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64)

30.

“바다 절벽 마을에 살았다더니, 지금은 물 앞에 선 고양이 같은데.”

“…제가 직접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캐지는 않았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더부살이하며 일했다고…….”

“아, 그랬었나.”

이제 기억이 난다는 듯 빙긋 웃고 있으나 진작부터 알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샬럿이 부루퉁 입술을 내미는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틀어 올린 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내 앞에선 이 모습으로 있어요.”

그녀의 머리를 풀어 내린 리하르트가 나직이 명령했다. 얽힌 시선이 일전의 집무실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말고는 그의 앞에서 머리를 푼 적이 없었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화르륵 뺨을 붉힌 샬럿이 입을 다물자, 리하르트가 강조했다.

“내 앞에서만.”

미소 짓고 있었으나 잔인한 눈빛이었다.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샬럿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그는 연인이 된 후로 다정하고 부드러웠으나 언제든 그 가면을 바꿔 낄 수 있는 남자였다. 독점욕이 강하고 질투도 심했다. 조금 친해진 말구종과 웃으며 대화했다고 숨을 헐떡일 때까지 회랑 귀퉁이에서 혀를 얽은 적도 있었다.

‘후… 응읏.’

제대로 된 저항은 할 수 없었다. 미처 다 내뱉지 못한 뭉근한 숨을 헐떡였을 뿐.

‘아…….’

누가 볼까 두려워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도 리하르트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제 욕심을 채웠다. 숨이 넘어간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해방됐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샬럿을 그가 안아 올리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더 해 봐.’

‘무, 무엇을…….’

‘저항하는 것.’

핏줄이 돋아난 손이 허리를 애무하듯 가볍게 쓸었다.

‘그러면 더 흥분되거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는 그녀를 놓아줬다. 더한 접촉은 없었으나 어디까지나 그가 유예해 준 것임을 샬럿은 알았다.

떠오른 기억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듯 리하르트가 그녀의 긴 머리끝을 지분거렸다.

“적응된 모양입니다.”

“네?”

“손, 더는 떨리지 않는데.”

고개를 숙이자 어느새 벌벌 떨었던 손이 진정되어 있었다. 용기를 내어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 전 보았던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정말… 너무 예뻐요.”

감탄사가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 자주 오셨나요?”

“종종.”

“주일에?”

슬쩍 덧붙이는 물음에 리하르트가 싱긋 웃었다.

“생각보단 독실했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 거죠?”

조심스러웠으나 한 번은 묻고 싶었다. 에셀우드에서 종교란 계급을 불문하고 공통으로 가져야 할 신성한 것이었다. 제대한 후 한 번도 교회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은 그를 향해 많은 구설이 떠돌았다. ‘켄싱턴’의 이름이 있어 나서서 뭐라 하지는 못해도 은근히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재미없는 이야기인데.”

“해 주세요.”

배 난간에 팔꿈치를 얹은 채 손등에 뺨을 괸 리하르트가 오수에 잠기듯 눈을 감았다. 배불리 점심을 먹고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처럼 나른한 모습이었다. 비스크 인형처럼 긴 속눈썹이 얼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식민지 섬에서 반군에게 붙잡혔을 때 죽음 문턱까지 다녀왔었습니다.”

이어진 말에 샬럿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의 성격상 아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을 비밀이었다.

“손톱이 뽑히고 등은 채찍질로 넝마처럼 너덜너덜했죠. 낮에는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고 밤에는 제발 죽여 달라 애원하던 나날이었습니다.”

내용과 달리 차분한 말투였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상처로 남아 곪았을 이야기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환청이 들리더군요.”

“환청… 이요?”

“네. 사실 꽤 어렸을 때부터 종종 들리던 음성이었는데.”

눈을 뜬 리하르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이래도 믿을 거냐는 양.

“모습이 없는 ‘괴물’이 살려 줄 테니 뭘 줄 거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뭐든.”

간결한 답이었다. 태어나 처음 제 몸을 가진 사람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편 리하르트가 말했다.

“내 살이든 뼈든, 영혼이든 뭐든 줄 테니 이런 시궁창 같은 데서 죽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샬럿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는 무감하게 그때를 떠올렸다. 적군 한복판에 전시된 채 이어진 고문으로 하루하루 죽음만을 기다리는 처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손을 내밀어 주는 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괴물이든 악마든.

“그럼…….”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히 묻는 샬럿을 향해 리하르트가 미소 지었다. 작약을 짓이긴 듯 붉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그 모습이 겨울 햇살 아래 엷은 너울을 쓴 사제처럼 어딘가 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싹했다. 손을 뻗어 얼굴을 확인하면 탐욕스럽게 입맛을 다시는 악마가 있을 것처럼.

별안간 샬럿이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

“내가 무서워?”

붉어진 귀 끝, 희고 매끄러운 목선, 한 팔에 감겨드는 허리.

“혹시 네 앞에 있는 게 그때 그 괴물일까 봐?”

혀 위에 올린 버터처럼 달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쉽게 녹아 버리는 것.

수풀에 숨은 뱀을 알지 못하는 연약하고 어린 짐승.

조소를 거둔 리하르트가 이내 턱을 괸 손을 떼고서 성큼 상체를 숙였다. 머리 위를 덮을 만큼 큰 그림자가 샬럿을 덮친 순간.

“많이…….”

“…….”

“아팠겠네요.”

두려움이 아닌 슬픔에 손이 잘게 떨렸다. 작은 얼굴이 그를 향해 들렸다. 그녀는 경련한 입매가 어떻게든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내려 애쓰고 있었다. 턱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건 제 것이 아닌 양.

“외롭고, 절망스럽고, 많이 아팠…….”

이어지려는 말은 자비 없이 덮친 입술에 먹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갑작스런 무게 이동에 배가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아… 안 돼요!”

본능적인 두려움에 샬럿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어 제 양 손목을 그러쥔 손을 떨쳐내려 했으나.

“배, 배가……!”

“쉿.”

잊고 있었다. 그녀의 연인은 무도한 남자였다. 그는 뺨에 묻은 설탕을 닦듯 엄지로 식은 눈물을 닦아내어 핥았다. 그러고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입 맞추고 순수한 소녀를 유혹하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잖아.”

무엇을? 차마 물을 수 없었다.

“…….”

“응?”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것을 암시하면서 표정은 마치 누이에게 오후 간식을 조르는 소년처럼 천진했다. 빠져나갈 구석조차 주지 않으면서 선택권을 눈앞에 두고 네가 고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남자. 무도하다 못해 극악했다.

“리하르트 님은… 정말…….”

달아오른 뺨, 정처 없이 흔들리는 물기에 찬 눈동자. 몸에 힘을 푼 샬럿이 훌쩍이며 백기를 들었다.

“정말… 나쁜 분이에요.”

“아.”

찬사라도 들은 듯 그가 다정하게 대답하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새삼.”

***

서 있는 곳은 기이한 황야였다.

마구잡이로 자라난 고사리나 축축한 양치식물조차 없는 건조하고 황폐한 곳. 꿈이구나 생각하니 두렵지는 않았다. 품이 넉넉한 흰 슈미즈 차림임에도 춥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맨발로 말라비틀어진 풀을 밟고 스산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았다. 폐허를 떠도는 유령이 된 기분.

이내 긴장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은 샬럿이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여기가… 어디지?”

휑뎅그렁한 언덕 위에 집이 하나 보였다. 낡고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저곳에 들어가야 해. 샬럿의 본능이 속삭였다. 들어가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최면이라도 걸린 듯 비탈진 바위 사이를 걸어 올라갔다.

집 앞에 섰을 때야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돌아가? 어디로?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걸까?

망설이는 순간, 문이 열렸다.

끼이익.

“…누구 계세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예의상 내뱉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샬럿이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등 뒤의 문이 닫혔다.

오두막 안은 겉으로 보기와 달리 꽤 아늑한 공간이었다. 카우치, 흔들의자, 바닥에 깔린 터키 카펫, 주물난로, 가벼운 요리 정도는 해 먹을 수 있을 만한 간이 부엌. 사람이 관리하는 곳인지 그 모든 곳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샬럿이 조심스레 카우치에 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금세 나른해졌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감겼다. 그렇게 잠시 졸고 있는데, 어느 순간 문이 열리고 무언가 들어왔다.

늘씬하고 위협적인 몸체. 날카로운 눈매와 송곳니. 흑표범이었다.

“크르르…….”

미처 비명 지를 새도 없었다. 소리 없이 우아하게 뛰어오른 표범이 그녀의 양어깨와 다리를 내리눌렀다. 마노 같은 보라색 동공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비쳤다. 쿵쿵. 심장박동이 북소리처럼 귓가에 요동쳤다.

얇은 천 위로 금방이라도 그녀의 여린 피부를 찢어발길 예리한 손톱이 느껴졌다. 마주한 짐승의 눈은 늪처럼 깊었다. 원초적인 두려움. 압도적인 포식자 앞에 선 무력함. 으르렁대며 이를 드러낸 짐승의 나직한 숨소리.

분명히 이건 꿈이야. 꿈이니까 깨어나면 돼.

그 생각만이 유일한 방패였다. 샬럿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을 덮친 이상한 감각에 그녀는 소스라치며 몸부림쳤다.

“싫어……!”

짐승이 목덜미를 핥았다. 까끌까끌하고 축축한 느낌이 피부 안 혈관까지 관통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리만 도리질치고 있는데,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샬럿.”

리하르트 님?

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눈을 뜨려 했으나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힘에 시야는 여전히 깜깜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도망치고 싶었습니까?”

도망? 내가?

그런 적 없었다. 그럴 리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분명 제 위에 있는 건 덩치 커다란 사나운 맹수인데, 어째서.

“놔, 놔주세요……!”

“이해해요. 겁 많고 멍청한 토끼는 원래 제 주인을 잘 못 알아보는 법이니.”

“네……?”

“주인을 인식시키는 건 주인의 몫이겠지.”

겨우 내뱉은 저항에 다정하게 조롱한 리하르트가 뇌까렸다.

“발 힘줄 하나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을 겁니다.”

양 손목을 틀어쥐었던 짐승의 앞발이 점차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덜덜 떠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꾹 누른 그가 힘주어 깍지를 꼈다.

“괜찮아요. 금방 끝날 테니까.”

아니에요! 싫어!

“그만……!”

늪 바닥에 가라앉은 듯 꼼짝 못 했던 샬럿의 몸이 풀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내자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샬럿……?”

딸의 비명에 잠에서 깬 신시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니? 몸이 안 좋다면 휴양지엔 따라가지 않아도…….”

“아니요.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고개를 저은 샬럿이 애써 웃었다.

“오랜만에 악몽을 꾼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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