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64)

44.

세오렌 홀은 고요했다. 한 사람이 거짓말처럼 증발한 것 외에는.

핀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낯익은 얼굴을 찾았다.

“안나.”

“핀?”

“잠시 시간 있어요?”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주방 심부름꾼 소년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핀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으슥한 계단 밑으로 손짓했다. 안나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뭔데?”

“이거 리하르트 나리 방문 밑에 좀 넣어 줘요. 오늘 청소 담당이잖아요. 그쵸?”

“…….”

“부탁이에요. 별일 없을 거예요.”

뜬금없는 부탁이었지만 거절할 수도 없게 눈빛이 절실했다. 예상 가는 것이 있었다.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접힌 편지를 품에 넣기 무섭게 현관홀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제니스의 목소리였다. 그쪽으로 가자 잠시 섬을 떠나 있었던 리하르트 켄싱턴이 서 있었다.

장갑과 코트를 벗은 그가 마중 나온 제니스에게 외투를 맡기더니 주위를 슥 훑었다. 일순 안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찰나였다.

계단을 오르는 그를 따라가며 제니스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돌아오셔서 많이 피로하지 않으신가요? 목욕물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백작님은.”

“잠시 출타 중이십니다. 마님과 산책에 나가셨어요.”

“유감이군.”

“예……?”

“안나 스콧.”

분위기가 얼어붙은 사이 빠르게 계단을 오른 안나가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제니스를 힐긋 일별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샬럿 헤겔은?”

고개를 숙인 안나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쫓겨났습니다.”

“안나!”

“어떻게.”

급작스러운 연인의 소식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높낮이 없고 평이한 목소리였다. 안나의 입을 틀어막으려 제니스가 달려드는 순간, 그들의 뒤로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어린 하녀의 비명이 현관홀을 울렸다.

“꺄아아아악!”

“세상에……!”

마부가 마차 안에서 질질 끌어 내린 건 포대 자루였다. 정확히는, 포대 자루를 뒤집어쓴 피투성이 남자.

끅, 끄윽… 하고 신음을 토한 덩어리가 고통스럽게 바닥에서 꿈틀댔다. 그 모습에 감히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광경에 제니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 대체…….”

“모르는 척하다니. 꽤 매정한데.”

“리하르트님……!”

“너무 멀리 있어 그런가?”

희게 질려 벌벌 떠는 얼굴을 내려다본 리하르트가 마부를 향해 고갯짓했다. 지시를 받은 마부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포대 자루를 질질 끌고 계단 앞까지 왔다. 검붉은 피가 지나온 길에 죽 묻어 흡사 지옥으로 가는 입구를 연상케 했다.

“아는 얼굴이잖아, 응?”

마부가 포대 자루를 풀었다. 드러난 머리칼은 분명 눈에 익은 색이었다. 샬럿 헤겔을 덮친 남자. 제니스가 이용하고 버렸던 남자.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듯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처참한 몰골이었다.

“리하르트 님……!”

바짓자락을 잡은 제니스가 뭐라 입을 열려 했으나 리하르트의 눈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성이나, 설득, 애원으로 어떻게 될 상대가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스산한 공기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마주한 건 잔뜩 굶주렸다가 이제 막 피로 목을 축인 맹수였다.

“이제 삼자대면을 해야겠지.”

그가 웃었다.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듯한 난폭한 미소였다.

“백작님을 모셔와.”

“예.”

마부, 아니 카를이 대답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리하르트.”

“오셨군요.”

묻는 목소리가 충격과 분노에 떨렸다. 급한 일이라고 해 다급히 돌아온 별장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시선 닿는 곳 전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팽팽한 공기로 에워싸여 있었다.

유령이라도 마주한 듯 얼어붙은 고용인들. 흰 대리석 바닥에 선명하게 새겨진 핏자국과 그 끝에 널브러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루.

끔찍한 고통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그 안에서 나는 것을 그는 분명 들었다. 충격을 다스릴 새도 없이 옆으로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아…….”

“클로에!”

비명도 없이 혼절한 아내를 붙잡은 세이모어의 눈에 이어 계단참에 주저앉은 한 여자가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그는 쓰레기처럼 계단 밑에 내팽개쳐진 포대 자루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렸다. 뒤늦게 따라온 관리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백작님.”

“난 괜찮네. 클로에를 데리고 침실로 가게. 프란츠와 피터도.”

백작 부인을 넘겨받은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그의 지시를 받은 고용인들이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 모든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를 향해 세이모어가 무겁게 입술을 달싹였다.

“집무실에서 이야기하지.”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집무실로 들어와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치자 정오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위가 어두워졌다. 타닥거리는 벽난로의 소리 말고는 집무실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 앞 카우치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손을 깍지 낀 채 팔꿈치를 무릎에 두고 몸을 수그린 세이모어는 금방이라도 질식할 듯 내리누르는 압박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긴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차를 들고 있는 리하르트를 보며 말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냐.”

“확인받고 싶습니까?”

무거운 한숨을 내쉰 세이모어가 숙였던 허리를 폈다.

“어떻게 알았지? 어디까지 알고 있나.”

“안나 스콧, 카를 페일럿.”

두 사람의 이름을 연달아 부른 리하르트가 이어 말했다.

“코를렌 섬에 온 뒤부터 내 눈이었죠.”

“어째서.”

“제니스 그 여자가 수상했으니까.”

“리하르트!”

이런 일이 벌어질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마냥 태연해 보였지만 잔을 든 손등 위로 뼈가 희게 불거져 있었다.

“전부 그 여자가 사주한 일입니다.”

“그럴 리가.”

잔을 내려놓은 리하르트가 고개를 젓는 세이모어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자작을 다시 데려올까요? 다시 머리에 총구를 대면 술술 털어놓을 텐데.”

“그런 짓까지 했다고? 미쳤구나!”

흥분한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가세가 비교도 되지 않는 집안이라 해도 그 남자 또한 사교계의 일원이었다. 재판에 회부된다면 치명적인 추문이 뒤따라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샬럿 헤겔 때문이군. 그렇지?”

대답은 없었다. 선회한 분노가 마른 나뭇가지에 붙인 불씨처럼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전부 그 계집 때문이었어! 그 천박하고, 주제도 모르는…….”

“거기까지.”

챙그랑.

찻주전자와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차가 쏟아진 마루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테이블을 차 버린 리하르트가 재킷에 튄 사기 조각을 툭 털었다.

“더 날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그 여자, 당신. 둘 다 머리에 구멍을 뚫어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씹어 내뱉는 듯한 목소리에 뒷목이 싸늘했다. 온기 없는 경멸을 마주한 세이모어가 굳어 버린 사이 그가 조용히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냐!”

“…….”

“어딜…….”

세이모어는 엉망이 되어 버린 공간을 뒤로하고 떠나려는 리하르트를 다급하게 쫓았다. 어쩌면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멈춰 선 그가 팔에 닿은 세이모어의 손을 싸늘하게 쳐 냈다.

“전부 끝났어.”

“리하르트!”

“제니스 브라운. 그 미친 여자는 당신이 처리해. 쥐도 새도 몰래 죽이든 정신병원에 처박든.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렇게…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 여자는…….

목 끝까지 차오른 목소리가 무겁게 다시 목구멍 안으로 가라앉았다. 어깨를 붙잡은 세이모어가 매달리듯 말했다.

“네게 땅과 작위를 주려 했다.”

“…….”

“원한다면… 미스티무어 홀도.”

‘형님.’

‘부르지 마라.’

‘형님, 저는…….’

‘내게 말 걸지 마!’

가슴이 아득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간의 업보를 되돌려 받는 기분이었다.

외면하고 없는 것처럼 쳐 내던 시간이 있었다. 한때 사랑했지만 자신을 배신한 여자가 낳은 아들. 그와 그 여자, 누구도 닮지 않은 제 아들.

“원한다면…….”

미워했다. 그 어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군에 입대했을 때도 따뜻한 포옹, 작별 인사마저 하지 않았다.

‘그간 제게 왜 그리 대하셨는지 알았습니다.’

‘…….’

‘전 이제 멀리 떠납니다. 형수님과 행복하시길 바라요. …형님.’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듯 지워지지 않는 모습을 애써 잊은 듯 신경 끄고 살았다. 얼마 뒤 전사했다는 통지가 그레델 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고……?’

세이모어 아서 켄싱턴의 발밑으로 세상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차마 가슴에조차 묻을 수가 없어 그는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했다.

그러던 중, 기적이 일어났다.

‘왜, 유령이라도 봤습니까?’

나날이 피폐해지던 어느 밤, 비바람을 헤치고 그가 돌아왔다.

유모인 신시아가 발작하며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죽은 껍데기를 쓰고 돌아온 괴물이라며 외쳐 댔지만 들리지 않았다. 리하르트 대니얼 켄싱턴은 그의 장남, 그의 아들이었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원한다면, 전부 네 것이다……. 내가 나이 들면 다 물려주겠다.”

목이 메여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그러니까 리하르트, 제발…….”

애원하는 목소리에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손끝부터 얼어 버리는 감각이 백작을 덮쳤다. 보이는 건 평소와 똑같이 시원한 이목구비인데, 그 뒤로 거대한 뱀이 새카만 몸통을 꿈틀거리며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뱀이 검은 독이 뚝뚝 떨어지는 흰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왜.”

“…….”

“뭐 하러 귀찮게 기다려서 물려받아야 하지?”

“리, 리하르트…….”

저주. 격세로 이어지는 켄싱턴 가문의 괴물.

손에 닿는 소름 끼치는 비늘의 감촉에 백작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등이 마호가니 책상에 닿았다.

괴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파르라니 질린 얼굴을 마주하며 리하르트가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그냥 당신을 죽여 버리고 그 부인도, 딸린 애새끼들도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원한다면 당장 실행할 수도 있었다. 이제껏 그러지 않은 건 켄싱턴 일가가 여러모로 쓸 만해서였다.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해 주고, 먹잇감을 구해 바치고, 또 가문에 오점이 될까 그의 비밀 또한 단단히 봉하는 철저한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책상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피한 세이모어를 조롱하듯 코앞까지 다가간 리하르트가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다신 볼 일 없을 겁니다.”

“…….”

문고리를 돌리며 끝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

탁,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백작이 그제야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기도가 콱 막힌 듯 토해지지 않는 침음을 삼키며 그는 한참을 그대로 끅끅거렸다.

처절한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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