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시녀의 말은 생각보다 파동이 컸다. 다음 날, 주일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그녀의 충고가 샬럿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남성 고용주와 가까이 지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말도 어쩌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을까.
목사의 설교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심란하고 복잡했다. 자연히 예배시간 내내 가족석에 앉은 백작 내외에게 시선이 갔다. 누가 봐도 문제없는 단란한 부부였다.
백작 부인이 제니스를 미워한다는 건, 남편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건데 어째서 쫓아내지 않은 걸까. 또 백작은 어떻게 옛 정부를 한집에 두고 아내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둘 수 있었을까.
어쩌면 완전히 제니스와 백작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일까? 그 정도로 아내는 남편을 신뢰하는 걸까?
고민해 봤자 남의 가족사였다. 하지만 같은 지붕 아래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신경을 쓰면 쓸수록 머리가 아팠다.
이해가 가지도 않았고, 어떻게든 이 기묘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드는 본인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 자리에 리하르트가 없는 것도 계속 의식하게 됐다.
샬럿이 혼란스러운 상념에서 벗어난 건 드디어 한 시간여의 예배가 끝난 뒤였다. 그녀는 구석 자리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고 교회를 빠져나왔다.
막 미스티무어 홀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샬럿 양.”
이곳에서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남자는 몇 명 없었다. 샬럿이 뒤돌아 인사했다.
“오늘도 뵙네요. 펠릭스 씨.”
“그거 보면 볼수록 반갑다는 뜻이죠?”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는 건 딱히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성격인 듯했다. 천진한 양치기 개 같은 펠릭스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남의 일로 심각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샬럿이 픽 웃는 사이, 그녀의 낡은 장갑에 시선을 둔 펠릭스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선물한 장갑을 착용하지 않았네요. 마음에 안 들었나요?”
“아……. 아니에요. 그저 분수에 맞지 않는 거 같아서…….”
“분수에 맞고 안 맞고가 어딨어요? 고작 장갑 하나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평생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자들의 특권처럼 느껴졌다. 돌려준다고 말하면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샬럿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러네요. 다음 주 주일부터는 하고 다녀야겠어요. 펠릭스 씨 덕분이에요.”
“거듭된 감사 인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게 고마우면 내 부탁 좀 하나 들어줄래요?”
“예?”
제게 말을 건 목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궁금증에 고개를 기울이자 펠릭스가 본론을 말했다.
“날씨도 좋은 데 같이 뱃놀이나 해 줘요.”
“뱃놀이요……?”
어제, 어머니한테 근처 호수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대뜸 나온 뱃놀이란 단어에 샬럿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떨떨한 반응에 펠릭스가 장난스럽게 찡긋 윙크하며 웃었다.
“그 전에 성스러운 주일 낮, 배에서 잠든 고양이도 하나 깨우고.”
***
호수는 숲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활짝 핀 금잔화 꽃이 고요한 호수 위로 노란 꽃잎을 흩뿌렸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계절마다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펴서 명소로 유명해요. 백작가의 사유지라 올 수 있는 사람이 드물지만.”
이른 새벽에 소나기가 내렸는지 땅은 축축했다. 샬럿의 치맛자락이 젖은 풀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예상이 어긋났네.”
“예상이요?”
“아, 별 뜻은 아닙니다.”
펠릭스가 걸음을 멈춘 건 빈 배 앞에서였다. 그가 말한 고양이는 없었다. 배 바닥에 깔린 담요와 쿠션 두 개만 보였다. 샬럿은 문득 이곳에서 낮잠을 자려면 잘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 호수 한복판에서 햇볕을 받으며 자는 잠은 얼마나 한가롭고 사치스러울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펠릭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배가 한 척 더 있으니 아마 그걸 타고 나갔을지도 몰라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뿐이었다. 샬럿이 배에서 시선을 떼며 의아한 눈빛으로 펠릭스를 바라봤다.
“고양이가요……?”
“아주 영리한 고양이거든요. 그만큼 까칠하지만.”
“펠릭스 씨가 기르는 고양이인가요?”
샬럿이 묻자 펠릭스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길러요? 길들이려고 하는 순간 피를 볼걸요.”
뒤이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작은 오두막 쪽이었다. 아마 창고인 모양이었다.
“노를 갖고 올 테니 기다려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 한 마리를 찾으러 이런 수고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자기가 키우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샬럿이 고개를 끄덕이자 펠릭스가 등을 돌려 멀어졌다. 홀로 남은 샬럿의 고개가 자연히 호수로 향했다.
마침 바람도 선선하고 날씨도 따스했다. 조금 전까지 찝찝했던 기분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동안 한 바퀴 둘러볼까 싶어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오두막에서 꽤 멀어지고 말았다.
“너무 멀리 왔네.”
이제 돌아가려 샬럿이 뒤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뭔가가 그녀의 시선 끝에 잡혔다. 먼발치의 기슭, 나무 그림자 아래로 숨은 듯 자리한 작은 배였다. 아마도 펠릭스 말한 배인 것 같았다. 얼마나 잘 녹아들었는지 자세히 쳐다봐야 보일 정도였다.
혹시 고양이가 있을까 싶어 샬럿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거의 다 다가갔을 때,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 있었다. 고양이는 아니었다.
“…리하르트 나리?”
배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리하르트였다.
그는 짙은 남색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서 긴 다리를 쭉 뻗고 왼팔로 눈을 가린 채 누워 있었다. 옅은 그림자 아래에서도 곧은 콧대와 날렵한 턱 선이 뚜렷하게 보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붉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미모였다. 마치 흠집 없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 같았다.
“샬럿 양?”
멀리서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샬럿이 등을 돌려 리하르트가 여기 있다고 말하려는 때였다. 매처럼 날렵한 손이 팔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대로 샬럿의 몸이 배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좁은 배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누웠다.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나왔다.
“…리, 리하르트 나리?”
“쉿.”
간신히 입을 열자 돌아온 대답은 한 음절이었다. 석양이 지난 후의 어스름같이 묘한 보라색의 눈동자가 바투 붙어 있었다.
“샬럿 양? 어디 있습니까?”
펠릭스의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
쿵쿵. 고동치며 울리는 심장 소리와 달리 차분한 숨소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참지 못한 샬럿의 입에서 다시 한번 딸꾹질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리하르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얼굴이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남이 본다면 애틋한 연인이라고 오해하고도 남을 자세였다. 닿은 체온을 의식하기가 무섭게 마비된 듯 온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밀어낼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고개를 드는 게 고작이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무구한 눈동자에 리하르트가 한쪽 입가를 올렸다. 여자는 마치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 같은 표정이었다. 혹은 사냥꾼의 덫에 걸려 덜덜 떨고 있는 새끼 토끼거나.
불쑥 이대로 뭉그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손에 닿은 피부는 따듯하고 부드러워서 움켜잡으면 손아귀에서 그대로 녹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샬럿 양!”
다음 순간, 지척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이상하네. 그새 어디 갔지.”
펠릭스가 근처에 있었다. 그녀를 찾으러 온 듯했다. 샬럿이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이려 할 때, 리하르트가 나직이 속삭였다.
“소리 질러 봐.”
“…….”
“이 모습을 들키고 싶으면.”
선택해야 했다. 당장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남자인지, 금세 어머니의 귓가까지 들어갈 추문일지.
결국 샬럿이 고른 건 전자였다. 한 번뿐인 기회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디 갔지…….”
다행히 몇 분 지나지 않아 펠릭스의 발걸음이 점차 멀어졌다. 반대편을 찾아볼 요량인 듯했다. 그제야 막혔던 숨이 트였다.
“하아하아…….”
샬럿을 놓아준 리하르트가 윗몸을 일으켰다. 그가 그대로 누운 샬럿을 내려다보더니 흐트러진 머리를 쓸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막 정사를 끝낸 남자 같았다. 자연스레 배인 분위기가 나른하고 퇴폐적이었다. 평화로운 주일 낮과 경악하리만치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넋을 놓고 올려다보는 샬럿에게 리하르트가 이죽거렸다.
“잠자는 사람 관찰하는 건 취미인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샬럿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니에요. 그냥… 여기 계신 줄 몰라서.”
“성스러운 주일에, 교회도 가지 않고 말이지.”
“…….”
그러고 보니 그레델 힐에 온 날도 주일이었다. 그때 이 남자는 총을 갖고 있었다. 안장 위에서 늑대를 쏴 죽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쩐지 놀림당한 느낌에 샬럿이 발끈했다.
“나리는, 예배는 안 드리시는 건가요?”
“리하르트.”
“…리하르트 님은 교회에 안 가세요?”
마지못해 정정한 호칭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 리하르트가 대답했다.
“노친네 설교를 듣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까.”
무례하다 못해 불경했다. 교구의 나이 든 목사가 듣는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소리였다.
“낮잠 주무시던 거 아니에요?”
“누가 깨우기 전까진.”
뭐라 대답할 수 없어 던진 질문에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