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약을 받은 샬럿은 곧장 미스티무어 홀로 향했다. 돌아오는 동안 내내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념이 그친 건 저택에 도착한 이후였다.
그녀는 그대로 받아 온 약을 가정부의 방에 가져가 제니스에게 건넸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제니스가 이내 뭐가 생각났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아아. 드디어 완성됐구나. 고맙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어머니는?”
“지금 자고 있어. 네가 온 이후부턴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거 같구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말 그대로였다. 최대 한 달이라 했던 의사의 말과 다르게 신시아의 낯빛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한스는 어쩌면 그녀가 서너 달은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샬럿 또한 그러기를 원했다.
마주 앉은 제니스가 약병을 잠시 옆으로 치워 놓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리하르트 님의 일을 돕는 건 어떠니?”
“잘 대해 주세요. 특별히 힘들거나 어려운 일도 없고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래도…….”
긍정적인 대답에 화색을 띤 제니스가 말을 하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디까지나 그분의 호의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
“네가 그럴 아이가 아닌 걸 안다만, 종종 자신의 처지를 나락에 처박는 아이들도 있어 노파심에 하는 말이란다. …너도 이제 나이가 어리지 않으니 충분히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다.”
알아듣다 못해 절절히 느끼는 경고였다. 필요 이상으로 남성 고용주와 가까이 지낸 하녀들의 말로는 대개 비참했다.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하면 일단 저택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고, 어찌어찌 좋게 저택을 나간다 해도 인물 증명서를 받지 못하면 다음 일자리는 요원해졌다.
끝끝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여자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사창가로 들어가 매독 같은 성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거나, 마지막의 마지막에야 들어간다는 구빈원에서 추위에 떨며 굶어 죽거나.
샬럿 또한 일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 있기에 아주 잘 알았다. 엄연히 말하면 이곳에 하녀로 온 것은 아니었으나 남들이 볼 땐 별반 다를 리 없다는 것도.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아주머니.”
“그래… 다행이구나.”
샬럿이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대답하자,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제니스가 약병을 내밀었다.
“사실, 이 약의 주인은 리하르트 님이셔. 이것 좀 리하르트 님께 전해 주지 않겠니?”
심부름이었으나 어쩌면 시험이었다. 샬럿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받아 나왔다.
집무실 앞에 선 샬럿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노크하고 손잡이에 손을 얹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샬럿입니다, 나리. 계신가요?”
천천히 문을 열며 말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샬럿은 용기를 내어 더 활짝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생각과 달리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온통 커튼이 쳐져 대낮임에도 어두웠다. 그러나 아예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리하르트 나리?”
리하르트를 부르며 걸음을 옮긴 샬럿이 주위를 살폈다. 넓은 방 안이 여느 때와 같이 깨끗하고 단정한 걸 보아 하녀가 아침에 청소하고 나간 모양이었다.
샬럿은 세탁을 담당했으나 잡일에 잔뼈가 굵은 하녀였다. 청소를 할 때 제일 먼저 커튼부터 걷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말인즉, 리하르트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혼자 일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조금 전까지.
리하르트 켄싱턴은 보통 평일 저녁 여섯 시 전까지 변호사로서 일을 했다. 의뢰인을 만나러 밖에 나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전용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거나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했다.
제니스가 말하기를 주말에는 변호사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백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조금 더 큰 시내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혹은 혼자 클로필드를 방문해 펠릭스와 카드게임이나 당구를 즐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어딘가 이상했다. 오늘은 주말이라 일을 하는 날이 아닐 텐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간 샬럿의 시선이 리하르트의 책상에 가 닿았다. 서류가 평소와 달리 제멋대로 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잉크통이 쓰러져 있었는데 마개가 빠져 있어 밖으로 검은 잉크가 새어 나왔다. 서둘러 그것을 다시 세우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기다렸다는 듯 어디선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샬럿의 몸이 화들짝 놀라 굳었다. 분명 방 안엔 그녀 혼자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평소에 닫혀 있던 왼쪽 벽면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침실과 연결된 문인 듯했다.
똑똑.
걱정된 마음에 샬럿이 다가가 노크했다. 조금 전의 소리가 환청인 양, 안에서 들리는 인기척은 없었다. 손안에 땀이 차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노크한 샬럿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샬럿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집무실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휩싸인 방은 예전에 일했던 저택과 비교해도 별다를 것 없는 침실이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어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걸음 더 들어간 샬럿이 주변을 훑었다. 그녀의 시야에 킹사이즈로 보이는 침대가 들어왔다.
침대 위 이불 사이로 손이 하나 나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덮을 정도로 크고, 힘을 주면 푸른 핏줄이 도드라질 것 같은 하얀 손. 그 손을 보자 샬럿의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저 손이 어깨를 덮고 허리를 끌어안던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귓가에서 들렸던 숨소리도.
‘어디까지나 그분의 호의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불현듯 제니스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침을 삼킨 샬럿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심부름 왔는데요. 제니스 님이 시키셔서…….”
대답은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볼 수 있게 침대 머리맡에 있는 탁자에 약을 놓는 게 좋겠다 싶었다. 조용히 걸음을 옮긴 샬럿이 그대로 약을 놓고 돌아서려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샬럿을 덮쳤다.
“아……!”
아래를 보니 무언가 예리한 조각이 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반사적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
하필이면 접질린 쪽이었다. 발에 꽤 깊게 박힌 모양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순간, 등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리, 리하르트님?”
엉겹결에 침대에 앉은 샬럿이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손이 떨어졌다.
“…제니스.”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눈을 감은 리하르트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가정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약.”
“예?”
“약을 줘.”
건조하다 못해 갈라진 목소리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샬럿이 방금 약을 올려놓은 탁자를 바라봤다. 아까는 미처 못 본, 작은 유리잔 하나가 있었다. 약을 저 잔에 따라 주면 되나 생각하는데, 문득 약을 받을 때 들은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의사가 분명 그리 말했었다. 사나운 사냥개나 먹을 법한 억제제라고.
…아냐. 무슨 착오가 있었겠지. 그저 독한 약이라는 걸 그렇게 표현한 거겠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샬럿이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침착하게 약병의 코르크 마개를 땄다. 그러는 중에도 등 뒤에선 불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상체를 일으키는 몸짓이 느껴졌다.
“…….”
긴장감에 덜덜 손이 떨렸다. 그 때문에 유리잔에 옮겨 담는 순간, 몇 방울이 그녀의 손등에 떨어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차갑고 미끌거리는 액체였다.
“여, 여기요. 어서 드세요.”
겨우 숨을 가다듬고, 절반 정도 따른 유리잔을 건넸다. 눈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내리깐 채였다. 리하르트는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언뜻 자리 잡은 복근의 윤곽이 보였다. 샬럿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저는 이만…….”
황급히 인사하며 샬럿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마치 강물이 목 끝까지 차오른 느낌이었다. 이 남자와 있을 때마다 드는 기분이었다. 자극이 너무 강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어서 나가서 막힌 숨을 뱉어내고 싶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샬럿이 반응할 새도 없이 리하르트가 순식간에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읏……!”
덫에 걸린 토끼처럼 놀란 샬럿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축축한 혀가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온몸에 독사의 독이 퍼진 듯 샬럿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마치 들개가 먹이를 준 손에 남은 찌꺼기를 샅샅이 핥는 듯한 느낌이었다. 살기도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섣불리 손을 빼내는 순간 살갗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힐 것만 같았다.
그대로 미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인 채 그저 제 손에 있는 것이 얼른 동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샬럿의 손이 놓인 건 잠시 후였다.
“이상해. 네게 피 냄새가 나. 아직 먹이를 줄 때가 아닐 텐데.”
“…….”
“백작님이 내 동생은 미친 짐승이니 미리 줘야 한다 그러던가?”
탐욕스럽게 마지막 흔적까지 핥은 리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리듯 말했다. 샬럿을 대하는 것과 달리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말에 목덜미에 얼음을 쏟아부은 듯 잠시 흐릿해졌던 샬럿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인 것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에 있으면 안 돼. 들키면 안 돼.
다급히 손을 뿌리치고 일어선 샬럿이 절뚝이는 발로 그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걸을수록 발바닥에 박힌 유리 파편이 더욱 깊게 파고드는 게 느껴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두 손을 모아 급하게 터져 나오려는 숨을 틀어막았다. 간신히 문으로 간 샬럿이 그대로 문을 연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반대편에 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