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64)

22.

“뭐?”

“생각해 봐. 상대는 군 입대도 안 한 갓 스무 살 난 애송이였어. 제대로 사냥도 해 본 적 없는 놈한테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리하르트가 순순히 당할 리 없지.”

“그, 그건…….”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 일리 있는 추측에 프란츠가 한 차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말해 봐.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거지? 대체 뭘 위해서?”

추궁이 좀 더 집요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했다.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을 피한 프란츠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닫았다. 아직은 얘기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프란츠. 이번이 두 번째 정학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두 번째부턴 가차 없이 수도원으로 보낸다고 들었…….”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알고 있는 걸 얘기할게. 대신 비밀이야. 알았지?”

대답 대신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가까이.

“이건 정말 비밀인데……….”

딱 좋은 거리에 왔을 때 목소리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유모의 딸 때문이야.”

“…샬럿?”

예상치도 못한 말에 펠릭스가 숨을 들이켰다.

“응. 진짜 생각 못 할 우연인데, 샬럿이 그 남자의 집에서 일했었다나 봐. 잘은 모르지만…….”

얼어붙은 채로 귀를 기울이는 ‘두 경청자’를 향해 프란츠가 또박또박 말했다.

“삼촌도 못 만나고 한바탕 행패 부리고 간 다음 날, 그녀가 이곳에서 일한다는 걸 알아낸 그 남자가 혹시 이번 소송과 관련이 있나 싶어 그녀를 만나려고 몰래 숨어들었대.”

“그럼 그때 리하르트와……?”

“응. 삼촌도 운이 없었지. 말리려는 과정에서 상대가 갑자기 총을 빼내 들었고. 그러다가…….”

뒷말은 펠릭스가 끝맺었다.

“…총에 맞았군.”

쨍그랑.

펠릭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

“리하르트 나리가 총에 맞으셨다! 주치의를 불러!”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경악스러운 변고에 미스티무어 홀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샬럿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넓은 홀을 울리는 얽히고설킨 목소리와 다급한 발소리.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잡일 하녀와 침착하게 고용인들을 지휘하는 제니스, 주치의를 부르러 간 시종과 지혈을 시도하는 하인. 많은 사람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도련님! 눈 뜨셔야 합니다! 정신을 잃으시면 안 돼요!”

“주치의는 언제 오시는 거야? 지금 한시가 급한데!”

“백작 나리께는 전보 드렸나? 부인께도?”

하인의 등에 업혀 들어온 남자는 어느 때보다 창백했다. 수없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도 분명히 보였다. 피범벅이 된 흰 셔츠. 축 늘어진 손과 의식 없는 단정한 얼굴.

“리…하르트 님…….”

이게 무슨 일인지 인지하자마자 제일 먼저 숨이 턱 막혔다. 넓은 공간임에도 공기가 없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표백된 듯 새하얘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왼 가슴을 찌르고 심장을 도려내는 듯 생생한 고통. 총에 맞은 사람은 그인데 마치 자신이 피격당한 느낌이었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럿.”

“…….”

“샬럿! 정신 차려!”

“…프란츠 도련님.”

간신히 의식을 찾은 샬럿이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새파랗게 질린 프란츠가 몇 번 입술을 열었다 닫더니 이내 침착하게 다시 운을 뗐다.

“괜찮아. 삼촌은 죽지 않을 거야. 제니스 말로는, 그래도 급소는 피했다고 했어.”

“하지만… 저렇게 피가…….”

“샬럿.”

더듬거리며 손을 떠는 그녀의 어깨를 더 힘주어 잡은 프란츠가 다정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

“샬럿!”

확답 아닌 확답을 받자마자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샬럿이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범인은요?”

“치안 판사에게 연락했으니 곧 수감하러 올 거야.”

숨이 트이니 뒤이어 의문이 이어졌다. 머릿속으로 간신히 질문을 정리한 샬럿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제 왔던 분인가요?”

잠시 물기 어린 초록 눈을 바라보던 프란츠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런가 봐.”

리하르트 대니얼 켄싱턴의 피격 소식은 순식간에 그레델 힐 전체로 퍼졌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한 지방에서 모처럼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인지라 그 파급력이 엄청났다. 미스티무어 홀의 고용인들은 매일 손님 접대와 간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졌다.

“오늘 방문객은 정확히 열다섯 명이었어. 그중 절반이 수도에서 오신 분이더라.”

“여왕 전하의 조카이신 에드윈 경께서도 외국에서 친히 편지를 보내셨다며?”

“그뿐이니? 상심한 백작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산호로 만든 찻잔 세트에 다이아몬드 귀걸이까지 선물로 보내셨잖아. 그 가족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각별한 사이이신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정말 다행이지. 총탄이 박힌 곳이 어깨라서.”

“응. 오른 어깨에 부상을 입으셔서 한동안 글을 쓰지는 못하시겠지만 이김에 좀 쉬시는 거지.”

“어서 쾌차하시면 좋겠다. 그렇지, 샬럿?”

반쯤 넋을 놓은 채 리넨으로 은수저를 닦던 샬럿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방문 때문에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때였다. 비록 고용인 신분으로 머무는 게 아니라 해도 샬럿은 저번 클로필드 때처럼 나서서 손을 보태고 있었다.

“맞아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직도 의식 없는 리하르트를 목도했을 때의 그 섬뜩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젠가 옷소매에 묻은 핏자국처럼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가 없는 얼룩 같았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사실 이곳을 떠나려면 지금이었다. 모두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 아무도 그들 모녀를 신경 쓰지 않을 지금.

그러나 결국 떠나지 못했다. 짐을 꾸려 놨는데도 떠나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가 목을 움켜쥐고 기도를 콱 막아 버린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였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경멸하면서도 미처 고치지도 못했다. 언젠가 그 고민을 어머니에게 털어놨을 때, 신시아는 상냥하게 딸의 손을 잡았다.

‘그건 네가 정이 많아서 그런 거란다. 아가.’

‘그런… 건가요?’

‘그럼. 무엇을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분명 버림받겠지. 너는 그것까지 걱정하고 고려하느라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뿐이야.’

정말 과연 그뿐일까?

상념에 젖은 샬럿의 귀에 하녀들의 대화가 뒤이어 흘러들었다.

“뭐, 다 일단 깨어나신 뒤의 일이지. 주치의 말씀에 생명엔 전혀 지장이 없다셨지만, 의식을 아직 되찾지 못하시니… 걱정이야. 이러다 1년, 2년이 흐르면…….”

“메리,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전쟁까지 겪은 분인데 설마 그러겠니? 곧 눈 뜨실 거야.”

그래. 의식을 되찾으실 때까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매일 매순간 온 신경이 2층의 방으로 향했다. 곁방에 주치의가 항시 대기하고, 환자의 절대 안정을 위해 방문객들조차 하루에 한 번 밖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방.

매일매일 아닌 척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가 이전과 다름없이 무사한 것만 보고나면 한결 편해질 것 같았다. 비록 얼마 전 그녀를 겁박하고 가차 없이 몰아붙였어도 돌이켜 생각하면 도움을 받은 적이 더 많은 게 사실 아닌가.

시선이 가고, 마음 일부를 내주고, 속절없이 이끌리는 데까지 아주 조금씩 걸렸다. 적절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러니 정리하는 게 옳았다. 그가 의식을 되찾으면 그날 바로…….

또 한 번 다짐을 되새기는 중에 탁자를 사이에 두고 분주하게 움직였던 손이 멈췄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샬럿이 눈앞의 상대를 향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요, 메리?”

잠시 아랫입술을 깨문 하녀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샬럿. 부탁이 있는데.”

“네?”

마지막 나이프를 깨끗이 닦아 내려놓은 샬럿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부탁인데요?”

“오늘 네가 리하르트 님 방 청소 담당이지?”

“그렇죠.”

“그거, 내가 대신 하면 안 될까?”

샬럿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만은 곤란하다고 거절하려는 순간, 계단 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세 명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제니스 님. 오셨어요.”

“그래.”

샅샅이 훑듯 그들을 내려다본 제니스가 느릿하게 그중 한 명을 불렀다.

“샬럿?”

“네.”

“펠릭스 님이 오셨구나. 응접실에 다과와 차를 좀 내주렴.”

“금방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결국 올라가는 건 메리가 되었다. 다과를 준비한 샬럿이 제니스가 가리킨 방으로 향했다.

“펠릭스 님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연회 때 스펜서 공작 영애와 함께 있던 그가 떠올랐다. 설마 사촌과 공모한 건 아니겠지만.

“…프란츠 도련님과 계시다니까 괜찮겠지.”

잠시 멈춰서 심호흡을 한 샬럿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응접실 문 앞에 다다라 노크를 하려는 때였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예기치 않게 은밀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유모의 딸 때문이야.”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석고처럼 굳어 버린 샬럿의 귀에 말이 드문드문 들어왔다.

“샬럿이 그 남자의 집에서 일했었다나 봐.”

아니야. 아닐 거야.

“말리려는 과정에서 상대가 갑자기 총을 빼내 들었고 그러다가……….”

아니야……!

“…총에 맞았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그녀를 비웃듯, 조금 굵은 목소리가 확인사살을 했다.

쨍그랑.

샬럿의 손에 들고 있던 은쟁반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무언가 산산이 조각나는 소음이 복도를 울렸다.

“누구야!”

예기치 못한 불청객에 문을 홱 열어젖힌 건 펠릭스였다.

“…샬럿 양?”

“정말인가요?”

놀란 얼굴과 마주할 새도 없이 샬럿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처절한 기세에 한걸음 물러나자 펠릭스의 재킷을 붙잡은 그녀가 매달리듯 빠르게 추궁했다.

“사실이 아, 아니죠?”

“…….”

“리하르트 님이, 나 때문에…….”

혈관에 독이 퍼지는 것 같았다. 희게 질린 입술이, 짓무른 눈가가 잘게 경련했다.

“나 때문에 총에 맞으신 게…….”

“샬럿 양. 일단 진정하고…….”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펠릭스였다. 상황을 판단한 그가 샬럿의 손을 떼어내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입술을 달싹였다.

“리하르트는…….”

“리하르트 나리가 깨어나셨어요!”

그 순간 누군가 위층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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