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지금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샬럿이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혀 수풀에 숨자 어둠 속에서 두 남녀가 보였다.
“키아라 아가씨가 이제 인내가 닳았어. 어제는 아끼던 찻잔을 바닥에 던져 버리시던걸. 수도까지 남몰래 따라갔지만 만나 주지 않았다더군.”
“세상에. 그렇게 콧대 높은 아가씨를? 독이 오를 만도 하네.”
“그렇지.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데 청혼을 받지 않으면 공작님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부탁한 미약은?”
“아아. 여기. 하인에게 건네. 취하면 아가씨 방으로 안내하면 되겠지.”
수상한 대화에 샬럿의 귀가 번쩍 뜨였다. 종종 있다고 했다. 연회를 틈타 물밑 물건들이 나도는 일이.
“그 남자 이름이 뭐라고?”
“리하르트 대니얼 켄싱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안 돼.
모종의 음모를 듣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 강한 거부감이 솟구쳤다.
외투 안쪽으로 자신을 품에 안았던 손.
다친 발목을 그러쥐고 붕대를 감았던 손.
시선을 피하는 턱을 들어 올렸던 손.
리하르트가 그 손으로 다른 누군가를 안는 걸 생각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했지만 부정하기 힘들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 본능적인 불쾌함에 가까웠다.
“막아야 해.”
그녀가 알기로 리하르트 켄싱턴이란 남자는 결코 당하기만 할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부정한 모략에 휘말려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도 분명 불행해질 것이다. 처음 느낀 질투심에 그럴 듯한 변명을 덧씌운 샬럿이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일단 따라가자.”
결심이 서자 행동은 빨랐다. 샬럿은 밀담을 나누던 두 사람 중 미약을 넘겨받은 여자 쪽을 미행했다. 저택으로 들어서자 다행히 사람들이 많아 눈에 띄지 않았다. 여자는 메인 홀의 나선 계단을 올라 숙녀들을 위해 준비한 임시 파우더 룸 쪽으로 향했다.
여자가 향하는 쪽에 별안간 눈에 익은 두 사람이 보였다. 키아라 스펜서와 펠릭스 바커. 샬럿은 들킬까 싶어 벽에 바싹 붙어 몸을 감췄다.
“아가씨. 준비하라고 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정말 일을 저지를 생각인 거야.
샬럿의 손이 벌벌 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 느낌이었다.
무슨 수를 써야 한다며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가요? 얼굴이 창백한데.”
“아니요. 괜찮…….”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하려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상대가 놀란 눈을 했다.
“…당신은?”
샬럿 역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단언컨대, 키아라 스펜서는 에셀우드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여자였다.
딸의 말이라면 그 무엇이든 들어줄 지체 높은 아버지와 공작 영애라는 명예, 아름다운 외모와 당연하게도 뒤따라오는 구혼자들.
그녀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추종자 무리를 두고 여왕벌과 그 일벌들이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다 들었지만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향기 나는 꽃에는 나비뿐 아니라 냄새 나는 벌레도 꼬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늘 완벽하기란 불가능했다. 심신이 조금 지친 어느 날, 키아라는 오랜만에 사촌이 있는 목가적인 지방으로 내려왔다.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소꿉친구이자 친애하는 사촌인 펠릭스 바커였다. 조금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로 그가 불쑥 물었다.
“리하르트 기억나?”
“누구지?”
“응. 켄싱턴 백작님의 동생. 옛날에 같이 어울렸었는데.”
글쎄. 키아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날 듯 말 듯 했다. 이름은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의뭉스러운 반응에 펠릭스가 한마디를 덧붙이고 나서야 키아라는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네가 결혼하겠다고 그랬잖아. 나중엔 말을 바꿨지만.”
“아! 그 샌님?”
확실히 외모는 그녀의 취향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첫눈에 반해 집에 돌아가서 그렇게 통보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 사람, 성격이 내 취향이 아니야. 평생 서재 속에서 두꺼운 책에 덮여 살 사람이던걸.’
아무리 들이대도 친구의 사촌. 그 이상으로는 바라보지 않는 담담한 얼굴에 두 손을 들었더랬다.
“샌님이라니.”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킬킬댄 펠릭스가 경고했다.
“그 말을 후회하게 될걸.”
여상히 흘러 넘겼으나, 경고는 맞아 떨어졌다. 다시 재회했을 땐……. 그저 숨이 멎었다.
“키아라. 인사해. 리하르트야. 내가 말했던.”
그녀에게 먼저 그를 소개한 펠릭스가 뒤이어 그를 보며 말했다.
“리하르트, 오랜만이지? 내 사촌 키아라.”
눈이 마주친 순간 결심했다. 저 남자는 내 것이라고.
“너무해요. 아무리 못 본 지 좀 지났기로서니. 절 기억 못 하세요? 어릴 적에 우리 셋이 종종 어울려 놀았는데.”
교태로운 어조로 키아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루한 시골 생활이 조금은 즐거워질 것 같았다. 추문을 남기지 않는 선에서 미남자와 연애하는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놀이.
그래, 처음에는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했다. 과거의 자신이 오만했음을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 쉽게 봤어. 머지않아 그녀는 뼈아프게 인정했다. 안이하게 생각한 게 문제였다.
펠릭스 말이 맞았다. 리하르트란 남자는 샌님 같던 옛날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끔찍이도 냉담했다. 같은 붉은 피가 흐르는가 싶을 정도였다.
“키아라 스펜서 양.”
그간 숱한 구혼자들을 쥐고 흔들었던 입장이 역전됐다. 누구보다 정중하고 신사다운 태도에 이미 반쯤 넘어왔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오산이었다. 정중한 모습은 그저 가면에 불과했다.
은근한 초대와 유혹에도 싸늘하게 반응하던 남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언제까지 날 귀찮게 할 겁니까?”
이 이상 노골적일 수 없는 거절과 모욕. 마주한 얼굴은 여전히 근사해서, 귀 밑에 열이 올랐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럴 수는 없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나 최고의 것만 가지고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고야 말았다. 물건이든 남자든 다르지 않았다.
“귀찮게 하다니요. 그간 날 가지고 논 건가요?”
다짜고짜 집무실로 쳐들어 온 키아라를 보며 리하르트가 들고 있던 시가를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 동작도 지독하게 우아해서 더 모욕적이었다. 마치 허락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잡상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두 눈을 내리감으며 뻐근한 뒷목을 주무른 리하르트가 다소 고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일단 앉아요.”
“지금 명령하는 거예요?”
“여긴 내 집무실이고, 약속도 없이 찾아온 건 당신이야.”
“…….”
“두 번 말하는 건 질색이야. 앉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표정. 마치 눈앞의 죄인에게 사형을 내릴까 말까 하는 폭군의 얼굴이었다. 기가 한풀 꺾인 키아라가 카우치에 앉자, 가죽을 씌운 의자에서 일어나 마호가니 책상을 돌아 나온 그가 그녀와 비스듬히 마주 앉았다.
심호흡한 키아라가 입을 열려던 때였다.
“나는…….”
“기다려요.”
말을 끊자마자 방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았다. 감이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거의 짐승 수준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가 심상치 않은 두 남녀의 분위기에 재빨리 찻잔과 다과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끊어진 건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뒤였다.
“가지고 논다는 뜻은 압니까.”
“그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지는 않아요.”
“그럼 말해 봐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가지고 놀았는지.”
별다를 것 없는 말이었는데도 어쩐지 저 입술에서 흘러나오자 성적인 함의가 들어간 것처럼 야릇하게 들렸다. 더워진 공기를 느끼며 키아라가 장갑 낀 손으로 드레스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날 밤, 나랑 단둘이 있었잖아요.”
정확히는 사흘 전이었다. 펠릭스의 부탁으로 리하르트가 근처 도시에서 하루 종일 그녀의 에스코트를 했던 날. 두 사람은 무려 한 달 전에 예약한 가극장의 박스석에 나란히 앉아 가극을 관람했다. 그는 시종일관 신사다웠고 여왕을 모시듯 정중했다.
“함께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올 때, 내가 빈혈로 휘청했죠.”
기억하냐는 듯 눈으로 묻자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당신은 날 개인 타운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음흉하게도.”
겨우 그게 이유냐는 듯 리하르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클로필드까지 가기엔 거리가 멀었을뿐더러 근처에 저명한 의사가 있어 데려간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가고 난 뒤에 왜 와인을 권했죠?”
“많이 놀라 보여서 안정하라고 건넨 겁니다. 내키지 않으면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고.”
이어진 추궁에 바로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과연, 법정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불리는 남자다웠다. 의뢰인이 궁지 끝까지 몰려도 결국 극적으로 상황을 역전시켜 기어이 승소를 하고야 만다는.
‘아, 그 별명 몰라? 법정의 살인자.’
귀띔해 준 친구 한 명이 이런 말도 덧붙였다.
‘모르긴 몰라도 저 남자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는 될걸. 잔인할 정도로 가차 없이 몰아붙이니까.’
멋모르던 때에는 오히려 그 별명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금욕적이고 결벽적인 성품에 주제도 모르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나가떨어질 테니.
설마 자신 또한 예외가 아닐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나와 키스했잖아요.”
훅 들어온 항변에 리하르트가 한쪽 눈썹을 꿈틀 치켜들었다.
“물론 내가 달려들었지만 당신도 거부하지 않았어요. 그건 부정 못 하겠죠.”
취기에서 비롯된 충동이었다. 발끝을 최대한 세우고 목을 안았다. 혀가 얽히던 순간의 전율이 아직도 생생했다. 전신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
비록 그가 그녀의 뒷목을 잡거나 허리를 잡아 주지는 않았지만, 석상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으나 그래도 그녀 스스로 떨어질 때까지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결정적인 건 그다음이었다.
“그 뒤로 기억이 없어요. 눈 떠 보니 침대 위였죠. 잠옷으로 갈아입혀졌고.”
그가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에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자, 그가 허리를 강하게 휘어잡았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보일 때가 왔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더없이 수치스러울 테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서라도 남자를 잡아야 했다. 옷깃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린 키아라가 대담하게 목 왼쪽을 보였다.
“이 목에 난 자국. 당신이 만든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