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64)

10.

샬럿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이는 미스티무어 홀의 주인, 세이모어 아서 켄싱턴 백작이었다.

“아…….”

리하르트와 똑 닮은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샬럿은 마치 도둑질하다 걸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순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싸늘한 시선이 샬럿의 옷매무새를 살피는가 싶더니 그녀의 발에서 멈췄다. 피가 묻은 발과 그 뒤로 이어진 핏자국을 보며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다음 순간, 샬럿은 귀를 의심했다.

“어째서 멀쩡하지?”

“예……?”

마치 그녀가 침실에서 무사히 나와서는 안 되었다는 어투였다. 백작의 분위기는 처음 만났을 때와 딴판이었다. 차갑고 어딘가 날카로웠다. 다른 사람처럼.

샬럿이 놀란 눈만 끔벅이는 사이, 백작이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불길한 예감에 그녀가 눈을 꾹 감는 감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심부름.”

“…….”

“왔다더군요.”

샬럿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눈을 뜨고 뒤를 보자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잠긴 목소리로 샬럿 대신 대답한 리하르트가 그의 앞에 선 그녀를 흘깃 일별하곤 백작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시죠, 형님?”

“아아…….”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백작이 뻗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날 선 시선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이걸 전해 주려고 왔다. 남의 손에 맡기기가 조금 그래서.”

백작이 리하르트에게 건넨 것은 편지였다. 스펜서 집안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펼치지 않아도 알았다. 리하르트의 얼굴에 희미한 짜증이 스쳤다.

“감사합니다.”

“…….”

“또 무슨 볼일이라도?”

친형을 대한다기에는 거리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하고 깍듯한 태도였다. 백작이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어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푹 쉬어.”

“네.”

기다렸다는 듯 리하르트가 짧게 답하자 백작은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불청객처럼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던 샬럿 또한 엉거주춤 발을 내디뎠다. 그 모습에 같잖다는 듯 차게 웃으며 리하르트가 방으로 등을 돌렸다.

“들어와요.”

제안도 아닌 명령이었다. 거절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뒷감당이 두려웠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샬럿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자마자 착, 하며 커튼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침실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놀란 샬럿이 떨궜던 고개를 들자마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앉아요.”

어느새 벽난로 앞 장의자에 앉은 리하르트가 맞은편으로 고갯짓했다.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문으로 다가올 때 입었는지 다행히 조금 전과 달리 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샬럿이 머뭇머뭇 다가가 자리에 앉자 그가 그녀의 발목을 잡더니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나, 나리……!”

“용케 참았군.”

샬럿이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리하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처를 살피는 그의 얼굴은 어떤 음흉함이나 수상함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얼굴이었다. 되레 과하게 반응한 그녀가 민망할 정도로.

어쩔 줄 몰라 샬럿이 놀란 눈만 크게 뜨자 리하르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덮치려면 여기가 아니라 침대로 데려갔겠지. 안 그래?”

샬럿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흠 잡을 데 없는 신사의 얼굴로 날것 그대로의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니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각한지 눈살을 찌푸리던 그가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기다려요.”

등을 돌린 리하르트가 집무실로 향하는 문을 열더니 잠시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지금이라도 이곳을 나가야 하나 샬럿이 고민하는데, 머지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붕대와 핀셋 등을 가져온 리하르트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제야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샬럿이 잡힌 발을 빼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돌아가서…….”

“돌아가? 그 발을 하고?”

코웃음을 친 리하르트가 떼쓰는 어린애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

“아파도 좀 참아요. 금방이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뭔가 쑥 빠지는 느낌이 들더니 뒤이어 차가운 연고가 닿는 느낌이 이어졌다. 엄청난 고통을 예상하고 주먹을 불끈 쥔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놀란 샬럿의 시선이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리하르트의 머리칼에 닿았다. 가늘고 윤기가 도는 갈색 머리칼은 한 올 한 올 정성을 들여 짜 낸 새틴 같았다.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손에 잡히기도 전에 스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헤겔 양.”

저도 모르게 머리 쪽으로 손을 뻗던 중이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이름에 샬럿이 잠에서 깨어난 듯 크게 눈을 떴다. 다급히 치우는 그녀의 손을 본 건지 아닌지 샬럿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리하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한번 바닥에 디뎌 봐요. 안 아프면 걸어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샬럿이 붕대를 감은 발로 조심스럽게 바닥을 디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몇 걸음을 걷자 조금 찌르르한 통증이 있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아 보이는군.”

화색이 도는 샬럿의 얼굴을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등 뒤의 장의자에 앉았다. 샬럿의 몸이 움찔한 건 다음 순간이었다.

“이제 앉아요.”

“예……?”

마치 사탕을 받고 좋아하다가 회초리를 본 아이처럼 샬럿의 얼굴이 금세 흐려졌다. 도대체 감정을 숨기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못하는 여자였다. 그냥 멍청한 건가 싶었는데 볼수록 그도 아닌 듯했다.

망설이는 샬럿을 바라보며 리하르트가 다시 한번 턱짓했다.

“앉아.”

은근히 낮아진 목소리에 샬럿이 어깨를 좁히며 의기소침하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들을 자세가 됐다고 생각한 뒤에야 그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입술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할 말이요?”

생각지 못한 말에 샬럿이 되묻자 리하르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간에.”

할 말……. 많았다. 목구멍 아래로 꾹꾹 욱여넣었지만 차고 찼다. 왜 이렇게 자신을 싫어하는 건지, 아니 싫어하는 게 맞기는 한지. 혹은 그저 변덕인 건지. 또 저 약은 뭔지.

하지만 지금 그것을 물을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샬럿은 꾹 참고 다른 질문을 생각했다.

“왜 이렇게 익숙하세요?”

“뭐가?”

“발에… 조각 빼내는 거요.”

스스로 내뱉어 놓고도 어처구니없다 싶었다. 분위기를 완전히 깨는 수준이었다. 바보 같은 자신을 속으로 욕하고 있는데, 잠시 말이 없던 리하르트가 고개를 젖히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샬럿은 순간 생각을 잊었다. 짧은 순간이나 그 웃음이 뇌리에 강렬하게 박힐 만큼 청량했다. 일순 소년으로 보이리만치.

곧 언제 그렇게 웃었냐는 듯 고개를 바로 한 리하르트가 멍하니 있는 샬럿을 보며 대답했다.

“군대에 있었으니까.”

“몇 년이요?”

“2년 좀 넘게.”

“아…….”

2년. 적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샬럿은 하녀들에게 어렴풋이 들었던 리하르트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식민지 섬으로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잠시 실종됐고, 그러다 어느 날 밤 소리 소문 없이 돌아왔다고…….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웠을 게 분명한 과거였으나 마주한 얼굴은 태연했다. 마치 저녁 식사 메뉴를 말하듯이.

“그럼 이번엔 반대로 내가 묻죠.”

생각에 빠진 샬럿에게 리하르트가 급습하듯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바로 말을 이었다.

“여기로 누가 심부름을 보낸 겁니까?”

그 말에 조금 전에는 정말 잠결에 착각했구나 생각하며 샬럿이 바로 대답했다.

“제니스 님이요. 대신 전해 달라며…….”

“역시 그랬군.”

대답하는 순간 뭔가 불길했으나 애써 마음속 불안을 지워 버렸다. 잠시 알 수 없는 눈빛을 보인 리하르트가 곧이어 등받이에서 등을 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보고 들은 것 모두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대화는 이걸로 끝인가 싶었다. 샬럿이 살았다는 얼굴로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그가 이름을 불렀다.

“헤겔 양.”

고개를 들자 뒤를 돌아 창가 쪽에 선 리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마을에 내려가 본 적 있습니까?”

한번 업혀 본 적 있는 넓은 등을 응시하다 샬럿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가고 싶기는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월, 수, 금에는 그의 일을 도와 서기 일을 해야 했고 다른 날에는 어머니 신시아의 식사를 챙겨 주고 목욕시키는 등 돌봐야 했다. 그녀가 삼켜 버린 말을 유추했는지 여전히 등을 보인 리하르트가 대답했다.

“마침 잘됐군. 무료했는데.”

“예?”

“오늘 내려갈 일이 있어요. 같이 가죠. 데려다주겠습니다.”

샬럿이 뭐라 입을 열려 했으나 바로 다물었다. 거절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

지붕을 씌운 이륜마차가 흙길 위를 부드럽게 내달렸다. 마부는 따로 없었다. 고삐를 쥔 건 리하르트였다. 샬럿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 주변을 응시했다.

그레델 힐을 넓은 곳이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펼쳐진 황무지와 달리, 마을로 가는 길 주위에는 녹음이 무성했다.

고요를 깨뜨린 건 리하르트였다.

“고향이 바다 근처라고 하던데.”

아마 제니스나 다른 고용인이 귀띔해 준 모양이었다.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댈러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다들 그녀가 항구마을 출신이라고 하면 놀라는 반응이었다. 바다에 잇닿은 곳에서 살았다면, 좀 더 개방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 상상하는 듯했다.

“사실, 그곳에서 열세 살까지밖에 안 살아서 기억에 크게 남는 건 없어요. 조용한 곳이었다는 것 빼고는요.”

댈러스는 가구 수가 백여 채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서로 집안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바닷가에 형성된 다른 마을과 달리 어부가 없었다. 매서운 바람과 몰아치는 파도 때문이었다. 매년 깎아지른 절벽을 점점 더 야위게 할 정도였으니 어업이 발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곳을 떠올리자 샬럿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많은 말이 터져 나왔다.

“가끔 폭풍우가 몰아칠 때면 가족끼리 거실에서 한 이불로 끌어안고 자곤 했어요. 엄청 무서웠지만 그래도 왠지 신이 났죠.”

물론 그곳에 어머니 신시아는 없었다. 그때에는 이미 그레델 힐에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언니가 일하던 집에서 휴가를 받고 돌아오고, 아버지도 도박에 빠져 있지 않았던 시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리하르트가 추억에 잠긴 듯한 샬럿의 옆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담이 컸나 보군. 지금처럼.”

그 목소리는 작아서 샬럿의 귀에 잘 닿지 않았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그가 앞을 보며 고갯짓했다.

“다 왔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통과 의례인 듯 살짝 시야를 가렸던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상점가가 보였다. 분주해 보이는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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