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64)

25.

샬럿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가난한 소녀에게 세상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개인차야 있겠지만, 노동계급 가정의 소녀들은 대개 빠르게 현실을 깨달았다. 세상천지에 절대적인 자기편은 없다는 걸.

샬럿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게 음침하게 계집애가 이런 큰돈을 숨기고 있냐?’

놀러온 사촌 오라비가 아껴 두었던 저금을 훔쳤을 때도.

‘이게 얼마짜린데 감히!’

부르튼 손으로 주인집 설거지를 하다 그만 손이 미끄러져 접시를 깨고, 그 파편에 다쳤을 때도.

‘네가 먼저 살랑거렸겠지. 주제도 모르는 년이.’

첫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원인 제공을 했구나.’

‘어쩜 그리 아둔하니.’

잘못했을 때도, 잘못하지 않았을 때도 똑같았다. 언제나 비난의 화살은 제일 약자에게 꽂히기 마련.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변명하고 울음을 터뜨려도 소용없었다.

언젠가부터 샬럿은 깨달았다. 세상이 자신에게 유난히 각박한 게 아니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잘못된 자리에서 태어난 그녀의 운명.

그랬기에 귀를 파고든 목소리에 심장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충격이었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당황, 놀람, 두려움, 기쁨, 슬픔, 의문. 그 모든 감정들이 얽히고설켜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상냥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부른 뒤에야 샬럿은 제게 꽂힌 여러 쌍의 시선을 인지했다.

“아… 그게…….”

속으로 숨을 가다듬은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반듯한 이마, 섬세하게 각진 눈썹,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 오랜만에 조우한 그는 여전히 늘씬하고 오만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줄곧 생각했다. 문명과 야만(野蠻)이 조화를 이룬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입 안이 말라 침을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말이 터져 나왔다.

“네. 다녀왔… 습니다.”

호흡이 밭았다. 붉어진 그녀의 눈매를 응시하며 남자가 웃었다.

***

단번에 얼어붙은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까지도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바로 부탁한 걸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리하르트는 바로 방을 나섰고, 샬럿 또한 문이 닫히기 무섭게 제니스에게 인사한 후 뒤따라 나왔다.

“후…….”

혼자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노크를 할까 했으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뒤늦게 연회 날 밤이 떠올라 주춤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용기를 낸 샬럿이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실례합니다.”

방 안은 여전히 넓고 정갈했다. 낙타의 털로 직조한 양탄자, 붓꽃 문양이 은은하게 새겨진 감람색 커튼, 자단(紫檀)을 양각해 만든 벽난로.

그는 문을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주춤대며 들어오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서걱대는 종이소리가 멎자마자 방금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감한 시선이 샬럿을 마주했다.

“…리하르트 님…….”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펜을 움직이기 시작한 리하르트가 툭 내뱉듯 말했다.

“왔군요.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무슨.”

“조금 전 일이요.”

아까 일은 기억나지도 않는다는 듯 되묻는 그의 태도에 샬럿이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 사람을 찾아간 건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아는 사람이라길래…….”

“그것뿐입니까?”

“예?”

감정이 없는 목소리. 상대가 할 말을 찾아내기 전에 리하르트가 먼저 툭 내뱉었다.

“그새 입이 굳어 버린 것 같으니 대신 말할까.”

“…….”

“진실을 알고 싶었을 겁니다. 그놈은 그럴 만한 위인은 아니다, 뭔가 내막이 있었을 거다 여겼을 테니까.”

“아니에요. 린튼 씨는……!”

“헤겔 양.”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내뱉은 반론은 차가운 일갈에 막혔다.

“감히 내 앞에서 그 이름 꺼내지 않는 게 좋습니다.”

뚝, 펜이 부러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마주했다. 신경이 올올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북풍처럼 싸늘한 경고와 달리 목소리는 느릿하고 고저가 없었다. 마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삼킬 기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그녀를 한입에 삼켜 버릴 듯 으르렁대던 리하르트가 별안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걱정되어 묻기도 전에 뇌까리는 말이 들렸다.

“아. 그렇군.”

“…….”

“나도 동급인가. 나 또한 당신을 ‘장난감’ 취급하고 갖고 노는 파렴치한 새끼니까.”

“아니, 아니에요……!”

“나가요.”

다급한 부정에도 코웃음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일별한 리하르트가 명령했다.

“나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은 샬럿이 스스로의 의지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제이미 린튼과 리하르트 켄싱턴은 달랐다. 여러 가지 일들이 샬럿의 기억 속을 스쳐 지나갔다.

첫 만남 때, 그는 자신을 황야의 늑대로부터 구해 줬다.

비가 오는 날 구덩이에 빠졌을 때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굴렀다.

저택에서 따로 겉돌던 그녀에게 일을 주었으며 어머니의 약값도 말도 없이 내주었다.

그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던 고향 이야기도 질리지 않고 들어 주었으며, 상처 난 발도 손수… 치료해 줬다.

맞닿은 피부, 눅눅한 공기, 빠르게 뛰는 심박동.

처음에는 그를 향한 감정이 두려움이라 여겼다. 하지만 모든 순간마다 떨렸고 그에게 매료되었다. 저항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이끌림.

마음은 이미 이것을 사랑이라 인정했다. 그러나 무서웠다.

“그날은… 그저 놀라서, 무서워서 그랬어요.”

“…….”

“정말이에요. 싫어서는 아니었어요.”

먼저 밀어내 놓고 그가 완전히 등을 돌리려 하니 겁이 났다.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을까 봐. 다시 그녀를 바라봐 주지 않을까 봐.

그래서 그녀는 다급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총에 맞으셨을 때…….”

천천히 책상 앞에서 멈춰 섰다. 팔을 뻗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등을 만졌다. 다행히 리하르트는 거부하지 않았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샬럿.”

“다신 눈 뜨지 않으실까 봐…….”

심장을 쥐어짜내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다시 되풀이됐다. 피에 물든 셔츠, 의식 없는 창백한 얼굴…….

“다 당신 것이에요.”

“…….”

“어찌할 도리도 없이… 내 몸도, 영혼도 전부.”

어미의 젖을 찾는 갓난아기처럼 헐떡이며 샬럿이 필사적으로 핏줄이 불거진 큰 손을 끌어 제 뺨 위에 얹었다. 미열이 오른 볼에 차가운 체온이 닿아 시원했다.

“그러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변심한 연인에게 애원하듯 속삭였다.

“제발 나가라고 하지 마세요.”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팔이 순식간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가 입술을 덮쳤다.

“읍……!”

굶주린 야수가 달려들었다. 뒷걸음질은 소용없었다. 혀와 혀가 얽혔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은 크고 단단했다.

그는 마치 입마개가 풀린 맹견 같았다. 혀뿌리까지 탐하는 무자비한 탐욕에 숨이 막혔다.

“숨, 숨이……!”

애원하자 입술이 떨어졌다. 긴 은사가 끊어지자마자 밭은기침이 기도를 타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자유였다.

“아……!”

잠시 자비를 베푸는가 싶던 리하르트가 그대로 그녀를 탁자 위에 눕혔다. 그 바람에 그 위에 있던 잡다한 것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리, 리하르트 님……!”

“쉿.”

독니에 목덜미를 물린 것처럼 화들짝 놀란 샬럿이 파르르 떨었다.

“다 준다고 했잖아.”

“…….”

고개를 숙인 리하르트가 창백해진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수컷의 눈을 하고서 얇디얇은 신사의 가면을 유지했다.

“얌전히 있어요. 헤겔 양.”

그리곤 다시 무자비하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읍… 아!”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교미하는 야만스러운 짐승 같은 키스였다. 들어온 혀가 도망가려는 그녀의 것을 휘감고 삼킬 듯이 당겼다. 뱀처럼 똬리를 튼 두 혀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목깃의 단추가 뜯겨 나갔다.

여린 등 뒤로 손을 집어넣은 리하르트가 어느새 찾아 쥔 페이퍼 나이프로 능숙하게 그녀의 코르셋 끈을 툭, 툭 잘랐다. 치열과 입천장, 입 안 구석구석을 정복당해 잠시 넋을 놓은 샬럿이 뒤늦게 차가운 공기에 몸을 움츠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가 키스에 집중하지 못하자 리하르트가 입술을 뗐다. 봉긋 드러난 흰 젖가슴을 가차 없이 그러쥐었다.

“아응!”

“귀엽게 우는군요.”

두 손으로 말랑한 가슴을 주물거리다 한 손으로 왼 가슴의 유두를 세게 집었다. 통증과 함께 밀려든 야릇한 감각이 샬럿의 모든 감각을 장악했다.

“으응……!”

“맛있어 보이는데. 먹어도 됩니까?”

애초에 대답 따위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샬럿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짧게 웃은 그가 다른 가슴을 물었다. 혀로 유두를 굴리고 길게 핥아 올렸다. 어미의 젖을 빠는 아이처럼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왼 가슴을 희롱했다.

“아아……!”

짜릿한 통증에 샬럿이 몸을 더욱 뒤틀었다. 수치심과 쾌락에 정신이 팔린 사이 리하르트가 정점을 콱 깨물었다. 끝내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는 달래듯 귓불과 목을 부드럽게 핥았다.

“흐윽… 아…….”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그는 얼굴을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붉은 혀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 흰 피부 위로 곳곳에 열꽃이 생겨났다. 귓불과, 귀 뒤, 목과 쇄골, 그리고 가슴.

끈질긴 애무에 파들파들 미약하게 그를 밀어내던 힘이 점차 약해졌다. 그 틈을 타 그가 그녀의 아래 속옷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저항을 하기도 전에 긴 손가락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윽……!”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자극에 샬럿이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은 리하르트가 분주히 손을 놀리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끝까지 안 할 겁니다.”

“앗, 아… 으윽…….”

부드럽게 이야기했으나 상대는 이미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작은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준비 과정 같은 거니까.”

당장이라도 안으로 파고들고 싶었으나 겨우겨우 손에 넣은 토끼였다. 한입에 가죽을 벗겨 씹어 먹기엔 너무 여리고 약했다. 어차피 금방이었다. 포식이 조금 늦춰지는 정도야 양보할 수 있었다. 물론 계속 이렇게 순종적으로 군다는 전제하에.

눈꼬리로 흐르는 눈물을 게걸스럽게 핥은 리하르트가 느릿하게 검지와 중지를 모아 그녀의 안으로 집어넣었다. 노골적으로 느릿하게 들락거리던 손가락은 이내 축축한 내벽을 긁어내렸다.

“느껴져?”

“하응……!”

이미 샬럿에게는 남아 있는 이성도, 수줍음도 없었다. 그가 닿는 곳마다 전류처럼 쾌감이 흘러 저절로 발끝이 곱아들었다. 샬럿이 밭은 숨을 헐떡이며 도리질을 쳤다.

“아아……!”

만족스럽게 웃은 그가 다시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갈증 난 사람처럼 그녀의 가슴을 빨았다. 부드럽게 오가던 손이 점점 빠르게 그녀의 안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가 빠져나올 때마다 클리토리스가 마찰하며 절정을 앞당겼다.

“아윽, 응……!”

숨이 멎을 듯이 짧은 호흡과 교성을 토해 내던 샬럿이 어느 순간 몸을 굳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전신이 경련하듯 한차례 얼어붙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으응……!”

다음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물밀듯 밀려온 절정이 파도처럼 단번에 그녀의 몸을 집어삼켰다.

“하아, 하…….”

샬럿이 실신하듯 눈을 감았다. 이마에 찬 입술이 느껴졌다. 축 늘어진 몸을 그가 옭아매듯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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