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64)

29.

초겨울에 접어든 그레델 힐은 급격히 추워졌다. 북부의 기후 특성상 가을이 짧은 터라 계절이 여름에서 바로 겨울로 변해 버린 느낌이었다.

첫눈이 내린 다음 날, 정원사와 견습 아이가 새벽부터 내려앉은 관목 위의 눈을 치우느라 분주했다. 방한복으로 갈아입은 하인들 역시 부지런히 현관홀과 정문으로 이어지는 흙길을 부지런히 쓸고 닦았다. 하녀들 또한 동절기 준비로 커튼을 바꿔 달고 백작 일가의 방부터 손님방까지 침구를 바꾸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일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 시기였다. 샬럿이 기꺼이 돕겠다고 말하자 제니스는 그녀를 비교적 한산한 침방에 배치했다. 하는 건 주로 단추가 떨어진 고용인 정복을 손보거나, 솔기가 터진 커튼을 수선하는 등의 일이었다.

다락방 바로 아래에 위치한 침방은 아늑하고 화목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라고는 과묵한 노파와 하녀 안나가 전부였다. 노파는 말이 없었지만, 안나는 처음부터 한참 어린 샬럿을 꽤 예뻐했다.

“샬럿, 남부 코를렌 섬에 가본 적 있니?”

“아니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맞아. 그곳은 1년의 절반이 여름이야. 겨울이 돼도 따듯하지. 기후도 기후지만 특히 바다가 환상적이야. 사방이 온통 에메랄드 색깔에 본 적 없는 나무들도 즐비하고…….”

마치 다녀왔다는 어투라 샬럿은 잠시 손을 멈추고 안나를 쳐다봤다. 곧 눈이 마주쳤다.

“왜?”

“혹시 그쪽 출신이신가 하고요.”

“아. 그건 아니야. 하지만 몇 번 가 보긴 했지.”

미소한 안나가 다시 바느질감에 시선을 고정했다.

“백작님이 소유한 별장이 있거든. 물론 여기 미스티무어 홀보다는 조금 작은데, 그래도 꽤 우아하고 아름다운 저택이야.”

코를렌 섬은 대륙과 가장 가까운 섬이라 국빈이 올 때면 꼭 거치게 되는 곳이었다. 나라의 첫인상을 대표하는 곳인 만큼 토지를 소유하고 별장을 지으려면 재력은 물론 어느 정도 사회적 위신이 있거나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증명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에셀우드에서 내로라하는 귀족을 만나려면 코를렌 섬에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처음 들었네요.”

연인으로 지내면서도 리하르트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기실 그는 말이 많은 남자는 아니었다. 대부분 그녀가 말하면 그가 경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만을 가질 법했지만 샬럿은 금세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워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번 겨울에도 가실 텐데, 따라가게 되면 정말 좋을 거야. 그곳 종려나무는 정말 예쁘거든. 과일도 하나같이 맛있고.”

분주히 손을 놀리며 안나가 재잘댔다.

“무엇보다 좋은 건 보름 간 머물면서 이틀은 포상 휴가가 주어지는 거야. 느긋하게 바다를 보며 쉴 수도 있고 그럴 듯한 식당에서 우아하게 식사도 즐길 수 있지.”

보름. 막 시작한 연인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샬럿은 애써 지나가듯 물었다.

“혹시 프란츠 도련님과 리하르트 나리도 동행하시나요?”

“프란츠 도련님은 늘 동행하셨어. 리하르트 나리는 돌아오신 후로는 아직. 하지만 올해는 모르겠네. 아무래도 곧 작위를 받으실 테니 미리 인맥을 쌓아 두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샬럿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졌으나 고개를 숙인 터라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수다에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던 노파가 안나를 불러 물을 가져오게 했다. 안나가 나가고 노파와 둘이 남자, 침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싶어 눈치를 보며 샬럿이 일에 집중하려는 때였다.

“세상엔 영원한 비밀은 없단다, 아가.”

“…예?”

“위험한 줄 위에 서 있을 때는 그 아래를 생각하렴.”

의미를 모르겠으나 어쩐지 등골이 서늘한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언제 입을 열었냐는 듯 노파는 다시 입을 닫았다.

***

“적어도 일주일 뒤에는 도착할 테니 그 전에 별장지기에게 전보를 부치는 게 좋겠어.”

“이미 써 두었습니다. 백작님. 봉납만 찍어 우체부에게 넘기면 끝납니다.”

“잘했군.”

들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세이모어가 대답했다. 등 뒤로 열린 창에 겨울 햇살이 쏟아졌다. 어슷하게 비낀 시선 너머로 색 옅은 금발이 보였다.

방 안에는 두 사람뿐 아니라 하녀 아이 하나도 있었다. 의례적인 대화와 시선이 오간 후 제니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별장지기 부부가 도착 전에 모두 준비를 마쳐 놓을 수 있겠어.”

“네. 따뜻한 차를 올릴까요?”

“응. 고맙군.”

미소 지은 제니스가 눈짓하자 등 뒤의 하녀가 먼저 집무실을 나갔다. 뒤이어 나가려던 제니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참, 아서.”

다시 펜을 잡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의 미들 네임을 부르는 가정부. 타인의 눈에 띄었다면 기함할 일이었겠지만 둘 사이에서는 평범한 일이었다.

단둘이 있을 때만 허용되는 이름. 신분 차이를 인지하기도 전, 소년소녀였던 시절부터 이어진 불문율. 더는 연인도, 특별한 사이도 아닌 주종 관계가 되었지만 이것만은 그대로였다.

“이번에도 살롱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될까요?”

살롱은 귀부인의 공간이었다. 결혼한 이래 백작 부인은 한 번도 코를렌 섬에 동행한 적 없었다. 일주일간의 마차 여행을 견디기에는 몸이 연약할 뿐더러 바닷바람이 건강이 좋지 않을 거라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교시즌이 아니더라도 다른 가문과 교류는 중요했기에 백작은 1년에 한 번 섬을 방문했다.

그때 대동하는 인원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부인을 대신해 살림을 총괄할 제니스와 몇몇 하녀과 하인들. 그래서 작년과 다름없는 대답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아니. 올해는 준비하라고 추신하도록 해.”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깍지 낀 세이모어가 명령했다.

“부족함 없이.”

“아서!”

참다못한 제니스가 언성을 높였다. 세이모어의 눈썹이 올라갔다.

제니스 브라운은 노동 계급으로 태어나 분수를 잘 아는 여자였다.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모든 걸 바친 자신 대신 격에 맞는 귀족을 배우자로 들인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은 사랑만으로 굴러가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자신에게도 그것을 버틸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코를렌 섬으로의 휴가였다. 그런데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를 빼앗다니, 그곳에 그 여자를 들이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차갑게 일갈하는 남자를 보며 제니스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부인께 힘든 일정이 될 겁니다. 무리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브라운 박사를 데려갈 테니 괜찮아. 일가 전부가 간다.”

“리하르트 님도요?”

세이모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성혼 상대를 구해야 하니까.”

“만약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배겼다.

“그분께 이미 연인이 있다면요?”

“의외지만 축하할 일이군. 누구지?”

처음 듣는 얘기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스펜서 공작 영애를 공개적으로 거절한 이래, 괜찮은 가문은 공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다들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백작위는 자신이 승계했으니 리하르트는 조부가 갖고 있던 자작위를 계승해야 했다. 여왕에게 새로운 성(姓)을 하사받기 전에 성혼을 해야 이후 귀족사회에서의 위치가 공고해지니 괜찮은 상대가 있다면 일찌감치 맺어 주는 것이 좋았다.

아니, 사실은 전부 핑계거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사지에서 돌아온 리하르트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걸 부정하기 위한 핑계. 조금이라도 틀에 맞추어 집어넣어 그가 정상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한.

“기꺼이 이어 주시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큰 흠이 있는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치부야 덮어 줄 의향이 있었다. 욕심을 버리고 이렇게까지 눈을 낮추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살아만 있어 줘도 감사하겠다고 신께 기도했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

“무엇보다 성혼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아가씨라면 적어도……”

“제 손으로 죽이진 않겠죠.”

“제니스!”

그가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을 마무리한 제니스가 일그러진 표정을 갈무리했다.

“연인 이야기는 그냥 해 본 말이고, 이번에 샬럿을 데려갈까 해요. 신시아에겐 간병인을 한 명 붙이고.”

“…그 애는 왜.”

“손도 야무지고 일 머리도 있어요. 여러모로 쓸모가 많더군요.”

“설마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차갑게 미소 지은 그녀가 다시 등을 돌려 방문 손잡이를 잡아 젖혔다.

“제게 남은 유일한 것인데.”

마지막 말은 문 닫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

사유지인 호숫가는 한적했다. 일전에도 가 본 적 있던 곳이었다. 눈이 부셨던 여름의 녹음은 한층 차분하고 우아하게 변모해 있었다. 눈꽃이 내려앉은 참나무, 눈측백, 무성히 자란 풀들을 소복이 덮은 흰 눈. 정적인 풍경화처럼 그 자체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배 위에 올라탄 순간 모두 깜깜해졌지만.

“눈 떠요, 샬럿.”

출렁이던 호수의 물살이 잦아들었다. 젓던 노를 고정시킨 리하르트가 달래듯 다시 말했다.

“생각보다 안 무서울 겁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샬럿의 턱을 들어 올렸다. 강제로 고개가 들린 샬럿은 눈꺼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미간 위에 차가운 체온이 닿았다. 겁먹은 아이를 달래듯 엄지로 미간을 부드럽게 누른 리하르트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샬럿.”

손길이 엉엉 우는 젖먹이 아기를 끌어안아 등을 토닥이는 손길만큼이나 상냥했다. 천천히 실눈을 뜨자 잔잔해진 배 위로 마주한 얼굴이 보였다.

밀랍을 빚은 듯 흠결 없는 피부에 오만하게 뻗은 반듯한 콧대. 그 위로 마노 같은 눈동자 한 쌍에 그녀가 비치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미모에 샬럿이 잠시 넋을 잃은 사이 리하르트가 그녀의 뺨을 톡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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