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64)

46.

“샬럿.”

그리운 목소리에 샬럿은 잠에서 깨어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온몸이 개운한 느낌. 제일 먼저 등에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잠들 때는 분명 마차 안이었는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높은 천장이 보였다. 그녀가 누운 곳은 새하얀 휘장이 둘러진 캐노피 침대였다. 발치에 와 닿은 햇빛을 본 순간 별장이구나 직감했다. 이어 샬럿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머리맡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을 마주친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일어났구나.”

“엄마!”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신시아였다.

“여긴 어떻게……?”

“네 남편 될 남자가 며칠 전 날 이곳으로 데려왔단다.”

남편 될 남자. 리하르트였다. 하지만, 어떻게? 어느 틈에?

“연인이 있었으면 진즉 말하지 그랬어. 깜짝 놀랐잖니.”

경악한 샬럿을 앞에 두고 신시아가 옅게 웃었다. 이어 손을 뻗었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샬럿이 있는 자리를 찾듯 허공을 더듬거렸다. 그녀의 손을 잡은 샬럿이 설마 하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어, 엄마 혹시 눈이…….”

“아. 놀랐겠구나.”

간만에 잡은 딸의 손을 꽉 쥔 신시아가 차분히 해명했다.

“그간 말 안 했지만, 몸이 안 좋아지면서 왠지 모르게 시력이 조금씩 나빠졌단다.”

말이 이어질수록 샬럿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제야 설명이 됐다. 그녀가 종종 유리잔을 깨뜨리던 것도, 저녁에 잘 넘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로지 리하르트에 정신을 빼앗겨 눈치채지 못했다.

“저는, 저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샬럿을 위로하듯 신시아가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시력은 살릴 수 없다지만 뭐 어떠니. 네가 좋은 남편을 만나 호강할 걸 생각하니 행복하구나. 미스티무어 홀에서 계속 신세지는 게 죄스러웠는데 날 이렇게 챙겨 주고.”

“…그분이 누군지는 아세요?”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리하르트에게 더 물어보지 못한 건, 신시아가 그를 몇 년 전 식민지 섬에서 죽었다고 굳게 믿고 있어서였다. 어머니의 충격도 걱정이지만 무엇보다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는 그에게 미안해서.

“알다마다.”

고개를 끄덕인 신시아가 밝게 대답했다.

“카티아에서 무역업을 하는 리하르트 윈클레 나리가 아니니.”

내가 모셨던 도련님과 이름이 같아서 더 정이 가더구나. 예의도 바르고 선량한 청년 같았어.

덧붙이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헤겔 부인, 마님. 나리께서 아침 드시러 내려오시랍니다.”

안나였다.

차려진 아침은 간소하면서도 영양가가 풍부했다. 신선한 우유와 스크램블 에그, 베이컨, 푸딩. 눈이 침침한 신시아를 위해 안나가 식사 내내 시중을 들었다.

“이렇게 나를 챙겨 줘서 고마워요. 윈클레 경.”

“편하게 리하르트라 부르셔도 됩니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되나…….”

“곧 가족이 될 사이니 어렵게 대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샬럿은 어머니와 리하르트의 대화를 반쯤 감탄하며, 반쯤은 황당해하며 들었다. 물 흐르듯 이어진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했고 자연스러웠으며 가벼운 애정마저 느껴졌다.

어머니를 깍듯하게 대하는 리하르트에게 감사함과 존경심을 느끼다가도, 한편으로 저 완벽한 가면이 감탄스러우면서 황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긴 식탁의 상석에 앉은 남자는 대화를 이어갔고, 우아한 손길로 베이컨을 자르며 재차 권했다.

“샬럿과 식후엔 간단히 산책을 할 생각인데, 같이 가시죠.”

“아니요. 권유는 고맙지만 오늘은 좀 졸려서요. 내일은 어떨까요?”

“정 그러시다면 더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느덧 신시아의 잔이 비었다. 눈치 빠른 안나가 일어나려는 노부인을 부축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마찬가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리하르트가 샬럿에게 손을 내밀었다. 샬럿이 얼결에 맞잡자 강한 힘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숲속에 있는 아담한 집답지 않게 뒤뜰에는 작은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눈이 내려 언 땅 위로 포슬포슬한 눈이 덮여 있었다. 새하얀 눈을 밟으며 흰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자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

더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외지고 아름다운 곳. 마치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들었다.

내쉬는 숨마다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샬럿이 찬 손바닥을 맞비비자 장갑을 벗은 리하르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제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차가운 체온과 더불어 따뜻한 온기가 살갗에 닿았다. 목덜미부터 슬그머니 오르는 미열에 푹 고개를 숙인 샬럿이 먼저 운을 뗐다.

“감사해요.”

“뭐를.”

“어머니요. 챙겨 주실 줄 몰랐어요.”

코를렌 섬을 잠시 떠났던 거 사실 그 때문이었죠? 확인하고 싶었지만 샬럿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작은 조각을 알게 된다 해도 어차피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했다.

언젠가 어느 호텔에서 안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백작님은…….’

‘글쎄요. 자세한 건 저도 알지 못해서…….’

시선을 피한 안나를 보며 샬럿은 대강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나고 자란 가문과 척을 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신기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절대 자신의 특권을 손에 놓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대체 어떤 각오로 그녀를 데리고 백작가를 등진 건지. 이뤄 놨던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그녀를 선택했는지.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입에 담는 순간 사르르 녹아 없어져 버리는 달콤한 샤베트처럼.

분에 넘치는 행복 같아서 두렵다가도 할 수 없이 기뻤다. 얼마 전만 해도 그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떠나려 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얄팍하고 이중적인 여자인 게 스스로 부끄러웠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저는.”

복잡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작은 손을 힘주어 잡은 그가 멈춰 서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보는 순진한 눈을 내려다보며 흘러내린 샬럿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손길과 달리 입술 새로 흘러나온 말은 신랄했다.

“그 되도 않는 머리를 쓸데없이 굴리지만 않으면 돼.”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미소는 흉흉했다. 오롯이 둘만 있는 공간. 단번에 역전된 공기에 샬럿이 뻣뻣하게 굳었다. 쉿. 뭐라 변명하려는 샬럿의 입을 검지를 세워 막은 그가 이어 말했다.

“편지는 잘 읽었어요. 떠나는 와중에 꽤 신경 써 줬던데.”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말이야.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건……!”

“마중 나올 남자가 있었나?”

말해 봐요.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현혹하듯 매끄러운 어조에 샬럿이 세게 고개를 저었다. 금세 창백해진 안색에 동정심이 생길 만도 하건만, 마주한 눈은 차게 식어 있었다.

혹시 모를 샬럿 헤겔의 또 다른 남자. 눈 뒤집고 사람을 시켜 샅샅이 뒤져 봐도 보이지 않았다. 잡으면 보는 앞에서 범하고 그 남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울며 절망하는 얼굴을 떠올리니 배에서처럼 또 다시 기갈이 일었다. 팔을 뻗는 순간, 다른 쪽 손등이 따끔했다.

“너무해요.”

손톱으로 그의 손등을 찍고 억지로 손을 빼낸 샬럿이 등을 홱 돌렸다.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런 사람.”

조금 전의 공포심을 뛰어넘는 억울함과 분노가 그녀를 휘감았다.

정조를 의심받다니!

“주변에 이성이 많은 건 제가 아니라 당신 아닌가요?”

열거하려면 당장 몇을 댈 수 있었다.

키아라 스펜서, 루이스 드누아, 그리고 예의 배에서의 여자.

또 백작 부인의 초대를 받아 왔으면서도 그를 찾아 아닌 척 시선을 두리번거리던 젊고 예쁜 귀족 아가씨들.

“있지도 않은 가상의 남성 때문에 화를 내시는 거라면 저는……!”

등 뒤에서 휙 허리를 잡혀 끌어안긴 건 그때였다. 깜짝 놀라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도 소용없었다. 양보라고는 태어날 때부터 결여된 것 같은 사람이었다.

결국 포기한 샬럿이 몸에 힘을 풀었다. 무반응으로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말캉한 여체를 품에 안고 정수리에 턱을 댄 리하르트가 속삭이듯 물었다.

“질투해요?”

“…….”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솔깃했다. 반응하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호기심에 목 안이 간질거렸다. 등에 넓은 가슴이 닿자 뒤늦게 샬럿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넉넉한 외투의 단추를 풀고 그녀를 품 안에 안은 탓에 남이 보면 한 몸처럼 딱 붙은 모습이었다.

“안 궁금한가요?”

고개를 숙인 리하르트가 귓가에 속삭였다. 입김이 닿은 귓바퀴에 화르르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의 품 밖은 추운데 맞닿은 부분은 뜨거웠다.

“뭐, 뭔데요.”

대답하기가 무섭게 어깨를 잡혀 뒤돌려졌다. 뒤이어 마주한 낯에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여전히 마주 바라보기 힘든 미모였다.

사방을 에워싼 흰 눈이 특유의 차갑고 고결한 분위기를 더 도드라지게 했다. 휘황찬란한 수식어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표시를 해요.”

잠시 넋을 잃은 사이 타이를 푼 리하르트가 제 목덜미를 내보였다.

“네……?”

“깨물거나 핥거나 빨아요.”

“…….”

어안이 벙벙했다. 샬럿이 귀를 의심한 순간 그가 쐐기를 박았다.

“셋 다 해도 좋고.”

말을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당황한 샬럿과 달리 제 것이라 표시하라고 목덜미를 드러낸 남자는 더없이 태연한 낯이었다. 뒷걸음질 치자 물러선 만큼 그가 다가왔다.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털썩, 주저앉은 샬럿의 앞에 무릎을 접은 리하르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니면 내가 할까.”

“…….”

“그걸 원해요?”

한다고 하면 정말 하고도 남을 남자였다. 뒤늦게 정신 차린 샬럿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춤주춤 그의 목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홀린 듯 입술이 차가운 목에 닿은 순간, 그가 배부른 짐승처럼 낮게 웃었다. 허리를 감싼 손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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