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64)

40.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목은 쉬었는지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두툼한 이불이 보였다. 허리춤까지 덮고 있었다.

방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샬럿이 겨우 윗몸을 일으키는 순간, 문이 달칵 열렸다.

“샬럿.”

“…리…….”

“무리해서 말하지 않아도 돼요.”

언제 씻고 말끔히 갈아입었는지 단정한 차림의 리하르트가 다가와 은쟁반을 내려놨다.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반으로 잘라 살짝 구운 토마토와 오렌지 주스. 간소한 아침 식사였다. 일인분만 있는 것에 의아해 고개를 들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나는 먹었어요.”

두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쥐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배가 고팠지만 힘이 없어 샬럿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차가운 손이 이마를 덮었다. 훅 다가오는 얼굴에 뺨이 확 달아올랐다. 반투명한 커튼 너머로 새어 들어온 빛이 연갈색 머리칼을 희게 비췄다.

“입맛이 없습니까?”

“…….”

“어디 아픕니까?”

살짝 내리깐 시선이 닿은 곳은 그녀의 아랫배 쪽이었다. 그 시선에 어젯밤 일이 떠올라 열이 더 올랐다. 무자비하게 몰아붙여 실신하게 만든 남자. 눈뜬 채로 뼛속까지 먹히는 쾌감. 붉어지는 샬럿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싼 리하르트가 더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아픈 건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틀 수도 없이 바짝 붙이니 다른 수가 없었다. 샬럿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몸이 멀어지나 싶더니 등 뒤에 딱딱한 침대 헤드 대신 탄탄한 몸이 닿았다.

“입 벌려요.”

“예……?”

“입.”

얼결에 입을 벌리자 쏙 뭔가가 들어왔다. 토마토였다. 놀라 씹지도 못하고 있자 등 뒤에서 허리를 감싼 힘이 약간 강해졌다.

“어제와 같은 걸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말해요.”

“…….”

“다른 것도 줄 수 있으니까.”

목덜미에 와 닿은 숨에 귀 끝이 찌릿했다. 화들짝 놀란 샬럿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키자 바로 다음 음식이 들어왔다.

***

이른 아침 식사는 그런 식으로 절반 조금 넘게 먹은 뒤에야 끝났다. 분명 관계 중 실신했던 것 같은데 어젯밤 흔적이라고는 그가 물고 빨고 했던 자국뿐 모든 게 깨끗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샬럿은 그가 손수 닦아 냈으리라 짐작했다. 그녀의 벗은 몸을 누군가에게 보여 줄 남자가 아니니.

“제니스가 아침 일찍 심부름 보냈다고 말해 놨을 겁니다. 주방을 통해 올라가면 됩니다.”

“어제 뵌 분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지금 앞에 앉은 마부 또한.”

짧은 말이지만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어젯밤 행방을 추궁당할 그녀를 위해 미리 말을 맞춰 놓은 남자였다. 제니스가 순순히 협력한 게 이상했으나, 그는 어찌 되었건 윗사람이니 순종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샬럿은 그렇게 생각하고 모든 불안을 지웠다.

그러고 보니 어제 핀을 본 것 같았다. 망설이며 입을 열려는데 마차가 돌연 멈춰 섰다. 커튼을 열고 슬쩍 앞을 보자 한 소년이 보였다. 마부가 호통을 쳤다.

“카를, 네 녀석! 갑자기 끼어들다니, 큰일 나려고!”

“아! 죄송해요. 아저씨. 지각해서.”

“한 번만 더 그러면 혼쭐날 줄 알아라.”

“네! 그나저나…….”

능청스럽게 고개를 꾸벅 숙인 소년이 갑자기 마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샬럿과 눈이 마주쳤다.

“저 아저씨 옆에 타고 가면 안 돼요? 어차피 같은 방향인데. 도중에 내릴게요. 네?”

“이게 어딜! 썩 가 봐라.”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어딘가 묘했다. 분명 처음 본 소년인데 낯이 익었다. 아예 창을 열고 보려는데 등 뒤에서 손이 뻗어 왔다.

“꺄악!”

눈앞이 컴컴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린 리하르트가 다른 한 손으로 커튼을 쳤다. 어리둥절한 샬럿이 주춤한 사이 귓볼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앗!”

다시 덜컹거리며 마차가 움직이는 것도 몰랐다. 귀를 깨문 그가 뒤이어 목덜미를 깨물었기 때문이다.

“아, 아파요!”

새된 비명도 소용없었다. 그녀의 몸을 돌린 리하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언제 목깃을 풀었는지 쇄골까지 잇자국을 새겼다.

아침의 그 친절한 연인은 어디 가고 마차 안에는 말도 통하지 않는 짐승이 있었다. 그 품에서 벗어나려 샬럿이 뼈가 불거진 흰 손등을 긁었다.

“좋아. 더 발버둥 쳐 봐.”

“…….”

“그럴수록 흥분된다고 전에도 말했지만.”

내 토끼는 멍청해서 학습 능력이 없으니까. 응?

속삭인 남자가 몸부림치는 몸을 끌어안고 흔적을 남기듯 집요하게 깨물었다.

“흑… 윽…….”

이유도 모른 채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억울하고 아팠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샬럿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나서야 갑작스런 징벌은 끝났다.

어느새 세오렌 홀의 뒷문으로 들어선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선명하게 남은 잇자국을 매만진 리하르트가 샬럿의 옷을 다시 여몄다. 그 뒤 마차에서 먼저 내린 그는 다정한 신사인 척 샬럿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분한 마음에 샬럿은 무시하고 발을 내디디려 했으나 순간 아랫배가 욱신거려 휘청했다.

“말 안 듣기는.”

쯧, 혀를 찬 그가 넘어질 뻔한 그녀의 허리를 능숙하게 잡고 에스코트했다. 바닥에 발을 디딘 샬럿이 감사하다 인사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깊이 고개를 숙인 그가 이마에 살짝 입 맞췄다.

“오늘은 하루 종일 쉬도록 해요.”

“…네.”

“무리하지 말고, 가능하면 방에서 나오지 말고.”

“알았어요.”

거듭 약속한 뒤에야 뒤돌아설 수 있었다.

조용히 주방 문을 여니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아침이라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혹여나 누구에게 들킬까 샬럿은 조심히 발뒤꿈치를 세워 고용인용 계단을 올랐다.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안도하며 방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샬럿.”

소리 없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샬럿이 얼어붙었다. 누군가 방에 있었다.

“어제 어디 있었어요?”

굳은 샬럿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핀?”

어째서 그가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문이 열려 있어서요.”

눈을 내리깐 핀이 잠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였으나 샬럿은 미처 보지 못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조금 차분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도 멋대로 들어오면 안 되지. 남의 방에.”

“미안해요. 그보다…….”

“나가 줘.”

뭘 묻고 싶어 하는지는 알았다. 어젯밤의 행방. 알려 줄 수도 없고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핀은 좋은 아이지만 그뿐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 당한 기분이었다.

“샬럿…….”

“부탁이야. 나가 줘. 약속 못 지킨 건 미안하게 생각해.”

거기에 대해선 자신이 잘못한 게 맞았다. 안나를 통해서라도 못 간다고 전했어야 했다. 그러기엔 너무 정신이 없어 못했지만.

시선이 마주하고 몇 초의 침묵 끝에 고개를 푹 숙인 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얼굴에 긴장했던 것과 달리 순순한 반응이었다.

“고마워.”

“한 가지만요.”

불청객이 나가고 방문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손으로 문을 막은 핀이 불쑥 물었다.

“샬럿……. 혹시 아는 사람이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말하겠지.”

“충고하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면?”

“그럼…….”

잠시 숨을 고른 샬럿이 뒤이어 대답했다.

“나라면 내버려 두겠어. 그 사람의 일이니까.”

“…….”

“됐지?”

더 할 말도, 말할 기운도 없었다. 어젯밤 잠을 못잔 탓에 무척 피곤했다. 샬럿이 그대로 문을 닫았다.

***

찝찝했으나 곧 그 일을 반추할 새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세오렌 홀로 돌아온 다음 날, 리하르트는 친우가 급사했다는 전보에 코를렌 섬을 잠시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연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부쩍 날씨가 좋아진 탓에 야외에서 연회를 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식당의 의자와 테이블을 야외로 옮기고 벽에 장식을 거는 일 등을 남자들이 맡았고 여자들은 테이블 장식 및 주방 일을 맡았다. 샬럿도 부지런히 일손을 거들었다.

“샬럿, 뭘 그렇게 만지작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이건 한 서너 송이 추려서 여기 꽂으면 되겠죠?”

잠시 숨을 돌릴 겸 품속의 무언가를 꺼내 만지작대던 샬럿이 재빨리 그것을 숨기고 화제를 돌렸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라 금세 호기심을 접은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붉은 색을 중심으로 다채롭게. 한 테이블당 꽃병이 세 개쯤 있어야 해.”

“알았어요.”

“잔가지는 꼭 제거하고. 백작 부인은 조금의 흠도 보기 싫어하시니까.”

“그럴게요.”

대답한 샬럿이 전용 가위로 배달 온 꽃의 잔가지와 자잘한 가시를 정리했다.

가볍게 연다는 것치고 샬럿의 눈엔 꽤 화려한 연회였다. 치즈를 얹은 카나페와 토마토 살사로 맛을 낸 부르게스타 등 가벼운 핑거 푸드부터 생후 세 달이 되지 않은 돼지를 통째로 구워 양념을 바른 돼지 통구이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꽃처럼 겹겹이 쌓은 설탕 장식과 유리 화병에 꽂힌 꽃들이 테이블을 풍성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정중앙에 있는 테이블에는 백조가 새겨진 얼음 조각이 놓여 있었다.

정복을 차려 입은 고용인들이 쉴 틈 없이 오가는 가운데, 맡은 일에 집중한 샬럿이 마지막 화병에 꽃을 꽂을 때였다.

챙그랑.

“…아!”

“미안해요!”

무거운 의자를 들고 가던 하인이 부딪혀 들고 있던 화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산산조각 난 화병을 보고 망연자실할 틈도 없이 어디선가 들린 재촉에 하인이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엉망진창이 된 잔해와 꽃을 주우려 몸을 굽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구두를 본 순간 샬럿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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