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4)

36.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다리에 휘감겨 바스락거렸다. 앞장서 방문을 연 제니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뒤따라가는 내내 샬럿은 장미 가시를 입 안에 삼킨 느낌이었다. 목구멍에 박힌 가시가 입술을 열려 할 때면 사정없이 목 안을 찔러 댔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은 건가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어떤 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금세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침묵이 깨진 건 제니스가 큰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잠근 뒤였다. 등을 돌린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 문이 열릴 일이 없길 바란다.”

“…네.”

마주친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고개를 조금 내린 샬럿이 얌전히 대답했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한 제니스가 잘그락거리며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이건 열쇠.”

“…….”

“네 쪽에서만 열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문을 열지 말라고 하면서 그 열쇠를 쥐여 주는 건 모순이었다. 샬럿은 그 모순이 의미하는 게 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냉담한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를 꼭 쥔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머니.”

원하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제니스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대로 열고 나가나 싶은 순간 복도로 한 발자국 디딘 제니스가 멈췄다.

“아. 그리고.”

“…….”

“앞으론 제니스 님이라고 불러라.”

무엇보다 확실한 말이었다. 최악의 가정이 맞아 떨어졌다. 입술을 말아 문 샬럿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그대로 문이 냉정하게 닫혔다.

그날 밤 다행히 제니스가 경고한 일은 없었다.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릴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운 샬럿을 비웃듯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이튿날 그녀의 잠을 깨운 건 머리맡의 종이었다. 끝을 따라가면 리하르트의 방과 연결돼 있었다.

얕은 잠을 잤던 터라 눈은 금세 떠졌다. 다만 저녁 내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린 터라 온몸이 뻐근했다. 기지개를 켠 샬럿이 흐트러진 머리를 한데 모아 묶고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문 앞에 서자 오전 아홉 시를 가리키는 메인 홀의 자명종 소리가 울렸다. 두어 번 노크를 하고 문손잡이를 잡으니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선 샬럿이 숨을 가다듬었다.

“세숫물을 가져왔습니다. 리하르트 님.”

“여기에 둬요.”

샤워 가운을 입고 잤는지 어제와 같은 차림인 리하르트가 낮은 서랍장 쪽을 턱짓했다. 그답지 않게 흐트러진 머리와 파르스름하게 수염이 난 날렵한 턱에 시선이 갔다. 눈이 마주칠세라 고개를 숙인 샬럿이 들고 있던 대야를 낮은 서랍장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손을 마주잡고 공손하게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대답은 없었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뒷걸음질 치려는 때였다.

“없으시다면 이만…….”

“면도해 본 적 있습니까?”

“예?”

대답 대신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동그랗게 눈을 뜬 샬럿을 보며 날카로운 면도 칼날을 제 쪽으로 향하게 한 리하르트가 재차 물었다.

“면도.”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라 반응이 조금 늦게 나왔다.

“있, 있긴 한데…….”

“누구를?”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버지요.”

일순 가늘어졌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몇 번 해 본 적 있긴 한데, 서, 서툴러서…….”

“천천히 해요.”

못하겠다는 말을 간단히 막아 버린 리하르트가 침대에 풀썩 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는 샬럿을 향해 손짓했다. 입술을 말아 문 샬럿이 쥐어짜듯 고백했다.

“다치실 수 있어요.”

“그럼 벌을 받아야죠.”

“무, 무슨 벌이요……?”

“궁금하면 시도하든가.”

음산하다 못해 등줄기가 오싹한 미소였다. 가끔 보면 정말 악마가 현신한 게 아닌가 싶은 남자였다. 필요할 때는 한 발자국 물러서는 척하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하나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백기를 든 샬럿이 끌려가듯 그의 앞에 섰다.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올려다보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되자 낯선 기분이 들었다.

끝이 살짝 치켜올라간 짙은 눈썹, 가로로 시원하게 뻗은 아몬드형 눈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길고 우아한 속눈썹, 반듯하고 단정한 콧대, 관능적인 입술.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매일 장미 오일을 바르는 귀부인보다 결 좋고 윤이 나는 연갈색 머리칼.

냉소적인 성격에도 언제나 사람들이 홀릴 만큼 완벽했다. 자줏빛과 남색이 섞인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대로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묻었습니까?”

왜 시작하지 않느냐는 얼굴에 침을 삼킨 샬럿이 조심스레 요구했다.

“잠시… 눈을 좀 감아 주시겠어요?”

“왜.”

태연히 묻는 말에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여과 없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설레서요.”

“…….”

리하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이미 엎지른 물. 에라 싶은 마음에 샬럿이 덧붙였다.

“정신이 산만해져서 실수할 것 같아요.”

에둘러서 말했지만 요컨대 당신 얼굴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뜻밖의 실토에 어이없다는 듯 입을 씰룩이던 리하르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숨통을 조이듯 올려 꽂히던 시선이 끊기자 쉴 새 없이 고동치던 심장이 진정됐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샬럿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살짝 그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집중해 두 손을 들었다. 한 손으로 그의 뺨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면도날을 움직였다.

“…혹시 따끔하거나 불편하시면 바로 말하세요.”

조각의 마지막 작업을 시작한 예술가가 된 기분. 손바닥에 닿은 피부가 매끈한 대리석 같았다. 타인의 손에 얼굴을 맡기는 상황임에도 리하르트의 숨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온전한 신뢰. 혹은 설령 그녀가 실수하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가 엿보였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샬럿은 할 수 있는 최대한 집중했다. 매끈한 도자기 같은 얼굴이라 조금의 상처가 나도 금세 티가 날 게 분명했다.

아니, 만약 생긴다면 시선 주는 여자들이 조금 줄어들까.

충동적으로 든 생각에 샬럿은 화들짝 놀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언제나 끝을 어렴풋이 생각하는 주제에 그가 먼저 등을 돌릴까 늘 불안했다. 그 간극에 괴로워하는 건 당연한 벌이었다.

갑자기 든 상념에 망설이는 샬럿의 손등을 힘줄 불거진 손이 덮었다.

“계속해요.”

“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다행히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다. 묻어 있는 것을 닦아 내고 일어선 샬럿이 뒤이어 서랍장 위에 손을 뻗었다. 작은 손거울이 잡혔다.

“다 끝났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반 박자 늦게 눈을 뜬 리하르트가 거울을 보며 턱을 한번 쓸었다.

“깔끔하군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샬럿이 무릎을 펴는 순간, 그가 눈 깜박할 사이에 그녀를 뒤로 돌리더니 그대로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 굳은 팔을 어루만지듯 지분거리다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제는 잘 잤습니까?”

나긋한 숨결이 천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짧은 반항을 멈춘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까지 잔뜩 할 말이 차 있는데 막상 둘만 남자 모든 단어가 고스란히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샬럿의 머릿속을 읽었는지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니스가 눈치챘다는 건 진즉에 알았습니다.”

“…언제부터요?”

“보름 전쯤.”

“그런데 왜…….”

“어제처럼 굴까 봐.”

떨리는 목소리를 단번에 끊은 리하르트가 으르렁거렸다.

“머리를 굴에 처박은 뒤, 완벽하게 숨었다고 믿는 멍청한 토끼처럼 굴었잖아. 깜찍하게도.”

“머, 멍청한 토끼…….”

신랄한 평에 샬럿의 말문이 막힌 사이, 밖에서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놀란 샬럿이 벌떡 일어났다. 이어진 목소리는 관리인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리하르트 나리. 백작님이 부르십니다.”

“곧 준비하고 나가죠.”

새하얘진 연인의 얼굴을 향해 입매를 끌어 올린 리하르트가 가운을 벗었다. 툭, 발치에 천이 떨어지는 소리에 샬럿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무능한 시녀군요.”

“이, 이런 일을 원래 시중을 들지 않으시잖아요…….”

“시중들라고 하면 들어야 하는 게 그쪽 입장일 텐데.”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샬럿이 꼼지락거리는 사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눈 떠도 됩니다.”

“…….”

언제 흐트러진 차림이었냐는 듯 말끔히 차려입은 리하르트가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단정히 끌어 올렸다.

“오늘 저녁에 갈 곳이 있으니 그리 알아요.”

“오늘 저녁은…….”

약속이 있다고 말하려는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 있냐는 듯 응시하는 시선에 샬럿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럽게 웃은 리하르트가 그 옆을 스쳐 지났다. 아니, 스쳐 지나는 줄 알았다.

“아.”

깜박했다는 듯 살짝 고개를 돌린 그가 손을 뻗어 샬럿의 코이프를 벗기고 머리를 풀어 내렸다. 얼결에 당한 일이라 눈만 깜빡이는 순진한 얼굴을 향해 나직한 경고가 떨어졌다.

“둘이 있을 땐 머리 풀라고 했잖아. 샬럿.”

그대로 굳은 샬럿을 뒤로한 채 문이 닫혔다.

***

기다리던 축제 날, 핀은 아침부터 들뜬 상태였다. 형이 거듭 뭐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이유를 말하면 놀릴 게 뻔했으니 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뛰어 봤자 벼룩이었다.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는 남동생을 바라보며 카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하, 여자 친구라도 생긴 모양이구만?”

“아니거든?”

“맞네. 맞아. 귓불까지 빨개지는 게 딱 그거네.”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동생을 놀리며 카를이 비죽 웃었다.

“오늘 축제에 데려가려고?”

능글맞은 표정으로 묻자 한참 부정하던 핀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여자 친구는 아니야. 그냥 아는 사이.”

“세오렌 홀 하녀?”

“어, 어떻게 알았어?”

카를이 어수룩한 동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그야 뻔하지, 멍청아. 숫기 없는 네가 벌써 연인이 있을 리 없고, 근처에 여자애라 해 봤자 한참 연상이거나 꼬맹이들밖에 더 있냐.”

“…….”

“그래서 이름은?”

“…샬럿.”

“오, 예쁜데?”

“이름만 보고 어떻게 알아?”

“촉이 있어, 촉이.”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핀이 항변했다.

“관심 갖지 마. 금세 떠날 거라고 했어.”

“누가 뭐래? 귀족 나리들이야 늘 한철에만 머물다 우르르 떠나는데. 무슨 철새처럼.”

그리 말하는 카를 또한 귀족의 말을 관리하는 말구종이었다.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어업이 금지된 이후, 고향에 남은 코를렌 섬 사람들은 대개 귀족에게 고용돼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다간 완전히 말려들겠어. 위기를 직감한 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여튼 간에! 형이랑 상관없으니까 신경 꺼.”

때마침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집요한 형에게서 벗어날 구실이 생긴 핀이 빠른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네, 나가요!”

벌컥 문을 여는 순간, 핀의 눈이 커졌다.

“여긴 무슨 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