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64)

47.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왕진 가방을 고쳐 잡았다. 다가온 여자가 텅 빈 손 쪽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복장을 보아하니 마중 나온 여자는 하녀인 듯했다.

“닥터 브렌트시군요.”

“네. 처음 뵙습니다. 그쪽은?”

“안나 스콧입니다. 선생님. 그냥 안나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지요. 안나.”

악수를 끝낸 브렌트가 뒤이어 주위를 훑었다.

“평생 이곳에서 살았지만, 여긴 처음 와 봅니다.”

“그러시겠죠. 내내 비어 있었으니까.”

새하얀 자작나무 숲에 에워싸인 저택은 흰 암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어딘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요정의 은신처 같다고나 할까.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없었다. 문이 항상 굳게 잠겨 있기도 했고, 어릴 적부터 괴물이 산다는 어른들의 으름장을 듣고 자라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 전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식에 누가 사는지 궁금했다.

“제가 돌볼 환자는 어떤 분이시죠?”

“이제 막 쉰에 접어든 노부인이세요. 두어 달 정도 계실 거고 그동안만 일주일에 이삼 일 오셔서 진료하시면 됩니다.”

“성함은요?”

“신시아. 그냥 신시아 부인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성씨를 알려 주지 않는 걸 보아 자세히 설명할 마음은 없는 듯 보였다. 궁금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뭐 어떤가. 어차피 왕진료는 이미 선불로 두둑이 받았는데.

브렌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장선 안나가 현관홀을 지나 2층 끄트머리에 위치한 침실로 안내했다. 이제 문을 여나 싶을 때 뒤를 돈 안나가 당부했다.

“부인께서는.”

“…….”

“눈이 잘 보이지 않으세요.”

비전염성 폐렴에 시력 저하라.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아예 사례가 없지는 않았기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꽤 권세 있어 보이는 인맥을 만들 기회라는 것이 중요했다. 젊은 패기로 무장한 브렌트가 눈을 반짝였다.

“알았습니다. 윈클레 씨는 진료 끝나고 뵐 수 있을까요?”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요새 워낙 바쁘셔서.”

“그럼 그 부인이라도.”

“…글쎄요.”

대답을 피하듯 노크를 한 안나가 들어오라는 허락에 곧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마차는 항상 보내 드릴 테니,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부인을 진료하시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요컨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다 가라는 이야기였다. 당황한 브렌트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대화가 끊기고 조용히 문이 열렸다.

외지인 부부가 오면서 고요했던 자작나무 숲 속 사유지에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신시아의 진료를 맡게 된 왕진 의사부터 시작해 요리사와 조수, 심부름꾼 소년과 아랫마을에서 식료품을 조달하는 동네 청년, 잡일꾼 두 명, 청소와 빨래 등 가사를 도맡은 아주머니 두 명.

텅 비어 있던 곳에 사람들이 모이면 활기를 띌 법도 하건만 이곳만은 예외였다. 횅댕그렁했던 공간에 사람 냄새가 나면서 황량함만 없어졌다 뿐이지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들뜨거나 소란스러운 분위기보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조용한 공기가 저택 안팎을 채웠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첫날부터 당부받는 기이한 수칙 때문이었다.

고용주 내외를 보면 시선을 내리깔고 침묵할 것.

그들이 말을 걸기 전엔 먼저 입을 열거나 함부로 쳐다보지 말 것.

마차 안에서 상념에 젖어 있던 브렌트의 손등을 누군가 콕 눌렀다.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 로즈였다. 마침 일이 끝났다기에 같이 타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손수건에 싼 간식을 내밀었다.

“하나 들어요. 배고플 텐데.”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내가 감사하죠. 이렇게 마차도 얻어 타고.”

사람 좋게 웃은 로즈가 뒤이어 물었다.

“그런데 뭘 그렇게 멀뚱히 생각해요, 선생?”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브렌트가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

“그것도 비밀?”

건포도를 씹으며 로즈가 차창의 커튼을 착 걷었다. 바깥은 온통 순백의 세상이었다.

“선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여기 좋아요. 처음 일을 제의받았을 때는 보수도 두둑하겠다 일도 할 만하겠다 솔직히 뭐라도 문제 있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고. 까다롭게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쉬는 시간도 확실하게 주고. 그놈의 비밀이 많아서 문제지만.”

지금 마을에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죄를 짓고 도망치는 부부다, 남자가 여자를 납치했다, 아니다, 사실은 두 남녀가 부부가 아니고 야반도주한 젊은 연인이 아니냐 등등.

처음엔 터무니없다 생각했던 브렌트는 슬슬 마지막 가설도 일 리 있겠다 싶었다. 벌써 보름이 지났는데도 저 폐쇄적이고 아름다운 저택에 사는 부부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없었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아주머니.”

뜸을 들인 브렌트가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윈클레 씨를 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돌아온 대답에 실망하고 있는데 그 뒤를 잇는 말에 브렌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런데 릴리는 본 적 있다고 했어요. 윈클레 부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던데.”

“부인이요?”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드문 미인이라대. 검은 머리에 초록 눈동자. 나이는 젊어 보였다고.”

“윈클레 씨는요?”

“같이 없었대요. 그런데… 나 참, 아직 미혼인 선생한테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깔깔 웃은 로즈가 상체를 숙여 귓속말하는 시늉을 했다. 얼결에 그녀의 입 가까이 귀를 갖다 댄 브렌트의 얼굴이 뒤이어 새빨개졌다.

“매일 아침 청소하려 들어가면 부부 침실 침대 시트가 엄청 흐트러져 있대요. 부인도 피곤해 보이고.”

그런 거 보면 확실히 납치한 건 아닌 거 같아, 그렇죠?

능청스럽게 덧붙인 로즈가 마지막 건포도를 입에 넣는 순간이었다.

“히히힝!”

“워워!”

흥분한 말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마부가 급하게 고삐를 끌어당겼다. 반동에 휘청거린 두 사람이 간신히 중심을 잡았을 때, 뭐에 놀랐는지 마부가 빠르게 자리에서 뛰어내려 말 앞으로 향했다. 이어 사색이 된 얼굴로 갑자기 돌아오더니 급하게 차창을 두드렸다.

“닥터 브렌트!”

그가 문을 열자 혼비백산한 마부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웬 여자가 달려들었어요. 그런데 상태가……!”

놀란 브렌트가 빠르게 옆자리에 놓인 왕진 가방을 집어 들었다.

***

“숨은 자연스럽게 들이쉬시고 어깨에 힘을 푸세요. 아가씨.”

이어진 지시는 간단하면서 명료했다. 오랜 경력의 의상실 원장다웠다. 저도 모르게 움츠린 샬럿의 어깨를 등 뒤의 재봉사 한 명이 바로잡았다.

“좋아요. 허리를 꼿꼿하게 펴시고. 그래야 치수가 더 정확히 나와요.”

상대의 미소에 샬럿이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녀는 눈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얇은 슈미즈 차림이었다. 모처럼 넓은 침대에서 홀로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식사 다 하셨냐는 안나의 물음에 다했다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낯선 여자 네 명이 들이닥쳤다. 놀라서 반응할 새도 없이 그들은 자리를 잡더니 그녀의 몸 구석구석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고생하셨어요!”

겨우 끝났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1층의 티 룸으로 이동을 하자는 말을 들었다. 티 룸에 들어서자 재봉사들을 내보내고 마주 앉은 여자는 스케치된 종이들을 촤르르 펼쳐 보였다.

“오는 내내 스케치를 했어요. 직접 뵙고 치수를 재기 전엔 물론 쉽게 재단하면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원장, 제냐는 어제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를 떠올렸다.

[클라리체 의상실, 제냐 클리트우드 부인께.

백지수표를 먼저 보냅니다. 원하는 만큼 적어도 좋아요.

리하르트 윈클레]

유려한 글씨체로 짤막하게 쓰여 있던 단 한 장의 의뢰서.

보통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의뢰. 외곽 귀족의 의뢰였지만 백지수표를 은행에 가져가 진짜임을 확인 한 순간, 그녀는 다른 일은 미뤄 두고 급하게 여장을 꾸렸다. 야심가로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눈앞의 고객은 정말 오랜만에 굴러떨어진 황금이었다. 그간 꿈꿔 온 드레스를 비용 걱정 없이 만들 수 있는 기회.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 다른 의상실에 감히 맞먹을 생각도 하지 말라 경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목이 길고 쇄골이 도드라지시니 데콜테 라인을 좀 더 깊이 파고, 날씬한 허리를 강조하는 드레스가 아가씨께 가장 좋을 것 같아요. 당연히 치맛단에는 꽃을 수놓고 진주로 장식하면 더 환상적이겠죠? 물론 이브닝드레스는 이보다 더 고혹적으로…….”

신난 제냐의 입에서 모르는 용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럴수록 샬럿의 표정은 점점 애매해졌다. 대충 드레스에 관한 이야기인 줄은 알겠지만 이른 아침부터 시달린 터라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리하르트, 그가 얼마 전 무심하게 드레스 탬플릿을 추리라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당분간 입을 옷을 사라는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대체 몇 벌을…….

조금 불편해 보이는 얼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잠시 말을 멈춘 제냐가 영업용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띠우며 물었다.

“아. 혹시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이해해요. 아직 에셀우드는 순결함과 소녀스러움이 강조되는 하이웨스트 라인 웨딩드레스가 유행이죠. 하지만 제 생각엔 그래도 머메이드 라인같이 늘씬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분명 아가씨와 어울릴 것 같…….”

“잠, 잠시만… 잠시만요!”

휘황찬란한 단어에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만있다가 또다시 장장 한 시간을 시달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두 손을 들어 간신히 말을 막은 샬럿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죠? 아까부터.”

“네?”

“무슨… 드레스요?”

“아!”

그랬구나! 결론 내린 제냐가 손뼉을 쳤다.

“웨딩드레스요! 제일 먼저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해요. 너무 경우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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