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때마침 극이 시작할 때가 되었는지 등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수런대던 관중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육중한 진녹색 다마스크 커튼이 걷히자 화려하게 치장한 아리따운 여배우가 극 무대 위로 올랐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직원이 다가와 와인 두 잔이 놓인 은접시를 내밀었다. 리하르트가 와인 한 잔을 집어 샬럿에게 건넸다.
“마셔요.”
언제 봐도 우아하고 긴 손이었다. 홀린 듯 그의 손을 바라보던 샬럿이 고개를 들었다. 조도 낮은 빛 아래에서 번뜩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악어의 눈처럼 매혹적이지만 생각을 알 수 없어 선득했다.
“입으로 먹여 주기 전에.”
망설임이 길어지자 결국 인내는 끊어졌다. 얇디얇은 가면을 벗으려는 남자를 향해 샬럿이 손을 뻗었다.
“마실게요.”
그러고는 단숨에 와인을 들이켰다.
공연이 시작되자 처음 보는 세계에 샬럿은 순식간에 끌려 들어갔다. 아름다운 노래와 화려한 의상, 악단의 연주와 서정적인 극의 내용.
저도 모르게 난간 쪽으로 몸을 기대며 보는데 손등 위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사방이 어둑한 가운데 덮쳐 누르듯 위에서 샬럿의 손등을 감싼 리하르트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장갑 사이로 느껴지는 온기에 닿은 부분부터 찌르르 작은 전류가 흘렀다. 샬럿이 저도 모르게 척추를 꼿꼿이 세우는 사이, 손끝을 세운 그가 이번엔 손등을 타고 올라와 장갑을 조금씩 벗겨 냈다.
“하…….”
은밀하고 농염한 유혹에 샬럿의 호흡이 조금씩 밭아졌다. 방금까지 눈을 사로잡았던 무대 위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산소가 부족해 기절할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샬럿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주한 무도한 남자가 다시 허리를 휘어잡아 주저앉히기 직전에 애원하듯 속삭였다.
“술을 먹어서인지 어지러워요……. 조금 쉬고 올게요.”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아 황급히 둘러댄 핑계였으나 취기가 오른 건 사실이었다. 먹어 보지 못한 비싼 술이라 몸에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후덥지근한 느낌이 들어 샬럿은 그가 잡을 틈도 주지 않고 홀을 빠져나왔다.
리하르트가 옆에 없으니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샬럿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숙녀 전용 파우더 룸으로 향했다. 아직 휴게 시간이 되지 않아 아무도 없었다.
“문밖에 있을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는데… 감사해요.”
완곡히 거절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기색에 어색하게 웃은 샬럿이 안으로 들어갔다. 규모 있는 극장이다 보니 파우더 룸 또한 넓었다. 몸단장을 새로 할 수 있는 화장대는 물론, 곳곳에 편안한 카우치와 장식용 관엽 식물 등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아늑했다.
“…덥네.”
샬럿은 바로 넓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초겨울로 접어든 밤이었다. 한층 차가운 공기가 취기로 달뜬 뺨을 식혀 줬다. 그렇게 잠시간 눈을 감고 찬 공기를 만끽하는 사이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는 조용히 묻혔다.
“당신…….”
신중한 목소리에 뒤늦게 인기척을 눈치 채고 등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누군가 다가온 뒤였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샬럿의 팔을 잡았다. 다행히 창가 바로 아래 카우치가 있었기에 둘 다 엉덩방아는 찧지 않았다. 엉거주춤 카우치에 마주 앉자 여자가 미소 지었다.
“샬럿, 맞죠?”
“…드누아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설마 했는데.”
“그게…….”
반가운 그녀와 달리 상대는 희게 질린 안색이었다. 루이스는 파리해진 샬럿의 얼굴을 보며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걱정 말아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리하르트 켄싱턴은 달라붙는 여자들에게 모두 냉담하게 반응해 사실 남색가가 아니냐는 말까지 떠돌던 남자였다. 그런 인물이 보란 듯이 여자를 다정하게 에스코트하여 동행하다니. 고상함에 금이 가지 않게 연기하던 얼굴들에 아마 경련이 일었으리라. 아닌 척 흘깃흘깃 위를 올려다보던 날카로운 시선들을 떠올리면 샬럿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겁에 질린 순진한 초록 눈동자를 바라보며 루이스는 며칠 전을 떠올렸다.
아버지도 자리를 비운 낮이었다. 대뜸 그가 찾아왔다는 하녀의 말에 루이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완벽히 끝났고 미련 또한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심 스멀스멀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런 여지마저 잘라 내려는 듯, 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무감한 얼굴로 폭탄 하나를 던지고 돌아갔다.
‘작은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제안… 이요?’
이어지는 말에 정수리 위로 얼음물이 부어지듯 다소 충격적인 진실이 그녀를 덮쳤다. 공작 영애, 혹은 타국의 왕족과 결혼할까 싶던 남자의 연인은 그날 연회에서 그녀를 붙잡고 그를 구해 달라 하소연하던 하녀였다. 예쁘긴 했으나 가진 것 없고 눈물만 많아 보였던.
경악할 만한 사실에 그대로 굳어 버린 루이스를 응시하며 리하르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홍차가 식기도 전이었다.
‘…해서 그녀를 친구처럼 보살펴 줬으면 합니다. 사람들 앞에 내보일 때마다 도망치려 들 테니까.’
제 용건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듯 바로 외투를 챙겨 든 그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할 겁니다.’
그의 서명이 있는 백지수표였다. 어떤 금액을 적던 그대로 들고 가 은행 창구에 내밀면 바로 현금이 되어 돌아올.
집안이 기운 데다 마지막 희망마저 끊기자 드누아 남작은 적절한 대가를 지불할 남자에게 언제든 그의 딸을 줄 의사를 보였다. 그런 절박한 상황의 그녀로서는 차마 외면하기 힘든 강렬한 유혹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자 수락할 줄 알았다는 듯 리하르트가 바로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에 대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
‘그렇게 진지한 사이인가요?’
몸소 찾아와 귀족인 그녀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는 건 즉, 연인을 귀족 사회에 편입시킬 의사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곧 결혼을 의미했다. 한번 물꼬가 터지자 물음이 바로 이어졌다.
‘하녀와 결혼하는 남자는 없어요.’
‘거기까지는 당신이 알 바 아닙니다.’
‘그녀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상처받을지는 생각 안 해 봤나요?’
단순히 질투로 나온 질문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귀족으로 태어났고 상류사회의 일원이었으나 빈곤해지기 시작하면서 처절하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귀족만큼 지독히 위선적이고, 오만하고, 배타적인 족속이 없다는 것.
‘많이 사랑한다면, 차라리 함께 멀리 떠나는 게…….’
열변은 이어지지 못했다. 리하르트가 뒤를 돌았다.
‘드누아 양.’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따지듯 자신을 마주한 여자를 느른히 마주했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이스가 피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난 고작 사랑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타오르는 불에 몸을 내던지는 멍청이가 아니야.’
깍듯한 존대는 어느새 자연스레 하대로 변했다. 애써 숨기려 들지 않는 경멸이 냉기 어린 시선에 배어 있었다.
‘사랑한다 기다리겠다 지껄여 놓고 바로 다음 약혼자를 찾아 헤매는 족속 또한 아니지.’
‘…….’
‘내가 아직 눈물 뚝뚝 흘리며 무사히 돌아오겠노라 거듭 약속하던 애송이로 보입니까?’
말이 이어질수록 루이스의 동공이 커졌다. 기억하고 있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지운 줄 알았는데.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고, 어쩌다 마주쳐도 금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라리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좋겠으나 그것조차 아니었다. 그저 관심 자체가 없었던 것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한바탕 격랑이 지나간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리하르트가 이내 손을 치웠다.
‘알아들었으면 연락을 기다려요.’
뚜벅뚜벅 문으로 다가간 그가 응접실을 나갔다. 황급히 뒤따라간 루이스가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이것만, 이것 하나만 말해 줘요.’
‘…….’
‘2년 전 날, 조금이라도 사랑했나요?’
팽팽한 침묵이 두 남녀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생각하듯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리하르트가 나직이 대꾸했다.
‘어쩌면.’
마치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어투. 그 묘한 위화감을 곱씹을 새도 없었다. 그는 들이닥쳤을 때처럼 떠났으니까.
회상은 끝났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뜬 루이스가 샬럿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 카우치에서 일어나 탁상 위의 주전자를 들어 그 앞에 놓인 컵에 따랐다.
“조금 취한 것 같은데 마셔요.”
리하르트 켄싱턴은 소름 끼칠 만큼 철저한 남자였다. 그는 샬럿 헤겔과 언제든 깨질 아슬아슬한 관계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미리부터 도망갈 구석을 차단하고 어떻게든 연인을 옭아맬 작정이리라.
전부 가질 셈이었다. 그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아직 여물기 전, 수줍음이 많고 말이 없던 청년은 이미 죽었다. 돌아온 건 다른 남자다. 루이스는 뒤늦게야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