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64)

33.

백작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까? 저가 천박한 여자로 낙인찍혀 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그의 불명예는?

가뜩이나 잠도 안 오는데 싱숭생숭한 생각이 자꾸 이어져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목이 말라 탁상을 더듬으니 물병이 비어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샬럿은 숄을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용히 도착한 주방에는 이미 누군가 있었다. 샬럿이 말없이 묵례하고 뒤를 돌려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올라가지 않아도 된단다. 샬럿.”

“…….”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면.”

그저 조용한 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그저 제가 방해될까 봐요.”

숄을 추스른 샬럿이 고개를 저으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식탁 위 램프가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잠이 안 오시나 봐요, 제니스 님.”

“불면증이야 오래된 친구 같은 거지.”

맞은편 자리를 턱짓한 제니스가 잔에 든 셰리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옅은 술 냄새가 샬럿의 코에 훅 끼쳤다.

“아주머니, 술보다는 따뜻한 우유를 드시는 건 어때요? 허브 차나.”

“됐다. 어린애도 아니고.”

손사래를 친 제니스가 뒤이어 다시 셰리주 병을 기울여 잔에 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샬럿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제니스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취기에 붉어진 양 뺨, 길게 늘어뜨린 담갈색 머리, 자신과 다르지 않은 편한 옷차림. 샬럿은 그런 그녀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머리 한 톨 빠져나오지 않게 올린 머리에, 수녀처럼 노출 없는 옷을 입던 사람이었는데.

대답 대신 물끄러미 샬럿을 응시하던 제니스가 불쑥 뇌까렸다.

“넌 신시아를 닮은 듯 닮지 않은 것 같구나.”

“예?”

“외모보다는 행동이.”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말이었다. 언제일까 곱씹던 샬럿이 이내 대꾸했다.

“일전에… 비슷한 소리를 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리하르트였다. 분명 첫 만남 때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

샬럿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스가 웃었다.

“감이 좋은 사람이구나.”

“…….”

“신시아는 조용하고 별로 말이 없지만 묘하게 항상 예리했지.”

목소리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제니스의 목소리는 반쯤 졸음에 잠겨 있었다.

“직관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까. 도망칠 때를 잘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샬럿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남은 셰리주를 잔에 털어 넣으며 제니스가 말했다.

“딸인 너 또한 그렇다고 믿는다.”

돌연 등줄기가 뻣뻣이 굳었다. 끼이익, 의자를 뒤로 끌며 일어선 제니스가 비틀거렸다. 샬럿이 반사적으로 부축하려는 순간 그녀가 그 손을 뿌리치며 경고했다.

“그러니 샬럿. 도망치렴.”

마주한 눈은 온화했다. 이게 친우의 딸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라는 양.

“도망칠 수 있을 때.”

그대로 굳어 버린 샬럿의 어깨를 토닥인 제니스가 언제 휘청거렸냐는 듯 허리를 펴고 주방을 나갔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단다, 아가.’

침방 노파의 경고가 머릿속을 윙 울렸다. 정수리 위로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양초 불빛이 어디선가 들이닥친 외풍에 훅, 꺼졌다.

***

지난 사흘간, 세오렌 홀은 낮엔 방문객들을 맞느라, 저녁엔 만찬 준비를 하느라 북적였다.

저녁 식사에 누군가를 초대하지 않는 날이라고 해서 느긋하게 여유 부릴 수는 없었다. 코를렌 섬의 교류는 에셀우드 사교계에서 정식 사교 시즌 다음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시즌이었다. 세오렌 홀의 현관에는 초대 카드가 가득 쌓여 있었고, 클로에 켄싱턴은 그중 적당한 곳을 골라 그날 밤의 행적을 결정했다.

때로는 카드를 보내지 않고 살롱의 티타임 때 그녀를 직접 제 파티에 초대하는 여자도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요번에 한참 수도에서 유명한 구스테프 화가의 작품 한 질을 간신히 매입했답니다. 지인들을 모시고 조촐한 품평회를 할 생각인데, 백작 부인께서도 참석하시어 의견을 보태 주신다면 무척 기쁠 거예요.”

말은 번지르르 했으나 본심은 숨길 수 없었다. 짐짓 모르는 척 웃은 클로에가 초대에 답했다.

“어머, 그 화가라면 화풍에 꽤 관심이 있던 터군요. 남작 부인께서 조예가 깊으시네요. 초대 기꺼이 받겠습니다.”

“오시겠다니 기쁘네요. 호호. 그리고 외람되지만 이쪽 분야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 켄싱턴가에 또 있다고 들었는데요…….”

누구를 뜻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채로 미소를 숨긴 클로에가 의뭉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그이는 그다지 예술에 관심이 없고, 프란츠도 어려서…….”

결국 지켜보던 다른 부인이 끼어들었다.

“맞다. 백작님의 두 번째 작위를, 동생이신 리하르트 씨에게 증여하신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직접적으로 물으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네요. 옛날부터 결정된 사항이라.”

“남부의 토지와 저택까지 상속하신다고 들었는데.”

“예. 그레델 힐 관리만으로도 일이 많아서요. 프란츠도 지금부터 조금씩 후계 수업에 들어가야 하니 그곳을 리하르트가 맡아 주면 가문을 위해 가장 좋죠.”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낸 여자들이 그녀 쪽으로 일제히 상체를 기울였다.

“그렇군요. 그쪽 저택도 꽤 규모가 있다고 들었어요. 농민에게 소작세를 거두고 영지를 관리하는 것 외에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건 미혼 남성으로는 좀 힘들겠네요.”

“그렇고말고요. 아무래도 그런 쪽은 부인이 맡아서 하는 편이 가장 좋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침 제 조카딸이 함께 휴양 왔답니다. 딱 결혼 적령기라…….”

“어머. 윈스터 부인. 사라 양은 물론 어여쁘지만 체구가 너무 작아서 리하르트씨와 나란히 서기엔 조금 그렇지 않나요? 그보다 켄싱턴 부인. 제 딸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보셨는지…….”

한 명이 물꼬를 트자 모두 앞다투어 제 여식 혹은 친척 여성을 들이밀었다. 한때 공작 영애의 일화로 잠잠했던 때가 있었지만, 모두 오랜 옛날 일처럼 생각했다. 포기한 채 뒷짐 지고 있기에 리하르트 대니얼 켄싱턴이란 남자는 꽤 먹음직스러운 남편감이니까.

클로에는 속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이런 경쟁은 나쁘지 않았다. 남편 세이모어는 슬슬 제 동생이 성혼하길 바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초대를 다 받아들이고 싶지만 본인이 떠들썩한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유감이군요.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기 전에 적당히 흐름을 끊은 클로에가 빈 접시를 눈짓했다. 한 발자국 뒤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눈치 빠르게 동료에게 뭐라 속삭였다.

얼마 뒤, 조용히 살롱을 나갔던 하녀가 돌아왔다. 다소곳하게 찻주전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손길이 어딘가 엉성했다.

“못 보던 아이구나.”

“용서하세요. 마님. 샬럿은 익숙지 않은 일이라 서투른 것뿐입니다.”

지나가듯 던진 말에 다른 하녀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끼어들었다. 클로에가 의아히 고개를 기울였다.

“샬럿이라면…….”

중얼거리는데 시녀가 조용히 귓속말했다.

“샬럿 헤겔이요, 마님. 유모 신시아의 딸입니다.”

“아아.”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시아의 병세가 많이 좋아졌다지?”

한 달을 못 넘길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모녀는 아직 미스티무어 홀에 남아 있었다. 첫 만남 때도 얌전하고 조용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던 아이였다. 클로에는 제 본분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했다. 위치를 알고, 주제 넘는 언행은 하지 않는.

신시아 헤겔은 딱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유모로서 본분을 상실했음에도 기거하게 했다. 상벌은 확실할수록 좋으니까. 그녀의 딸이라기에 저택에 들이는 것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예. 모두 부인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감사드려요.”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샬럿이 묵례했다. 빙긋 웃은 클로에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부인 중 한 명이 불쑥 입을 열었다.

“부인, 말씀 중 죄송하지만 아까 무슨 말을 하시려고 했죠?”

“아… 말을 하다 말았군요.”

샬럿에게서 고개를 돌린 클로에가 뒤이어 말했다.

“이틀 후 저녁에 만찬을 열 생각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을 초대할 생각이에요.”

주변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기다리는 말을 기꺼이 해 주었다.

“따님이나 조카분을 데려오셔도 좋습니다. 귀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순식간에 화색이 도는 무리를 휘 둘러본 클로에가 다시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샬럿.”

“예. 부인.”

“리하르트에게 이 소식을 알려 줄래요? 아마 서재에 있을 거예요.”

시동생이라지만 그다지 편하지 않은 관계였다. 부채를 접으며 그녀가 말을 맺었다.

“그러고 나서 쉬어도 좋아요.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군요.”

***

‘도망치렴, 샬럿.’

‘…….’

‘도망칠 수 있을 때.’

그날 밤 제니스는 분명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행동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안나는 샬럿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고 거듭 말했다. 샬럿은 그저 아직 코를렌 섬에 적응되지 않아 그런 거라고 대답했다. 한 번 어깨를 으쓱인 안나가 그대로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몇 번이고 추궁했다면 그대로 무너져 모든 걸 털어놓을 수도 있었으니까.

아니,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샬럿은 알았다. 안나가 제니스에게 겉으론 순종하지만 그녀를 은근히 경멸한다는 것을. 제니스의 과거를 아는 몇몇 고용인도 마찬가지였다.

특수한 공간,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에 대해 입에 담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여지없이 깨졌다. 주방에서 은식기를 닦는 내내, 안나와 또 다른 하녀는 여태 침묵에 부치던 화제를 거리낌 없이 입에 담았다.

“제 팔자를 제가 꼰 거지. 가정교사와 그 고용주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 있지만 세상에, 가정부 따위와 누가?”

“당연하지. 더구나 공공연한 추문이 있던 여자를 받아 줄 안주인은 없어. 어떤 곳도 자신을 써 주지 않을 테니 그레델 힐에 악착같이 붙어 있는 거겠지.”

“그럼에도 아직 미련이 있어 백작님 주위를 빙빙 맴도는 걸 봐. 한번 떠났다가 돌아온 주제에 아직 제게 마음이 있을 거라 믿는 걸까?”

“그건 모르지.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뭘 알겠어. 그때 미스티무어 홀에서 일하던 고용인들 대부분 다 떠났는데.”

“맞다. 나 사실 일전에 클로버필드에서 일하는 친구를 보러 갔다가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는데…….”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두 여자가 이야기에 정신 팔린 사이, 샬럿은 등 뒤의 문 너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닦고 있던 스푼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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