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64)

43.

“어우, 추워~.”

소리 없이 뒤척이는 동생의 옆으로 파고든 카를이 찬 뺨을 동생의 볼에 비볐다. 소스라치게 놀란 핀이 몸부림쳤다.

“뭐 하는 거야, 진짜!”

“야, 밖에 정말 추워. 가만히 좀 있어 봐. 뜨듯하다~.”

터덜터덜 집에 들어와 쓰러져 누운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도움이 안 되는 형이란 인간의 팔다리를 겨우 뿌리친 핀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노려보거나 말거나 카를은 뺏은 이불을 턱까지 덮고 누워 있었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갔다 온 거야?”

“죽겠어. 갑자기 불러 대길래 나갔지.”

“왜?”

“몰라. 갑자기 말 두 필이 필요하대. 그래서 먹이 먹이고 안장 채우고 발굽 갈고…….”

추워 죽겠네 진짜. 중얼거리며 카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으. 아침부터 뭔 고생이냐.”

“그 말이 어디로 갔는데?”

“너 일하는 곳. 세오렌인가 뭐시기… 핀?”

하품하며 이불을 더 끌어 올리던 카를이 분주한 자신의 동생을 보고 눈을 번쩍 떴다.

“어디 가냐?”

“선착장.”

“왜.”

“묻지 마.”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외투에 손을 뻗은 핀이 곧장 신발을 신고 문고리를 돌렸다.

“따뜻한 우유나 한 잔 준비해 줘. 손님 오실 거니까.”

“뭐?”

“어쩌면 당분간 머무를 거야.”

“그게 무슨, 야……!”

어안이 벙벙한 카를이 뭐라 묻기도 전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날카로운 북풍이 뺨을 에일 듯 스쳐 지나갔다. 일어나자마자 움직여서 몸이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내리막길에 몇 번 넘어질 듯 휘청거렸지만 핀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놓치면 안 돼.

‘샬럿이 이걸 떨어뜨린 모양이더구나.’

‘제니스 님……?’

‘찾아서 갖다 주렴. 그래야 말이라도 다시 붙여 볼 것 아니니.’

‘…….’

‘방금 안으로 들어가던데.’

갑작스러운 제안에 의심할 겨를도 없이 받아들인 게 문제였다. 어딘가 찜찜한 느낌을 무시해서는 안 됐다. 시끄러운 소란에 문을 열었을 때 이성을 잃어버린 것도 후회했다. 어쩌면.

“샬럿……!”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와중에 멀리 보이는 인영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외침을 들었는지 배에 짐을 싣던 샬럿이 등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핀은 더 빨리 내달렸다.

“가면 안 돼요! 잠깐만요!”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선착장에 도착해 멈춰 서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헛구역질이 터져 나와 몸을 굽히고 몇 번이나 빈속을 게워 냈다.

“허억, 헉…….”

“핀…….”

놀란 얼굴로 선 샬럿이 추궁했다.

“여긴 왜 온 거야? 어떻게 알고?”

“그대로 가면… 안 돼요.”

“뭐?”

더운 땀을 손등으로 훔친 핀이 간신히 굽힌 등을 펴 샬럿과 마주했다.

“쫓겨나는 거잖아요. 분명 제니스 님이 주도했을 거고.”

“그걸 네가 어떻게…….”

“반지.”

“…….”

“그 여자가 준 거예요. 어쩌면 그 술 취한 남자도…….”

설마 했던 추측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샬럿의 눈이 흔들렸다.

“같이 가요. 돌아가서, 내가 다 해명할게요.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해명하면?”

핀이 배에 실린 짐에 손을 뻗는 순간 냉담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해명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샬럿…….”

그녀는 순진무구하지 않았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기에는 자란 환경이 혹독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지금도 최악의 상황이었으나 더 바닥이 있다는 것을 샬럿은 알고 있었다. 제니스는 기밀을 알게 된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 강제로 미약을 먹여 몸을 망친 뒤 사창가에 팔린 여자에 관해 들었다. 백작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고 제니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일이야 어렵지도 않았다.

충격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성적인 판단 따위 가능할 리 없었다. 모질게 뒤를 돈 샬럿이 다시 배에 올라타려는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 남자는요?”

낯설지만 한번 들어 봤던 목소리. 깜짝 놀란 핀이 크게 눈을 떴다.

“형?”

곧바로 뒤따라왔는지 마찬가지로 땀을 훔친 카를이 성큼 다가왔다.

“그때 그 마차 안에 있던 사람 맞죠.”

“형……!”

핀을 지나쳐 샬럿의 짐을 빼앗듯 잡은 카를이 출발하려 대기하던 어부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허튼 말은 한 적은 없으니까 참견 좀 할게요.”

“당신은…….”

“같이 있던 남자는 연인 아니에요? 귀족 같던데.”

등 뒤로 배가 출발했다. 빈손으로 우두커니 선 샬럿에게 벼락같은 말이 내리꽂혔다.

“이대로 두고 갈 건가요? 인사도 없이?”

그 말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핀이 붙잡았다.

***

삭풍에 뼛속까지 시린 추운 새벽녘이었다. 출렁이는 뱃전에 선 선원이 가볍게 뛰어내려 배를 포구에 묶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꼼꼼하게 고정한 뒤 뒤를 돌아 공손히 물었다.

“들고 계신 가방 옮겨 드릴까요, 나리?”

깊게 중절모를 눌러쓴 이름 모를 유일한 승객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선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정체 모를 손님을 태우기는 처음이었다.

‘누구야! 꼭두새벽부터!’

이른 아침, 선착장 숙직실문을 누군가 두드린 게 발단이었다. 무시했다가는 금방이라도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다. 새벽부터 웬 술 취한 놈인가 싶어 짜증을 내며 문을 열었는데, 마주한 남자는 생각 외로 멀끔했다. 자신보다 두 뼘은 큰 키에 석고상처럼 희고 차가워 보이는 얼굴. 척 보아도 맞춤인 게 분명한 수제 정장.

‘나리는 누, 누구시죠?’

거친 뱃사람으로 파도에 맞서며 살아온 세월이 십수 년이었다. 그런데 그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저를 내리누르는 묘한 위압감이 남자에게서 느껴졌다. 대번에 화는 수그러들고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코를렌 섬에 가야겠는데.’

낮고 울리는 목소리. 피곤한지 쇳소리가 약간 섞여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선원이 대꾸했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세 배.’

‘…….’

‘섬을 갔다가 오면 당신 하루 삯의 정확히 세 배를 내지.’

‘하지만…….’

세 배라니. 군침 도는 제안이었지만 일개 선원이 작은 배이나마 혼자 출항하는 건 불법이었다. 일말의 양심이 가슴을 푹 찔렀다.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가 매끄럽게 물었다.

‘뭘 망설이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면서 살짝 드러난 얼굴에 선원은 잠시 넋을 잃었다. 본 적 없는 미모였다.

아연한 사이 선금이 손에 들어왔다. 작지 않은 돈을 보자 망설임은 끝났다.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계속 대기를 해야 할…….”

“그건 자유고, 약속된 시간에 오면 됩니다.”

언제 하대를 했냐는 듯 자연스레 말을 끊은 남자가 배에서 내렸다.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선착장에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안쪽에서 조용히 문이 열리고 컴컴한 와중에 얼핏 묶인 손이 보였다. 선원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숨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물었다.

“뭐. 할 말이라도?”

“아, 아뇨. 아무것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더듬거리며 고개를 저은 선원이 남자의 뒷모습 쪽으로 깊이 허리를 숙여 배웅했다.

경고하지 않아도 직감했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붙박인 듯 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이내 걸음이 멀어지더니 탁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가리개를 한 말들이 먼지를 가르고 내달렸다.

***

같은 날 아침, 핀은 두어 번 노크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일어났네요. 몸은 괜찮아요?”

“한결 나아.”

옅게 웃은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푼 뺨과 목에 남은 손자국이야 며칠 사이 그럭저럭 좋아졌지만,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아 큰 소리만 나면 금세 움츠러들었다.

“카를은?”

“샬럿이 여기 온 후 바로 일하러 나갔어요. 이거 마셔요. 따듯하게 데웠어요.”

핀이 건넨 건 컵에 닿긴 따뜻한 우유였다. 그것을 받아 들자 온기에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안쓰럽게 샬럿을 바라보던 핀이 고개를 끄덕이고 옆 침대에 털썩 앉았다. 처연한 모습으로 떠나려는 그녀를 설득해 집으로 데려온 지 닷새가 지났다. 부모님이 타지에 일하러 가 주말에나 돌아오기에 다행히 평일에는 집에 형제만 있었다. 침대를 빌려주고 눈을 붙이게 하자 샬럿은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그렇게 자다 깨다 한 것이 닷새였다.

내내 잠을 자서 그런지 처음보다 안색은 많이 나아졌다. 그 얼굴을 보며 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예정이에요?”

“글쎄.”

깨기만 하면 눈물을 펑펑 쏟은 바람에 눈이 퉁퉁 부었다. 들고 있는 컵을 내려놓은 샬럿이 두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감쌌다. 주먹을 꼭 쥐었다 편 핀이 결심한 듯 단호히 말했다.

“나랑 같이 세오렌 홀로 돌아가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증거는 있니?”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

“그 술 취한 남자가 제니스와 연관 있다는 증거. 모든 배후에 그녀가 있다는 물증 말이야.”

“그건…….”

“없겠지. 우리 둘만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하지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관여했다는 것까지 어찌어찌 밀어붙여도 거기까지였다. 샬럿은 애초에 자신이 이 코를렌 섬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렸다.

이 휴양지에 누굴 데려올지 결정하는 건 제니스의 몫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계산된 일일지도 몰랐다. 리하르트와 일개 고용인의 딸인 그녀가 가까이 지내는 걸 무척 거슬려 했으니까.

이제는 그 이유도 알았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지만.

어쩌다보니 이곳에 5일이나 있었지만. 이제는……. 손을 내린 샬럿이 숨을 가다듬었다.

“잠시 종이와 펜 좀 빌릴 수 있을까?”

“샬럿…….”

“부탁할게.”

잠시 말이 없던 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을 나가자 비로소 홀로 남았다.

“…울지 않을 거야.”

조용히 중얼거린 샬럿이 무릎을 세워 두 팔로 안았다. 몸을 웅크리고 스스로 타이르듯 속삭였다. 어차피 머지않아 끝날 인연이었다. 성혼까지 이어지지 못한 연인은 세상천지에 수두룩했다. 한때라도 행복했었으니 그걸로…….

그걸로…….

젖은 숨을 들이켜고 마음을 정한 샬럿이 감았던 눈을 떴다. 때마침 핀이 들어와 종이와 펜을 건넸다. 짧게 편지를 쓴 샬럿이 나직이 물었다.

“핀. 오늘도 세오렌 홀에 일하러 가지?”

“사정을 말하면 쉴 수도 있어. 혼자 있기 무서우면 내가 같이…….”

“아니.”

고개를 저은 샬럿이 부탁했다.

“이걸 리하르트 님 방문 밑에 몰래 넣어 주었으면 해.”

“샬럿…….”

마음이 식어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비참히 쫓겨났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알았어요. 정 마음이 그렇다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인 핀이 머지않아 집을 나갔다. 잠시 후, 침대 밑에 놔둔 짐을 들고서 샬럿이 집 밖으로 나섰다.

바로 그때였다.

“읍……!”

미리 잠복하고 있었던 듯 괴한이 덮쳤다. 등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도 어림없었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에 샬럿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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