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64)

49.

신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잘 보이지 않아도 마음의 눈으로 알았다. 흐릿하지만 전신거울 앞에 선 딸이 마치 요정 같다는 것을.

“정말 예쁘구나, 샬럿!”

“참, 어머니도.”

“결혼이 벌써 내일이라니. 시간 참 빠르게 가는 것 같구나. 그렇지?”

“네. 그러게요.”

수줍게 눈을 내리깐 샬럿이 손끝을 만지작댔다. 그런 그녀의 뒤에 선 신시아가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른들이 너 어릴 때부터 예쁘게 생겼다고들 했지.”

“아니에요. 예쁘긴 언니가 더 예뻤죠.”

조금 흐려진 얼굴로 샬럿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가지만 않았어도… 아버지도.”

결혼을 앞두니 애써 잊고 지냈던 가족이 절로 떠올랐다. 실직하신 이후 폭력적이긴 했지만 술을 안 드실 땐 그래도 자상하셨던 아버지. 함께 침대와 이불을 쓰며 누구보다 절친했던 언니.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걸치니 때때로 미안했다. 그런 딸의 마음을 읽었는지 샬럿의 어깨에 손을 얹은 신시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샬럿, 내 딸.”

“…….”

“네가 잘 살면 돼.”

“어머니…….”

“그러면 된단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돌았다. 샬럿이 뒤를 돌았다. 마주한 모녀는 많이 닮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붉어진 샬럿의 눈 밑을 부드럽게 닦아 낸 신시아가 딸의 손을 잡았다. 감정을 추스른 샬럿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몸은 요즘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이 잘 봐 주셔서 괜찮아.”

“시력은요?”

“이 거리에서 너인 것을 알아볼 만큼은 보인단다. 콜록…….”

“괜찮으세요?”

“괜찮대도.”

잔기침을 멈춘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력이야 조금씩 나빠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실명한 것은 아니었다. 사물의 흐릿한 윤곽은 보일 정도. 종종 가구와 부딪히거나 넘어질 뻔하기는 하지만 옆에 사람이 있어 큰일은 없었다.

다음 순간,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인. 닥터 브렌트가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린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의아했으나 잠깐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마. 예비 신부로서 오늘 할 게 많잖아?”

다시 기침하는 신시아를 살짝 끌어안으며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녁 식사 때 뵈어요.”

증상이 많이 호전되긴 했으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폐렴은 부쩍 추워진 겨울에 언제든 재발할 수 있었다. 완치할 때까지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래.”

모녀가 마주 웃었다. 아직 불안한 신시아의 건강. 그것만 제외하곤 지금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지나가는 악마가 질투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젊은 나이에 비해 닥터 브렌트는 꽤 실력 있는 의사였다. 청진기를 뺀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심장박동은 좋군요. 몸은 어떠신가요. 부인.”

“네. 아주 좋아요. 날아갈 것 같은걸요. 요즘 좀 자주 졸리긴 하지만.”

침대에 앉아 두껍게 이불을 덮은 신시아가 화답했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눈발이 거세졌으니까요.”

“그럼요.”

대화중에도 창밖은 함박눈으로 가득했다. 매일 하인 두 명이 저택 주변에 쌓인 눈을 열심히 치워 저택은 깨끗했지만, 조금만 밖으로 벗어나도 소복이 내린 눈이 정강이까지 쌓였다.

“이건 앞으로 일주일치 약입니다. 안나에게 맡길 테니 늘 드시던 대로 드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따뜻한 물 많이 드시고 바깥바람은 되도록 많이 쐬지 마세요.”

“그럴게요.”

자리를 털고 일어난 브렌트가 왕진 가방을 집어 들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왔습니다. 선생님.”

“나갈게요.”

대꾸한 브렌트가 마지막으로 벗어 놓은 외투를 걸쳤다.

“문까지 배웅해야 하는데. 매번 면목이 없네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부인.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또 뵈어요.”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가려는 순간, 문고리를 잡은 브렌트가 고개를 돌렸다.

“맞다.”

“예?”

“수잔은 어떤가요?”

“아아. 선생님 소개였죠.”

수잔이라면 로즈가 발을 삐끗해 대신 들인 하녀였다. 안나를 비롯한 다른 고용인들이 고용주 내외의 결혼식을 앞두고 부쩍 바빠진 터라 꼭 필요한 일손이었다.

“요즘 제 시중도 들고 가사도 돕고 있어요. 능력 있는 분을 소개해 줘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살짝 굳어 있던 브렌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소개드리기 전에 신원을 더 자세히 조사했어야 했는데 워낙 경황이 없어서.”

“큰 사고를 당하고 기억까지 잃었으니 오죽하겠어요. 말수는 적지만 친절해서 좋아요.”

처음 가면을 쓴 여자를 봤을 땐 기겁했지만 얼굴에 큰 흉터가 있다는 말에 동정심이 올라왔다. 소개해 준 브렌트의 체면도 있고 해서 일단 들이자 했는데 수잔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었다.

“내 또래 같던데 대체 무슨 사연일지 많이 안타까워요.”

“곧 기억이 돌아오겠죠. 그럼 이만.”

묵례한 브렌트가 마저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 서 있던 수잔이 왕진 가방을 들어 주려 손을 뻗자 브렌트가 가방을 살짝 물리며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오늘은 배웅할 필요 없어요. 수잔. 부인 잘 부탁드립니다.”

“예. 선생님. 들어가세요.”

깍듯한 인사를 받은 브렌트가 뒤를 돌아 멀어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수잔이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에 문을 열자 침대에 앉은 신시아가 손짓했다.

“선생님은 잘 가셨나요?”

“예. 몸은 어떠세요.”

수잔은 조금 전까지 브렌트가 앉아 있던 머리맡 의자에 앉아 탁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빈 잔을 채워 신시아에게 건넸다.

“요새 날 걱정하는 사람들 덕분인지 한결 나아요.”

“그런가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낮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신시아에게 수잔이 능숙하게 알약을 건넸다.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물을 마신 신시아가 잔기침을 했다. 수잔이 등을 쓸어 주자 조금씩 잦아들었다. 더 이상 기침이 나오지 않게 되자 크게 숨을 고른 신시아가 웃었다.

“고마워요. 오늘은 저택이 조용하네요.”

“결혼이 코앞이니까요. 다들 예배당을 손보고 있어요.”

총괄 지휘를 맡은 안나부터 심부름꾼 소년까지 전부 내일 있을 결혼식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부인 샬럿은 장신구 문제로 시내에 나가 제냐 부인에게 하루 종일 붙들려 있을 예정이었고 리하르트는 오전 중에 모든 인가 작업을 마무리한 뒤 점심 즈음 돌아올 예정이었다.

“자식의 결혼이니 만감이 교차하네요. 수잔은…….”

길게 하품하며 말하던 신시아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뭔지 모를 끔찍한 일을 겪고 기억까지 잃어버린 사람 앞에서 자식 이야기를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뭐라 말을 이을지 머뭇거리는 신시아에게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아들?”

“그래.”

깍듯하던 존대가 어느새 반말로 바뀌었다. 기이한 변화에 신시아의 눈이 커지기가 무섭게 수잔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에 신시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너, 너는…….”

“오랜만이지.”

수잔, 아니 가면을 벗어 던진 제니스가 화상으로 일그러진 왼쪽 얼굴을 드러내며 웃었다.

“왜… 왜 여기에… 너……!”

윈클레 씨는 켄싱턴가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샬럿을 자신이 데려왔다고 했다. 대략적인 상황은 그에게 들었기에 제니스가 왜 이런 처참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났는지,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침대에서 일어선 신시아가 방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악!”

“너도 알잖아. 내 아들.”

고개를 기울여 처참하게 바닥에 쓰러진 신시아를 내려다보며 제니스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내 남편.”

“뭐……?”

충격에 몸이 굳은 가운데 신시아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눈앞의 여자, 제니스 브라운이 어딘가 이상했다. 눈에 초점이 흐렸고, 입가가 기괴하게 풀려 있었다. 아들과 남편을 겹쳐보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소름 끼치는 상황에 신시아가 바닥을 끌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서 누구를…….”

“네가 알 것 없어. 나는…….”

말하는 도중 입가를 실룩이며 제니스가 뇌까렸다.

“전부 되돌려 놓을 거야. 그러니까… 네년들만 없으면 돼.”

“아아악!”

“똑같이 잃으면 내게 돌아오겠지. 세이모어…….”

다시 머리채를 잡은 손이 거침없이 그녀를 끌어 올렸다. 기이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머리가 전부 뽑혀 버릴 것 같은 고통에 신시아가 몸부림쳤다. 소리 질러도 공허하게 울릴 뿐 아무도 듣지 못했다.

“이거 놔! 조금 있으면 윈클레 씨가…….”

“나도 알아. 곧 다들 돌아오겠지.”

복도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들렸다. 신시아가 입을 뻐금거렸다. 저항해야 하는데.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내일이면 우리 딸 결혼식인데… 샬럿. 도망쳐…….

그러나 턱 끝까지 올라온 목소리는 미처 발화되지 못했다.

“안녕. 신시아.”

기괴하게 웃은 제니스가 숨겼던 칼을 들어 그대로 신시아의 심장에 내리꽂았다. 문을 향해 뻗었던 손이 잠시 파들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거의 동시에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왔군요. 세이모어.”

단검을 뽑은 제니스가 그대로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축 늘어진 신시아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광경을 본 리하르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살인자의 두 손목을 잡고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한 제니스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윽!”

“지금.”

동굴 바닥을 긁어내리듯 낡고 스산한 목소리. 뒤통수를 잡은 손은 금방이라도 머리를 터뜨려 버릴 듯 위협적이었다.

“무슨 저지른 건진 아나.”

“세이모어…….”

제압당한 몸이 꿈틀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이름에 그가 눈썹을 좁혔다.

“미친 건가.”

“세이모어 나는…….”

헐떡이며 제니스가 갑자기 눈물을 쏟아 냈다.

“당신 대신 돈을 택하고 괴물을 낳았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조금 전 신시아의 심장에 내리꽂았던 단검을 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건… 그건 안 돼. 절대!”

그리고 다음 순간, 거침없이 스스로 제 손목을 그었다.

“아아아아!”

동시에 끔찍한 고통이 파고들어 입술이 떨렸다. 동맥까지 그어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몸을 내리누르던 압박이 순식간에 멀어지자 제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서 코를 막은 리하르트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둑한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졌다.

피.

오랜 기간 참고 있던 충동이 조롱하듯 밀어닥쳤다. 급하게 뒷걸음질 쳤으나 코를 간질이는 피 냄새에 손등위로 흰 뼈가 불거졌다.

갈증에 숨이 가빠 왔다. 황급히 일어나 나가려는데, 어느새 기어와 발목을 부여잡은 제니스가 저주를 걸듯 속삭였다.

“마셔.”

“…….”

“내가 낳은 괴물, 그게 너잖아.”

마주한 흰자가 점점 새빨개졌다. 간신히 본능을 억눌렀다. 리하르트는 발목에 무거운 추를 단 듯 힘겹게 걸음을 옮겨 문손잡이를 잡았다.

이 문만 나가면.

“아니면…….”

깔깔 웃은 제니스가 아직 굳지 않은 신시아의 몸을 끌어와 마찬가지로 손목을 그었다. 채 응고되지 않은 피가 창백한 육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헤겔의 피가 좋은가?”

인내는 끊어졌다. 달려드는 괴물을 향해 제니스는 기꺼이 웃었다.

***

장신구를 고르고 온 샬럿이 귀가한 건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저택에 발을 딛는 순간, 평소와 다른 침묵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발끝에서부터 그녀를 죄어 왔다.

“엄마……?”

숨을 가다듬으며 계단을 오른 샬럿이 천천히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바닥 전체를 흥건히 적실 정도로 가득한 피. 시체가 되어 늘어진 두 여자. 그리고…….

포식을 마치고 제 손목에 묻은 피를 핥아 먹는 남자.

“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건 뱀의 눈이었다.

“아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두려움, 분노, 슬픔. 전신을 강타하는 충격에 샬럿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시체를 놓은 괴물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

오지 마……!

샬럿의 동공이 뒤집혔다. 그대로 그녀는 정신을 놓고 쓰러졌다.

그렇게 의식을 잃은 샬럿은 일어나지 못했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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