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64)

11.

전체적으로 차분했던 그레델 힐의 첫인상과 다르게, 마을은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목가적인 미스티무어 홀과 다른 지역이라곤 말해도 될 정도였다.

입구에서 말을 멈춘 리하르트가 곧이어 샬럿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 탈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런 에스코트를 받아 본 적 없어 멀뚱히 눈을 깜빡였던 게 조금 전이었다. 이번에는 샬럿도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발판을 디뎌 내려왔다. 그 순간이었다.

“헤겔 양.”

그가 어깨를 잡더니 부드럽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말 한 마리가 아슬아슬하게 샬럿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장에 앉은 사람이 미처 그녀를 못 본 모양이었다.

싸늘한 시선이 말이 지나간 자리에 훑는 사이, 공용 마구간의 말구종이 다가왔다. 샬럿의 몸에서 손을 뗀 그가 말구종에게 고삐를 넘기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지금 잠깐 은행에 갈 예정인데, 갈 곳 있습니까?”

만약 일정이 없다면 동행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샬럿이 바로 대답했다.

“그냥 주변을 좀 구경할까 해요……. 처음 왔으니까요.”

“알았습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이곳에서 보죠.”

데려다주겠다고는 했지만 돌아갈 때도 동행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걸어가기에는 확실히 먼 거리였다. 고개를 끄덕인 샬럿은 바로 뒤돌아가지 않는 리하르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재킷 안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은세공이 정교하게 들어간 시계였다. 척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라 샬럿이 손사래를 쳤다.

“받을 수 없어요.”

“빌려주는 겁니다. 기다리는 건 질색이니까.”

“그래도…….”

삐딱하게 웃은 그가 경고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

“그 손을 잡고 쥐여 주기라도 할까요?”

그 말에 샬럿이 잠시 내리깔았던 눈을 번쩍 들었다. 보는 눈이 많다는 건 사실이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자신들을 힐끗거리며 지나갔다. 정확히는 리하르트 켄싱턴을. 어딜 가던 관심을 독식할 만한 미모였다.

샬럿이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쥐여 준다뇨?”

“원한다면.”

선택지를 주는 듯싶어도 한쪽 길은 아예 막아 버린 뒤에 고르라는 건 의미가 없었다. 언뜻 정중하고 친절하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고 가는 남자였다. 샬럿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감, 감사히 쓰겠습니다.”

“지금이 두 시니 세 시에 보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등을 보인 리하르트가 금세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인파 속에 남게 된 샬럿 또한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샬럿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장갑 가게였다. 온갖 장갑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새틴 재질의 장갑, 프릴을 단 장갑, 소매에 진주로 장식한 장갑…….

샬럿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빠릿빠릿한 직원 하나가 다가와 친절히 물었다.

“찾으시는 장갑 있으신가요?”

“아니요. 좀 구경해 볼게요.”

과도한 친절에 교회에 갈 때 착용할 만한 것 중 가장 저렴한 장갑을 달라고 하기가 민망했다. 직원의 관심에서 벗어난 샬럿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가게는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곳인지 손님들로 가득했다.

장식장에 놓인 장갑들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옆에 서서 장식장을 구경하고 있던 여자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그 소식 들었어요?”

“무슨 소식이요?”

“요 근방에 늑대들이 요새 더 사나워졌대요.”

늑대라는 단어에 돌연 샬럿의 몸이 굳었다. 자신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들었던 늑대 무리가 생각났다.

“맙소사… 정말이에요?”

“그럼요. 물려 죽은 동물들이 황무지나 숲 곳곳에 버려져 있대요. 대개는 야생동물들이지만요.”

“이상하네요. 죽이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보통 먹기 위해 공격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요. 참 이상하죠…….”

들으면 들을수록 선득한 대화였다. 샬럿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샬럿 양.”

“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요. 뭘 보고 있었나요?”

마주한 남자는 펠릭스 바커였다. 그가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모습에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자 펠릭스가 민첩하게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랐어요?”

“아, 아니에요.”

자세를 바로 한 샬럿이 고개를 저었다. 펠릭스의 손이 떨어졌다.

“펠릭스 나리는 무슨 일로 여기에…….”

“그 경칭은 조금 어색하네요. 샬럿 양이 하녀도 아니고, 나도 고용주는 아닌데.”

리하르트가 그녀를 긴장시킨다면, 이 유쾌한 남자는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유형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펠릭스 님?”

“평범하게 불러요.”

“…펠릭스 씨.”

“듣기 훨씬 좋네요. 저택에 있는 것 같지 않고.”

질문의 답을 맞힌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씩 웃은 펠릭스가 조금 전 질문에 대해 대답했다.

“여기 온 이유는, 조금 있으면 키아라의 생일이거든요. 선물을 사러 왔어요.”

“그랬군요. 아가씨께 축하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백작이 리하르트에게 건넨 편지가 생각났다. 처음 보는 직인이다 싶었는데 스펜서 가문의 것이었나 보다. 둥글게 눈을 휘며 알겠다고 대답한 펠릭스가 방금까지 샬럿이 보고 있던 장갑에 시선을 던졌다.

“이걸 보고 있었나요?”

가격표에 찍힌 금액이 제 월급의 배를 넘는 장갑이었다. 샬럿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고른 건 없는데…….”

샬럿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펠릭스가 마침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세우더니 같은 장갑 두 켤레를 꺼내게 했다. 그리고 바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값을 치렀다.

잠시 후, 공단 리본으로 묶인 상자 두 개가 돌아왔다. 사촌 동생의 선물이구나 싶어 아쉽게 다른 진열장으로 걸음 하려는 순간, 펠릭스가 상자 하나를 쓱 내밀었다.

“받아요. 선물이에요.”

“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대뜸 앞에 놓인 작은 상자에 샬럿이 숨을 헉 들이켰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요.”

“기어이 내 손을 무안하게 만드시려는군요.”

마치 고백을 했다 실연당한 듯한 반응이었다. 키가 큰 남자가 마치 귀를 축 늘어뜨린 대형견처럼 보였다.

샬럿은 당황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가게라 보는 눈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저분은 클로필드의 펠릭스 씨 아니에요?”

“같이 계시는 숙녀분은 누굴까요?”

“보아하니 키아라 양 같지는 않은데…….”

모르는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건 딱 질색이었다. 척 보아도 숙녀들로 보이는 여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세상에, 얌전하게 생겨서는…….’

‘어떻게 주인집 아들을…….’

불쑥 떠오르는 목소리에 샬럿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받을게요. 감사해요.”

결국, 선택지는 없었다. 다급히 펠릭스의 손에 들린 상자를 받은 샬럿이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게 먼저였다. 장갑은 나중에 돌려줘도 괜찮으리라.

“같이 나가죠.”

샬럿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입구까지 성큼 걸어가 문을 연 펠릭스가 말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샬럿이 가게 밖으로 한 걸음 나간 순간이었다.

“…리하르트?”

“펠릭스.”

등 뒤에서 펠릭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리하르트 또한 예기치 않은 얼굴이었다. 서늘한 시선이 그와 샬럿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펠릭스에게 고정했다.

“키아라의 선물을 사러 온 거라면 이미 늦었어. 내가 샀거든.”

“유감이군. 그 목적이 아니라서.”

“아. 그래? 그럼 우리는 이만.”

우리라는 범주에 자연히 자신이 들어간 것에 샬럿의 어안이 벙벙해진 그때였다.

“헤겔 양.”

귀가 녹을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샬럿이 놀란 눈을 들었다.

“여기 있었군요.”

리하르트가 선물 받았음에 분명한 상자를 끌어안은 그녀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갑자기 없어지면 어떡합니까. 계속 찾았는데.”

주위에서 다시금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두 미남자를 저울질하고 버린 무정한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샬럿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놀란 그녀의 반응과 별개로, 그는 조용히 자리를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결국, 백기를 든 건 펠릭스였다.

“이런, 선약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실례했어요. 샬럿 양.”

“아니에요. 선물 다시 한번 감사해요. 펠릭스 씨.”

저번보다 친근해진 호칭에 리하르트가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것을 과시하듯 친구를 일별한 펠릭스가 뒤이어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또 보죠.”

“예. 저도 반가웠습니다. 또 뵈어요.”

샬럿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펠릭스가 리하르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샬럿과 리하르트, 두 사람뿐이었다.

멀어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샬럿에게 리하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그사이 꽤 친해졌군요.”

“그건… 오해세요. 그렇지 않아요.”

어쩐지 힐난당하는 듯한 느낌에 샬럿이 급히 부정했다. 친하다니, 그런 표현이 어울릴 만큼 섞일 수 있는 계급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하녀들의 일을 도와주며 그녀는 여러 정보를 들었다. 그중에는 펠릭스는 바커 백작의 외동아들이고, 장차 그 자리를 이을 후계자라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감히 비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다시금 빨개진 샬럿의 얼굴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서슴없이 부르는 듯해서 말입니다.”

“불편하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그랬군요.”

그의 눈이 그녀의 월급으로 분명 살 수 없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상자에 머물렀지만, 머지않아 떨어졌다.

“펠릭스는 원체 모든 여성에게 친절하니까.”

너 또한 별다르지 않다고, 네 처지에 그건 과분한 물건이 아니냐는 말로 들렸다.

반박할 수 없었다. 그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도, 돌려드릴 거예요.”

“뭘 말입니까?”

“이거요. 선물 받았거든요.”

리하르트가 입매를 늘렸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말없이 몸을 돌려 마을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샬럿도 걸음을 옮겼다. 이제 돌아가느냐고 묻자 짧게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샬럿이 다시 앞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건 그냥 가지면 됩니다.”

“예……?”

“선물 받은 거니까.”

당연한 걸 왜 자기에게 묻느냐는 투였다. 조금 전까지 언짢은 기색을 했던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 신분에 이런 물건을 가진 게 보기 좋지 않아서 언짢았던 게 아닌가.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샬럿이 혼란스러워하던 그때였다. 불현듯 리하르트의 걸음이 멈췄다. 하마터면 생각에 젖어 있던 샬럿이 그대로 걷다가 그의 등에 부딪힐 뻔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봤더니 먼발치서 한 젊은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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