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64)

28.

낮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방문자를 확인한 신시아가 옅게 웃었다.

“제니스.”

“몸은 어때?”

“많이 좋아졌어. 오늘도 마찬가지로.”

병색이 짙었던 몇 달 전에 비해 확연히 생기가 있어진 얼굴이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의 변화에 제니스는 본인 일처럼 기뻐했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침대 위 신시아의 옆에 앉았다.

“그거 참 다행이네. 샬럿은?”

“잠시 밖에 나갔어.”

“어제도 늦게 들어오던데.”

신시아는 프란츠의 이름을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물어보면 그렇다고 수긍하면 될 일이나 굳이 먼저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샬럿 또한 공연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고.

노동 계급의 여자와 귀족 남자. 나이대가 맞지 않다 쳐도 작정한 사람들의 눈에는 충분히 부적절하게 비춰질 수 있는 관계였다. 때로는 그 소문이 정말 소문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굳어지려는 입매를 추스른 신시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답답한가 봐. 여기보다 대도시에서 있다 왔으니까.”

“아직 젊으니 그럴 만도 하네. 애인은 없나 봐?”

“아마도.”

“정말?”

어물거리는 모습에 제니스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신시아가 시선을 피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내 추측일 뿐이야. 만나는 남자가 있는 것도 같아.”

“이름은 모르고?”

“아직은.”

“나이는?”

“모르겠어. 비슷하지 않을까.”

집요한 구석이 있는 추궁이었다. 궁지에 몰린 초식 동물처럼 초조해진 신시아가 내리깐 시선을 창가로 고정하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벌써 겨울이 시작되나 봐.”

대답은 없었다. 신시아는 인내심 있게 말을 이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이 무렵이었지. 기억나?”

“…기억나고말고.”

제니스 브라운과 신시아 헤겔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장장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에셀우드 각지에 떠들썩하던 켄싱턴가 차남의 탄생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신시아가 처음 보모로서 미스티무어 홀에 발을 딛게 된 첫날이었다. 다양한 건강 검사를 통과한 뒤 일전에 일했던 곳에서 정식으로 추천서를 받아 면접 또한 통과했으나 모실 도련님은 보지도 못한 채 날이 저물었다.

묘하게 배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저택의 구조와 사용인들의 위계에 대해 익히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한 여자가 신시아에게 다가왔다.

‘당신이군요. 도련님을 모실 보모가.’

‘…당신은?’

‘제니스 브라운이라고 해요. 세이모어 나리의 시녀죠.’

여자는 그녀 또래였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이 막 갓난쟁이가 되었을 그런 나이. 곱슬 기가 있는 긴 진갈색 머리에 검은 눈. 이목구비는 아름다웠으나 고집스러워 보였다.

전체적으로 키가 크고 깡마른 체격에 뭔가 초췌한 인상이었지만 평지풍파를 다 겪은 듯 성숙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혼은 했나요?’

‘네. 딸이 있어요.’

‘…부럽네요.’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동갑임에도 가정을 꾸린 것이 부럽다는 건지 그 기저에 다른 어떤 뜻이 있는지 가늠하기에는 그레델 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곧 소꿉친구처럼 친해졌다. 안이 모두 파여 껍데기만 남은 조개처럼 웃던 제니스는 머지않아 가정부로 승진했다. 신시아가 잠시 미스티무어 홀을 떠났던 적도 있지만 다시 돌아와서도 여전히 두 사람은 자매처럼 가까웠다.

추억에 잠겨 한참 동안 이야기한 두 사람은 그 뒤로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날씨 이야기, 병세 이야기, 다른 고용인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화제를 이어 가던 대화는 현관홀에서 점심시간을 알리는 정오 시계가 울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곧 완치했으면 좋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방을 나가려는 제니스를 향해 신시아가 머뭇거리며 이름을 불렀다.

“제니스.”

“응?”

“혹시 백합 한 송이를 구해다 줄 수 있겠어?”

“…….”

“곧 리하르트 도련님의 기일이잖아.”

잠시 침대에 누운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니스가 몇 초의 간극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신시아.”

***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샬럿이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먼지 더께가 앉은 낡은 소설책을 꺼낸 뒤 제목을 읽었다.

“카르밀라.”

“아니에요. 좀 더 옆의 책.”

대답은 냉정했다. 샬럿의 시선이 홱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얄밉게도 남자는 그녀의 시야를 벗어나 반대편 책장에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가르쳐야 할 줄은 몰랐는데.”

옅게 짜증이 배인 목소리. 샬럿은 울컥하는 마음에 그 옆의 책도 책장에서 빼냈다. 텅 빈 책장 사이로 연인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현재 도서관의 책 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도서관 정리를 위해 사람이 필요한 리하르트를, 샬럿이 자원해 도와주는 중이었다. 아이디어를 낸 것은 샬럿이었다.

“…어린애요?”

묘하게 일전의 일을 상기시키는 단어에 샬럿이 울컥했다. 그날은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모두 그가 원치도 않은 옷을 입히고, 원치도 않은 곳을 가게 한 것이 문제였다.

처음 본 가극은 신비했고 새로운 경험이었으나 심장이 벌렁거려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리하르트의 그 질 나쁜 장난에는 울고 싶었다. 우연히 파우더 룸에서 루이스 아가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진정하지 못해 큰 실수라도 저질렀을 게 뻔했다.

“제가 어린애라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태연한 얼굴에 결국 폭발한 건 샬럿이었다.

“그렇다면 나리는 어린애랑 사귀시는 거네요.”

부러 ‘나리’라는 단어를 길게 발음하자 그의 눈썹이 꿈틀댔다. 남자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녀와 그의 계급 차이를 명확히 구분 짓는 호칭. 용기 내기 시작하자 다음 말은 술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일곱 살이나 어리죠.”

처음 내뱉은 반항 아닌 반항이었다. 리하르트가 차갑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올라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이제 여긴 정리가 끝난 거 같으니……….”

“그래서.”

엎질러진 말을 수습하려 시선을 피한 샬럿이 사다리를 내려오려 하는데 반대편에서 뻗은 팔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긴 손가락이 닿는 부분마다 미열처럼 열기가 올라왔다.

“그래서 싫어졌습니까?”

“…….”

“젖비린내 나는 또래 남자라도 눈에 들어오던가요?”

매끄럽고 다정한 어조였으나 이 남자의 다정함은 차라리 독에 가까웠다. 위장색으로 적의 눈을 가리고 방심한 사이 뼛조각마저 남지 않게 삼켜 버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샬럿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시선을 내리깔려 했으나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턱을 들게 했다.

“아니에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포식 기회를 노리듯 여유롭게 가녀린 목선을 지분대며 리하르트가 물었다.

“나한텐 정수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취향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리하르트 님…….”

덜덜 떠는 얼굴 위로 날벼락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나는 그런 취향이지만.”

“그만……!”

이어진 말에 파리하게 질렸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흐트러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는 손길에 샬럿이 간신히 고개를 뒤로 물렸다. 겨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사다리를 내려왔다. 책장이 가로막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개를 돌려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긴 치맛자락이 그녀의 다리를 휘감았다.

“오, 오늘 정리는 여기까지면 될 것 같네요. 전 이만…….”

당장 도망쳐야 한다. 본능처럼 걸음이 문으로 향했다. 거의 다 왔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더 큰 손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누가?”

“…….”

“누가 그만해도 된다 했지?”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게 들렸다. 굶주린 짐승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으르렁댄 리하르트가 뒤이어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놓, 놓아주세요!”

“왜.”

“누가 보면…….”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그래도…….”

“싫지 않으면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던 저항은 맥없이 제압됐다. 이젠 토끼인지 당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새빨개진 귀를 내려다보며 리하르트가 소리 없이 실소했다.

“…치사해요.”

내가 절대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

웅얼대듯 뇌까린 샬럿의 몸이 붕 뜨더니 넓은 품에 공주처럼 안겼다. 그대로 눈을 꼭 감자 몸이 몇 번 흔들리더니 이내 그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를 앉은 채로 어딘가에 앉는가 싶더니 이어서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투정부리기에 달래 주는 겁니다.”

“네……?”

황당함에 눈만 깜박이는 그녀를 향해 그가 태연하게 반문했다.

“화난 거 같던데, 아닙니까?”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는데…….”

“며칠째 꽁해 있는데 신경 안 쓰일 리가.”

평범한 연인 같은 대화였다. 손길만 닿아도 소스라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샬럿이 그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안긴 채 품을 파고들었다. 넓고 다정했다. 그대로 잠이 들고 싶을 만큼 편안했다.

들개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쏴 죽이던 남자, 사냥한 짐승을 포대 자루에 담아 질질 끌고 오던 남자. 한때는 핏자국을 보고 경악하고, 까칠하게 몰아붙이던 눈매에 겁을 집어 먹어 피하려 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연인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만의 연인.

앉은 카우치 뒤로 커튼이 쳐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눈부셨던 햇빛이 사라져 공간이 요람처럼 아늑해졌다.

“피곤하면 자요.”

리하르트가 그녀의 눈을 감겼다.

“자장가는 안 불러 주시나요?”

“못 부릅니다.”

“찬송가라도.”

“…….”

도를 지나쳤나 싶어, 샬럿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냥 잘게요.”

“대신 책 구절을 읽죠.”

언제 들고 왔는지, 조금 전 샬럿이 빼낸 책을 든 리하르트가 나직이 읽어 내렸다.

“카르밀라가 속삭였다. 내 사랑, 네 작은 심장은 상처 입었지.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는 마. 나는 본능을 따를 뿐이야. 네 사랑스러운 심장이 다치면, 내 거친 심장도 너와 함께 피를 흘릴 테니.”

그 뒤의 구절은 잠결에 드문드문 들려왔다.

“너는 내 것이고, 내 것이 되게 할 거야.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니까.”(<카르밀라>, 2015년, 도서출판 초록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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