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64)

48.

“…….”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침묵한 샬럿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와중에도 제냐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정말 부러워요. 아가씨. 그렇게 관대하고 부유한 분과 결혼하시다니.”

조금 외지긴 하나 마을과 떨어져 있어 사생활이 보호될뿐더러 주위 풍경이 더없이 아름다운 저택. 가구들은 죄다 장인들의 손이 닿은 고급 장미목재였고 벽에 걸린 그림 한 점 한 점이 전부 모조가 아닌 진품이었다. 복도 장식장 위에 놓인 사기그릇이며 유리 인형도. 품격도 있을뿐더러 저택 전체가 우아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바닥에서 귀족들을 상대하며 진품과 고급품에 대해 빠삭한 그녀였다. 진귀한 물건을 알아보는 식견은 쉽게 따라할 수도, 배울 수도 없었다. 수십 년 치열하게 경쟁하며 에셀우드의 중심에서 살아남은 그녀조차 간신히 얻을 수 있던 게 아닌가. 그런 그녀가 봤을 때 리하르크 윈클레란 남자는 그럴 듯한 벼락부자가 아닌 ‘진짜’였다.

분명 그는 마흔 언저리의 귀족일 것이다. 신부가 조금 어려 보이기는 하나, 열 살 스무 살 나이차 나는 성혼이 에셀우드에서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일단.”

생각을 정리했는지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든 샬럿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이와 이야기를 좀 하고. 그 뒤에 얘기 나눠도 될까요?”

그와 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아주가 아니라 아주아주 많이.

심상치 않은 표정에 그제야 입을 다문 제냐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냐를 보내자마자 샬럿은 그대로 2층으로 향했다.

“리하르트!”

덜컥 열린 집무실 문 너머로 들이닥친 방문자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노크도 없이 들이닥치는 건 무슨 경웁니까.”

잉크를 묻히던 펜촉을 내려놓으며 리하르트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망명 절차가 생각보다 까다롭고 작성해야 할 서류가 많았기에 벌써 몇 시간째 기지개 한번 펴 보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는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우느라 잠도 부족한 상태였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누르는 리하르트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샬럿이 허리에 두 팔을 얹었다.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

“갑자기 웨딩드레스니 뭐니… 대체 무슨 말인지 도저히…….”

무섭게 말을 쏟아내던 샬럿의 목소리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던 리하르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든 순간부터였다.

“겨우 그거 때문인가.”

“…….”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마호가니 책상을 돌아 샬럿에게 다가갔다.

“어처구니없군.”

“아!”

벗어날 틈도 주지 않고 두 팔을 뻗은 리하르트가 샬럿을 책상과 자신 사이에 가두었다. 그런 다음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턱을 쥐고 속삭였다.

“놔, 놔주……!”

“생각해 봐요. 네가 내 밑에서 앙앙댄 게 벌써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을 텐데.”

“…….”

“내 허리에 다리를 두르고 더 해 달라고 애원하던 주제에 이제 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날것 그대로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리하르트는 눈 하나 깜짝 않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제대로 잠을 못 이뤘는지 거뭇해진 눈 밑. 날렵한 턱에 조금 돋아난 수염과 평소와 달리 쇄골이 언뜻 보일 정도로 풀어진 셔츠. 훅 들이닥친 수컷의 체취에 옴짝달싹 못하고 굳은 샬럿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책상을 짚던 손이 서서히 허리로 올라왔다. 코와 코가 맞닿고 팽팽히 당겨진 공기가 극에 달할 즈음, 샬럿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그래도…….”

“…….”

“제대로 된 프러포즈도 없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하는 결혼은 싫었다. 어릴 적 꿈꿔 왔던 동화 속의 결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읏……!”

머뭇거리는 순간 고개를 숙인 그가 입술을 덮쳤다. 허락을 구하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거침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응, 읏……!”

갑작스러운 기습에 샬럿이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뭔가를 손에 들었다. 뭔지 볼 새도 없이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조금의 공간도 없이 가녀린 여체를 더 가까이 휘어잡아 책상 위에 눕혔다.

“아!”

딱딱한 나무가 등에 닿는 것과 동시에 서류가 차르르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샬럿이 손을 뻗자 그 손등을 감싸 쥐며 리하르트가 잠시 입술을 뗐다. 그로 인해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읏, 하…….”

헐떡이는 샬럿의 눈에 오만하게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비쳤다. 조금 전까지 일하던 책상 위로 연인을 눕힌 그는 높은 권좌에 앉은 폭군처럼 위압적이고 흉흉했다.

달칵, 뭔가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뚫어져라 직시하며 리하르트가 무언가를 물었다. 무엇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샬럿의 왼손이 들렸다.

“무슨, 무슨 짓을…….”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대로 그가 그녀의 약지를 삼켰다. 뜨겁고 말랑한 입 안의 감촉. 능숙한 혀 놀림. 손끝에서부터 찌릿한 전기가 올라오는 느낌에 샬럿이 뻣뻣하게 굳은 순간이었다.

“…아!”

잘근잘근 씹어 먹히는가 싶었던 손이 풀려나고, 약지에 끼어진 건 우아한 백금 반지였다. 혹시 몰라 그가 다시 보관하기로 했던 다이아 반지였다.

“샬럿.”

“…….”

“나와 결혼해요.”

치맛자락 안쪽으로 손이 조금씩 올라왔다. 허리를 숙여 얼굴을 바싹 들이댄 리하르트가 속삭였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

샬럿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답이 늦어질수록 자주색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졌다.

거절한다면 신시아의 목줄을 틀어쥘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가져온 짐이니까. 발목 힘줄을 하나쯤 끊어 놓는 것도 괜찮았다. 필요하다면 두개 다.

“좋아요.”

생각이 극단으로 치달은 순간, 샬럿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답지 않게 놀라 굳은 리하르트를 꼭 안은 샬럿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승낙했다.

“결혼해요.”

원하던 로맨틱한 프러포즈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잠자리에서조차 제 감정을 쉬이 드러내는 법 없던 남자였다.

필요하다.

명료했으나 확실히 귀에 와 박혔다. 그동안 남몰래 가슴 졸이고 초조해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 아닌가.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말 또한 들을 수 있으리라.

“사랑해요.”

그러니 지금은 그녀가 양보하기로 했다. 그를 더 바짝 끌어당긴 샬럿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리하르트.”

그와의 관계는 늘 불공평했다. 하지만 이 불공평한 관계에서 몇 번이고 벗어날 기회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도망치지 않은 건 그녀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감내해야 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잔인한 남자를.

샬럿이 청혼에 승낙한 순간부터 모든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저택 근처에 있는 오래된 예배당을 깨끗이 청소한 뒤 개조하고, 정식 신부를 초청해 확답을 받았다.

두 사람의 성혼을 지켜볼 하객이자 증인도 벌써 정했다. 신시아와 루이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찾아왔을 때 샬럿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고맙긴요. 그만큼 대가를 받았는데요.”

샬럿의 인사에 루이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그녀가 먼 길을 달려온 건 샬럿을 드누아 가문의 일원으로 편입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상류층의 몸가짐과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드누아 백작이 죽자 유산을 물려받을 남자 친척이 없어 루이스는 미혼의 몸으로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반년 전, 리하르트에게 후원받은 자금을 밑천 삼아 눈여겨보던 상단에 투자했고, 큰 성취를 거둬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그렇게 입지를 다져 가던 중, 이번에도 리하르트가 느닷없이 또 다른 제안을 해 왔다. 그는 루이스에게 샬럿을 드누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줄 것과 그녀에게 상류층의 예절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했다. 그 대가로 카티아 사교계에 소개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카티아 사교계는 에셀우드보다 혈통과 계급을 중요시하여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한번 발을 들이면 인맥이 보장되어 있기에 그의 제안은 세를 넓혀 가는 루이스에게 아주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리하르트의 철저함에 질려 하면서도 루이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3주밖에 안 지났는데도 벌써 어엿한 귀족 영양 같아요.”

“과분한 칭찬이세요. 루이스.”

수줍게 대답하는 샬럿을 보며 루이스가 미소 지었다. 그간 자신이 그러했듯이 그녀에게도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불과 몇 개월 전에는 몰락해 가는 한낱 남작 영애한테도 깍듯하게 아가씨라 부르며 존대했던 소녀. 잔뜩 움츠린 작고 연약한 동물 같았던 소녀가 지금은 놀랍게도 당당하고 우아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한때는 희미한 미련에 질투했던 상대지만 지금은 열의 있는 학생이자 사촌이 된 그녀에게 애정을 느꼈다.

“결혼이 벌써 일주일 남았는데, 기분이 어때요?”

“많이… 설레요.”

뺨을 붉힌 샬럿이 미소 지었다. 기대와 설렘, 행복으로 가득한 예비 신부를 보며 루이스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죠.”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에 들어온 건 안나였다.

“클리트우드 부인이 가봉을 해야 한답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본 루이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짐은 아침 일찍 꾸려 놓았고 현관홀 앞에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결혼식 날 봐요. 샬럿.”

“네. 들어가세요. 고마워요. 루이스.”

인사를 마치고 다른 하녀의 배웅을 받아 저택을 나오자 찬바람이 루이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마차에 올라타 긴 숲길을 내려가는데, 맞은편에서 마차 한 대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좌석에 앉은 두 사람이 보였다. 마주 앉은 한 남자와 여자.

그 짧은 시간에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여자 쪽이었다. 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의아함에 마부석 창을 두드리자 채찍을 휘두르던 마부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스쳐 지나간 저 사람들은 누군가?”

“아마 의사 선생님일 겁니다. 노부인이 아프시거든요.”

“그럼 여자는?”

“아.”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하던 마부가 이내 대답했다.

“어제 잡일 하녀 하나가 발목을 삐끗했답니다. 일손이 궁한 가운데 브렌트 선생이 대타를 데려온다 했는데, 아마 그 사람인가 보군요.”

“…그런가.”

금세 궁금증이 해소된 루이스가 다시 차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점점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데 무언가 창문을 때렸다. 눈비가 섞인 진눈깨비였다. 가루처럼 흩날리던 그것은 순식간에 굵어졌다. 하늘로 시선이 올라갔다. 맑고 깨끗했던 게 언제냐는 듯 서서히 어두운 구름이 모여 우중충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폭설이 내릴 것 같았다. 아주 지독한. 목덜미를 파고드는 한기에 루이스는 어깨 위로 걸친 숄을 바싹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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