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64)

31.

세상에 그런… 그런 파렴치한 꿈을 꾸다니.

며칠이 지난 지금도 꿈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불현듯 부끄러움이 밀려올 때마다 샬럿은 잘못을 앞 마차를 탄 남자에게 덮어씌웠다.

아냐.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분명 시달릴 대로 시달려서 그런 거야.

평화롭고 잔잔한 호수 위에서 남자는 막 동면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게걸스레 연인의 피부를 탐했다. 교활하게도 목뒤, 손목 안쪽, 쇄골 위와 같이 보통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부위만 골라서.

처음에는 간지러워 몸부림쳤으나 나중엔 따끔한 통증에 그를 밀어냈다. 저항하면 할수록 역효과가 난다는 걸 안 후부턴 순응했지만.

애초부터 수영을 못한다는 걸 알고 배에 태운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얇은 흰 장갑 아래, 흐릿하게 남은 자국을 만지작대던 샬럿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맞은편에서 보고 있던 안나가 불쑥 물었다.

“샬럿? 어디 아픈 거야? 가는 내내 말이 없네.”

“아니요. 그냥 피곤해서.”

퉁퉁 부은 입 안쪽이 말할 때마다 화끈거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는 휴양지에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백작 일가의 마차와 고용인의 마차가 엄연히 분리된 탓에 리하르트와 단둘이 있을 기회는 없었지만, 샬럿은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부푼 입술과 군데군데 새겨진 잇자국이 어느 정도 아물었다. 몸을 씻을 때마다 안나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금세 밝아진 샬럿이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안나. 이제 코를렌 섬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글세…….”

손가락을 펴 하나둘 접은 안나가 이내 대답했다.

“그레델 힐에서 출발한 지 사흘째니 얼추 오늘 저녁이면 선착장에 도착하겠어.”

최남단 선착장에서 코를렌 섬은 배를 타고 한나절 거리였다. 난생처음 가 보는 섬. 샬럿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

소수의 손님만 예약 받아 순항하는 코를렌 섬 소형 여객선은 사흘에 하루만 운행했다. 친절과 침묵. 선장의 진두지휘 아래 선원과 급사들은 백작 일가에게 친절했다.

쥐새끼가 고양이 눈치를 보듯 힐끔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저기압인 건 단 한 사람이었다. 리하르트가 식사를 가져온 급사를 흘깃 일별하는 때였다.

“꺅!”

깜짝 놀랐는지 급사가 와인을 떨어뜨렸다. 붉은 와인이 유리잔이 아닌 그의 재킷에 쏟아지자 급사가 황급히 고개를 직각으로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세상에, 리하르트!”

마주 앉아있던 백작 부인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괜찮습니다. 백작 부인.”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던 급사가 무릎을 굽혀 끌고 온 트레이에서 냅킨을 건넸다. 고개를 숙이자 목덜미가 드러났다. 흰 목덜미 위로 코이프(얼굴 양옆에서 턱 아래까지 감싸도록 쓰는 모자)에서 검은 머리카락 한줄기 흘러내렸다.

검은 머리카락……. 오래 굶은 참이었다. 보라색 동공이 일순 가늘어졌다.

“이, 이거라도…….”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당황한 급사가 다급하게 와인이 묻은 부위를 닦아 내려던 순간, 그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쳤다. 그녀의 손을 떼어낸 리하르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괜찮습니다.”

급사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체향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온 신경이 쏠리던 남자였다. 방금 눈이 마주한 때도 심장이 철렁해 실수를 하지 않았던가. 알싸한 화이트 머스크 향. 그리고 희미하게 풍기는 측백나무 냄새. 가볍게 쓸어 올린 연갈색 머리칼, 살짝 치켜 올라간 긴 눈매에 무감한 보라색 눈동자.

잠시 그녀를 훑어 내리는 서늘한 시선에 벗은 몸이 된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 금방 다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재킷은 제게……….”

“이름이 뭐죠?”

그 사이 재킷을 벗은 남자가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마주한 시선은 냉정했으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셀마입니다.”

“그렇군요. 난 리하르트 켄싱턴입니다.”

뒤이어 제 이름을 밝힌 리하르트가 벗은 재킷을 내밀었다.

“그럼 셀마. 이걸 헤겔 양에게 전해 주세요.”

“예. 정말 실례했습니다…….”

아마도 세탁 하녀인 모양이었다.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한 급사가 뒤를 도는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 밤에 내 방으로 와.

리하르트는 감상하듯 제 침대 위를 바라봤다. 풀어헤친 검은 머리를 침대 위에 흐트러뜨린 여자가 창백한 얼굴로 눈감고 있었다.

시체가 된 건 아니었다. 어지간해서 죽이지는 않으니까. 그나마도 짐승으로 대체한 지 오래지 않은가.

‘저걸’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까 생각하는 사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방문자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벌컥 들어왔다.

“리하르트……!”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백작이 급사를 발견했다. 단번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마주하며 리하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모어.”

“…‘식사’는 섬에서 해도 충분했을 텐데.”

“처녀의 피는 오랜만이라.”

“범하진 않았다는 말이군.”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냔 말투였다. 그 어떤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자가 암사슴을 사냥하듯, 늑대가 양을 잡아먹듯 그의 식사는 언제나 ‘정당’한 것이기에.

얼결에 변을 당한 여자가 안됐으나 다음 날이면 다시 멀쩡해질 터였다. 기이한 꿈이었구나 생각하면서. 잠시 실종됐던 여자들이 그러했듯이.

그것이 불문율이었다. ‘식사’는 언제나 리하르트 스스로의 몫이고, 세이모어는 한 번도 그것에 손대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인 세이모어가 들고 온 것을 침대에 툭 놓았다.

“이걸 돌려주러 왔다.”

깨끗이 세탁된 재킷을 본 리하르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의문을 읽어 낸 그가 덧붙였다.

“배 멀미를 하는 모양이야. 마주친 김에 달라고 했지.”

이름도 희미한 신시아의 딸은 하얗게 질린 채 죽어 가던 얼굴이었다. 그 얼굴 때문에 작은 친절을 베풀 마음이 들었던 것뿐. 용건을 마친 세이모어가 뒤를 돌았다.

“날이 밝으면 바로 배에서 내릴 거야. 준비하도록 해.”

예상대로 대답은 없었다.

***

파도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아. 이런 적 없었는데.

하도 게워 텅 빈 속으로 샬럿은 중얼거렸다. 그녀는 배에 승선한 내내 어지럼증을 느꼈다. 조금 있자 속이 울렁거리더니 결국 한참 헛구역질을 했다. 같이 방을 쓰게 된 안나는 계속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금세 돌아올게. 샬럿.”

“많이 괜찮아졌어. 걱정하지 말고 저녁 천천히 먹고 와.”

못 미더운 얼굴로 안나가 방을 나갔을 때도 샬럿은 정말 괜찮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한숨자면 다음 날 아침이니까. 곧 배에서 내릴 테니까.

그때 불쑥 떠오른 얼굴이 아니었다면.

‘리하르트… 나리께서 전해 달라 하셨어요.’

‘…그랬군요.’

홍조 띤 얼굴. 수줍은 표정. 흔히 보던 모습이었다. 접해 보지 못한 미모에 매료된 여자들. 클로필드의 연회 날 이후 잠시 잊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연인은, 리하르트 대니얼 켄싱턴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어딜 가든 시선을 사로잡는 남자였다. 대개 그 차가움에 데일까 감히 다가가지 못하기는 하지만.

재킷엔 와인이 적셔져 있었고 그 얼룩진 부분만 세탁하면 된다. 그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급사의 이어진 말이 아니었다면.

‘저기… 그분은 뭘 좋아하시나요?’

‘네……?’

‘아, 아니에요.’

벌게진 얼굴로 수줍게 웃은 여자가 말을 끝맺더니 이내 멀어졌다. 동시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혹시 두 사람이 나도 모르게 무슨 대화라도 나눴나?

여자 문제에 있어 냉정하다 못해 결벽적인 리하르트의 평소 성정을 생각해 봤을 때,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으나 아픈 몸엔 정신도 흔들렸다.

“정말 그런 거라면… 가만 안 둘 거야.”

“어떻게?”

“어떻게냐니, 그야……….”

슬쩍 들려온 대답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려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리, 리하르트님……?!”

“쉿.”

언제 들어왔는지 인기척조차 없이 그녀의 머리맡 의자에 앉은 리하르트가 상체를 숙였다. 질끈 눈을 감는 순간 이마에 차가운 체온이 느껴졌다. 코와 코가 스치고 호흡이 엮었다. 이마를 마주 댄 리하르트가 뒤이어 샬럿의 목덜미를 쓸었다. 솜털이 오소소 설 정도로 야릇한 손길이 아닌, 담백한 접촉.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열은 없는데.”

“어떻게 여기를 들어… 아니, 들키면…….”

“안 들켜요.”

“…….”

“들킨다 해도 막으면 그만이지.”

상냥하게 이어진 말에 샬럿의 입이 떡 벌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거든.”

“…농담도 하시네요.”

“…….”

대답 대신 손을 치운 리하르트가 등을 곧추세웠다.

“배 멀미를 한다더니 정말이군요. 핑계거린가 했더니.”

“급사와는.”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계속 신경 쓰고 있던 일이라 저도 모르게 내뱉고야 말았다.

“무슨 말을 하셨어요?”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질문에 리하르트가 잠시 눈을 깜박였다.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놀란 듯, 당황한 듯, 어처구니없는 듯 황당한 표정.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아픈 주제에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

“……!”

뒤늦은 깨달음에 창피함은 그녀의 몫이었다. 샬럿이 화르륵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벽을 향해 누운 뒤 이마까지 이불을 올려 덮었다. 그리고 이어 더한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무, 무슨 짓이에요!”

옆에 누워 이불째로 그녀를 휘감아 안은 리하르트가 뒤이어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요.”

“…….”

“잘 생각 없으면 더 좋고.”

잠시 잊었다. 그는 아픈 연인 사정 봐줄 만큼 다정하기만 한 남자가 아니었다. 되레 극악무도한…….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자 샬럿은 다른 건 다 잊고 재빨리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얼결에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된 느낌이었지만, 미묘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눈꺼풀이 먼저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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