친구가 절 잡아 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니까요?”

“정말 그러네요. 많이 놀랐겠어요. 데릭.”

“말도 말아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등짝을 얼마나 때리던지…….”

“하하하.”

살짝 취기 어린 얼굴로 샬럿이 활짝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데릭이 일순 넋이 나간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멋쩍게 헛기침했다.

“그런데 세실은요?”

“네?”

“세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가족 이야기라든가, 일했던 이야기라든가.”

다가가기 많이 어렵거나 어두운 느낌이 아닌데도 그녀는 항상 어딘가 베일에 쌓여 있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남의 이야기에 잘 귀 기울여 들어 주고 친절하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느낌.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으니 내심 궁금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놀랐는지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던 샬럿이 눈을 내리깔았다.

“글쎄요.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아… 힘들면 안 해도 돼요. 미안해요.”

“아니요.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요. 뭘.”

급격히 가라앉은 공기에 데릭이 난처해하자 샬럿이 도리어 웃었다.

“가족은 저 포함 네 명이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언니.”

“‘이었다’는 말은……?”

과거형에 조심스레 물어보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이젠 없어요. 나 하나밖에.”

한 사람이 더 떠올랐지만 샬럿은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

데릭이 뒤늦게 탄식을 내뱉었다. 어째서 그녀가 과거 이야기를 잘 안 했는지, 때때로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입을 꾹 다물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동시에 죄책감에 기어 올라왔다.

“미안해요. 세실.”

“괜찮아요. 왜 미안해해요. 데릭이.”

“하지만…….”

“이젠 정말 괜찮아요. 오래전 일인걸요.”

손사래를 친 샬럿이 맥주를 한 잔 더 마셨다. 익숙지 않은 술이라 기침이 나왔다. 데릭이 등을 두드려 주려 팔을 뻗자 거절했다.

“유감이에요. 정말로.”

“괜찮아요. 무뎌지겠죠.”

애써 웃은 샬럿이 대답했다.

다행히 그 이후에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사적인 주제를 불편해한다는 걸 안 데릭이 자연스레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고, 샬럿 또한 언제 우울해했었냐는 듯 그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경청했다. 함께 하숙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 이야기라든가 현재 일하고 있는 잡화점, 수선집에 대한 이야기 등.

“오늘 즐거웠어요. 데릭.”

“저도요.”

샬럿을 문 앞까지 데려다준 데릭이 쑥스러운지 낯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괜찮다면 내일…….”

“데릭.”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말을 끊은 샬럿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든 데릭을 보며 신중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난 당신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요.”

“세실…….”

“어째서냐고 물어보지 말아 줘요. 나는…….”

말을 고르듯 침묵했던 샬럿이 이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더는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날 맨몸으로 그에게서 도망쳐 나오던 날 결심한 일이었다. 마지막 사랑이 그토록 처참하게 끝났는데 이제 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사랑은 상실이며 고통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러했다.

“미안하고, 고마워요.”

할 말을 잃어버린 듯 망연하게 서 있는 데릭을 일별하며 샬럿이 방문을 닫았다.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굳게 잠긴 방문 앞에서 멀거니 서 있던 데릭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과 멀어질수록 마음이 쓰라렸다.

잡화점에 들어온 날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묘하게 그늘지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가만히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로 우연인 것처럼 그녀의 곁을 뱅뱅 돌며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랬기에 데이트 신청을 받아줬을 때 뛸 듯이 기뻐했건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이대로 갑갑한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데릭은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긴장하느라 몰랐던 취기가 훅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그는 골목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해가 저문 술집가의 골목은 취기 나는 사내들과 매춘부와 약에 찌든 노숙자들로 가득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청년은 그들에게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가던 데릭과 누군가와 어깨가 맞부딪혔다.

“비켜.”

“뭐? 어린놈이!”

길을 막고 있어 툭 밀쳤을 뿐인데 부랑자 한 명이 바로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훅 풍기는 악취에 데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씩씩대는 부랑자 주위로 그의 동료가 몰려들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이 자식이 지금 날 쳤어. 죽으려고!”

“그래?”

험악해지는 공기에 취했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던 순간, 데릭의 얼굴로 주먹 하나가 날아들었다. 퍽,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데릭이 얼얼하게 부어오른 뺨을 움켜쥐었다. 이어 막을 새도 없이 발길질이 쏟아졌다.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는데, 갑자기 부랑자들의 비명이 좁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억!”

“아악! 뭐야, 이 자식은!”

“아아악!”

데릭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핏자국이 튀고 만신창이가 된 부랑자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이를 자비 없이 넘어뜨려 발로 명치를 가격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언제 사람을 무자비하게 팼냐는 듯 길고 단정한 손가락. 눈앞의 손을 잡자마자 데릭이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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