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64)

21.

병. 불치. 리하르트.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혼란스러운 샬럿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강렬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첫날, 핏기 없는 비스크 인형처럼 안락의자에 늘어져 있던 리하르트. 손대는 순간 그대로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아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시는데요.”

그래. 그러나 첫날뿐이었다. 체격도 있고 근육도 탄탄해 현역 장교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인데. 샬럿의 지적에 프란츠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평소엔 멀쩡해 보이는 불치병이 세상엔 꽤 많아. 그 예로 혈우병이라든가.”

“그, 그럼 치료 중이신가요?”

묻는 말이 떨렸다. 프란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비밀리에 계속 약을 연구하고는 있지만, 아직 턱도 없는 단계야. 세간에선 제대로 된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희귀한 병이거든. 우리 가엾은 증조부께선 나이 서른에 절명하셨다고 들었어.”

“…절명…….”

“보통 결말은 둘 중 하나긴 했지. 젊어서 요절하거나, 미쳐서 자살하거나.”

“그럴… 수가.”

충격에 얼어 버린 샬럿이 입술만 뻐금거렸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마주하며 프란츠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러니 아버지가 자식인 나보다 동생인 삼촌을 더 애지중지하는 거지. 그게 좀 불만이긴 하지만… 아!”

투덜거림은 이어지지 못했다. 달려들 듯이 소년의 양어깨를 움켜쥔 샬럿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벼, 병의 증상은요? 원인은…….”

그때였다.

탕!

“꺄아아악!”

“나리를 보호해!”

“총을 가져와!”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허겁지겁 창으로 달려간 프란츠가 닫힌 커튼을 젖혔다. 창 바로 아래에서는 혼비백산한 가운데 고용인들이 한곳에 몰려 있었다.

전신을 휘감는 불길한 예감. 비틀거리며 창가로 다가간 샬럿의 귀에 쐐기를 박듯이 다급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리하르트 나리가 총에 맞으셨다! 주치의를 불러!”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현실감이 들지 않아 혼란스러운 가운데 샬럿의 눈에 제압된 채 버둥거리는 한 사내가 들어왔다.

“이거 놔!”

어제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 악몽으로 남은 적갈색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

총을 쏜 괴한은 몇 년 전 샬럿이 일했던 집의 도련님이었다.

정확히는, 한때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하여간 운도 좋은 놈.”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친구를 향해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스멀스멀 얼마 전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키아라.’

‘그래도 끝까지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펠릭스. 보고 싶을 거야.’

벌게진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찍어 가리던 키아라. 딸과 함께 공작령으로 향한 스펜서 공작이 자초지종을 알게 된 건 며칠 뒤였다.

‘그놈이 감히 내 딸에게 망신을 줘?’

그날 밤의 일을 타인에게 전해들은 스펜서 공작은 격렬하게 분노했다. 덕분에 직접 찾아가 그 잘난 놈을 지팡이로 두들겨 패겠다는 백부를 말리느라 펠릭스는 진땀 꽤나 흘려야 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널 공작저로 끌고 오겠다는 분을 달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그걸 한 방에 해결해 버리는구나. 너.”

부딪쳐 봤자 피차 좋을 게 없는 사이였다.

스펜서가는 줄줄이 의회 상임위원장을 지내 왔고 여왕과도 핏줄이 멀지 않은 뼈대 있는 명문가였다. 켄싱턴가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일찍이 선박에 투자하여 큰 부를 축적했고, 최근에는 무역의 부흥으로 의회에 점점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이었다.

의도치 않게 두 사자 사이에 끼어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을 때, 뜻밖의 비보가 들려왔다.

‘펠릭스 나리! 리하르트 님께서 총에 맞으셨답니다!’

그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심장이 굳는 기분이었다. 리하르트가 총에 맞았다는 충격보다 기어이 백부가 이성을 잃고 일을 벌인 건가 싶은 걱정 때문에.

스펜서 공작의 사주가 아니라는 뒤이은 말에 안도한 것도 잠시, 곧바로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리하르트는 리하르트였다. 20여 년을 함께한 오랜 친구. 그런 친구를 걱정하기보다 혹시 하는 예상이 빗나가 안도한 자신이 한심했다.

미동도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뭐 일이 잘 풀린 건 사실이니. …혹시 알고 한 건 아니지. 응? 네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거기까진 아니잖아.”

“리하르트의 정신 상태까지 걱정해 주니 고맙다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펠릭스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배, 백작님?”

“네 말대로 그 문제는 해결된 거니 차후 머리 아플 일은 없겠구나.”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깜짝 놀란 펠릭스를 일별한 남자가 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창가로 다가갔다.

“법정 변호사가 이리 총 맞고 다니는 직업인 줄 알게 되셨다면, 되레 키아라를 단념시키시겠지. 안 그러냐, 펠릭스?”

“…….”

대답을 바라고 한 물음은 아닌 듯 입매를 비틀던 세이모어가 갑갑하게 닫혀 있던 커튼을 홱 열어젖혔다. 동시에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신 펠릭스가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기실, 그 노친네가 전면전을 걸어 왔어도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하하…….”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늘 온화한 백작은 예외적으로 제 동생 일에 있어서만큼은 가차 없이 이를 드러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감추려 허허 웃은 펠릭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으니,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렴. 와 줘서 고맙구나. 분위기가 이래서 변변한 대접 못 해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럼 또 오겠습니다.”

“제니스 부인이 배웅할 거다.”

문을 열고 나오니 과연 대기하고 있던 제니스가 현관홀로 앞장섰다. 오래 일한 고용인이라서 안면이 있던 터라 어색하지는 않았다.

“총알이 어깨를 맞혀 다행이군요. 생명에 이상이 없으니.”

“신이 도우셨죠. 다만 쓰러지시면서 머리에 충격을 받으셨으니 언제 눈을 뜨실까 걱정입니다.”

“금방 눈 뜰 겁니다. 대니는 전쟁도 겪었으니까. 곧 털고 일어나겠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그의 대답에 제니스가 멈춰 서지만 않았다면.

“부인?”

“…….”

“무슨 일이라도?”

거리를 좁혀 다가온 펠릭스가 거듭 물어본 뒤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아, 아닙니다. 그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아…….”

그제야 제 방금 말을 반추한 펠릭스가 어색하게 미소했다.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부르던 리하르트의 애칭이었다. 펠릭스뿐 아니라 백작도, 백작 부인도 그를 그리 불렀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부르지 않게 되더니 그가 제대해 돌아온 뒤부터는 아예 잊힌 이름이 되었다.

“종종 어렸을 때가 그리워요. 함께 말을 타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내기도 했었는데.”

기억을 더듬는 아련한 어조에 제니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자리에 있어서 잘 압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두 분은 가장 친한 친구였죠.”

“뭐… 그랬었죠.”

대답을 과거형으로 얼버무린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머쓱한 마음에 주위를 눈으로 훑는데 누군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 리하르트?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펠릭스가 눈을 비볐다. 그를 보고 잠시 당황한 소년이 금세 표정을 바꿔 다가오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잘 지냈어, 펠릭스 형?”

“…프란츠?”

“오랜만이야!”

놀란 눈을 한 펠릭스가 얼결에 물었다.

“너… 아직 방학 기간 아니지 않아?”

“그게… 이번 성적 우수상으로 받은 특별 방학이야! 하하. 형은 그것도 몰라? 졸업생이면서.”

말 좀 맞춰 달라는 듯 눈빛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어쩐지 흥미로운 느낌에 펠릭스가 장단을 맞췄다.

“아. 그랬지……? 깜박했다. 다닌 지 오래돼서.”

“이해해. 원래 나이 들면 기억력이 떨어진다잖아.”

“뭐? 야, 그건 좀 아니……….”

“제니스!”

프란츠가 발끈한 펠릭스의 말을 끊으며 옆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 오랜만에 펠릭스 형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샬럿한테 차 좀 갖다 달라고 전해 줘.”

***

응접실 문을 닫자마자 프란츠는 안도의 한숨부터 쉬었다.

“아까 거짓말 맞춰 줘서 고마워. 형.”

“별것도 아닌데, 뭘.”

카우치에 털썩 앉은 펠릭스가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곧이어 마주 앉은 프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삼촌 문병 온 거야?”

“그렇지. 얼마나 놀랐는지. 범인은 무슨 남작가 삼남이라면서?”

“응. 이름 들어도 모를 거야. 웬 깡촌 출신이더라고. 집안도 별 볼 일 없던데.”

“그런 집에서 어떻게 여길 찾아와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건데?”

“그거야……….”

자연스레 이어진 질문에 저도 모르게 대꾸하려던 프란츠가 두 손으로 입을 헙 가렸다. 수상쩍은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펠릭스가 은근한 어조로 추궁했다.

“왜 그래?”

“혀, 형도 들었잖아. 재판에서 패소한 사람이라고.”

매일 전국에서 수십 개가 진행되는 흔하디흔한 소송 중 하나였다.

소작민들과 지주 사이의 소작세를 둘러싼 분쟁조종. 그런 자잘한 지방법원의 재판은 시골에 적을 둔 젠트리 출신 변호사나 햇병아리 변호사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 보잘것없는 재판에 방청 신청이 폭발한 건, 소작민 무리 측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리하르트 켄싱턴이라는 소문이 돌고부터였다.

“그러니까 왜 그런 시시한 재판을 맡았느냐 그거야. 그것도 무보수로.”

“뭐… 봉사활동 아닐까? 잠시 휴식기도 가질 겸해서 좋은 일도…….”

턱도 없는 변명에 펠릭스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까놓고 말해서, 네 삼촌이 그럴 인간이냐?”

“그거야……!”

“그거야?”

“…지금은 아니지.”

점점 바닥을 기는 대답에 펠릭스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자 프란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밀리면… 아마 가만 안 두겠지. 등골이 서늘했다. 반격의 기미를 엿보는 사이 펠릭스가 맹공을 퍼부었다.

“총에 맞은 것도, 리하르트가 의도한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