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64)

08.

펠릭스가 손을 뻗을 새도 없이 샬럿의 몸이 길옆에 난 구덩이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샬럿은 반사적으로 눈을 힘주어 감고 곧이어 찾아올 통증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이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푹신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뒤통수와 어깨를 누르던 무게가 사라지더니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뜨시죠.”

얼결에 눈을 확 뜬 샬럿과 카펫처럼 그녀 아래 깔린 리하르트의 보라색 동공이 마주쳤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 리하르트 나리?”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샬럿을 올려다보며 리하르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구덩이 속에 구겨져 있는 꼴이라니. 다짜고짜 몸을 던진 자신의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처음부터였다. 이 여자만 보면 이유도 없이 짜증이 치밀었다. 유혹하듯 꽃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도 가만둘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얼어붙어 있을 것 같은 샬럿에게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압사시킬 작정입니까?”

“아……! 죄송해요.”

화들짝 몸을 움츠린 샬럿이 재빨리 리하르트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의 가슴팍에 닿았던 손이 홧홧했다. 온몸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 그녀는 아래만 바라본 채 숨을 몰아쉬었다. 때마침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하르트! 샬럿 양!”

“두 분 다 괜찮아요?!”

펠릭스와 키아라였다. 두 사람은 램프를 들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펠릭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리하르트! 안이 생각보다 깊은 거 같아. 손을 뻗어도 닿지 않던데.”

언제 샬럿의 아래에 깔렸냐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난 리하르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일단 키아라 양을 데려다준 뒤, 하인을 시켜 밧줄이나 사다리를 가져와.”

“알았어. 일단 그대로 기다려!”

고개를 끄덕인 펠릭스가 일행과 함께 떠나고 이윽고 단둘만 남았다. 리하르트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기도 전에 샬럿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디 다치신 건 아니죠?”

“괜찮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늘 그랬듯 둘만 있을 때면 생기는 어색한 적막과 긴장감이 찾아왔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이러다가는 쿵쾅대는 소리가 들려 들킬지도 몰랐다. 결국, 참다못한 샬럿이 다시금 입을 열려는 때였다.

뚝.

무언가가 샬럿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드는 순간 비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소나기가 자그마한 머리와 가녀린 목덜미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추위 또한 바로 따라붙었다.

“…읏!”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오한에 샬럿이 몸을 잘게 떠는데, 느닷없이 큰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샬럿의 등에 넓은 가슴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벗어나려 버둥거리자, 외투를 벗은 리하르트가 가녀린 등 위로 그것을 덮고 그녀의 몸부림을 제지했다.

“벗어날 생각 마.”

낮은 목소리. 그리고 날씨만큼이나 축축한 숨결. 추위보다 그의 짙은 체향 때문에 샬럿의 몸이 떨렸다.

“의사를 부르는 건 꽤 귀찮으니.”

놀란 나머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오는 딸꾹질을 참으려 샬럿이 숨을 참고 있는 사이, 리하르트가 다른 손으로 옷깃 안으로 들어간 그녀의 뒷머리를 빼냈다. 매우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품 안의 작은 계집은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칼에 찔린 듯 움찔댔다. 그 꼴이 사람 손이 닿으면 움츠러드는 미모사 같았다. 혹여나 저를 꺾을까 잎을 밑으로 처지게 하고 소엽을 오므려 시든 척하는.

그 모습이 같잖고 어이가 없어 가지째 우그러뜨리고 싶다가도, 직전에 멈추는 게 그가 가진 최대한의 인내였다.

잠깐의 침묵을 가른 건 샬럿의 목소리였다.

“…나리는.”

내쉬는 숨마다 뿌연 입김으로 흩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샬럿이 혼란스러움에 입 안을 깨물고 느릿하게 말했다.

“나리는 대체… 절 싫어하시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어째서?”

“말과 행동은 차가우시면서도, 막상 필요할 때 손 내밀어 주시잖아요…….”

지금도 그랬다. 혹여 그녀가 비를 맞아 드러누울까, 외투의 품을 나눠 준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리고?”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일견 부드럽게 들렸다. 분명 착각이리라. 샬럿이 더듬더듬 말했다.

“…제게 하녀 일보다도 서기 일을 권하신 것도 그렇고요.”

기초적인 일이라 그 보수를 주느니 얼마든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금 뒤에 알았지만, 그의 밑에서 조수가 되어 뭐든 배우고 싶어 하는 중산층 계급 소년들도 많았다. 분명 그녀보다 나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커 왔을 그들과 비교하면, 샬럿은 한없이 볼품없는 처지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지 아무런 말이 없던 리하르트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헤겔 양.”

“리하르트! 샬럿!”

그런데 그 순간, 더욱 거세진 빗소리와 함께 바로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머리 위로 향했다. 사다리를 가져온 펠릭스가 하인이 받쳐 든 우산 아래에서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사다리를 내릴게! 바로 올라와!”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제 외투를 온전히 샬럿에게 걸쳐 주며 리하르트가 지시했다.

“업혀요.”

“네?”

얼떨떨한 샬럿이 되묻자 리하르트의 손이 그녀의 발목에 향했다.

“발목, 접질렸잖습니까.”

시선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과연 부어오르기 시작한 오른 발목이 시큰거렸다. 잠시 잊고 있던 통증이 밀려들어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리하르트가 재차 말했다.

“업혀요. 안겨서 가기 싫으면.”

“…….”

샬럿이 머뭇거리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면, 역시 저 자식 품이 좋은 건가?”

그녀는 제대로 대꾸할 마지막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인내가 바닥난 목소리였다.

“업힐게요.”

샬럿이 황급히 그의 등에 업혔다.

***

샬럿의 발목 부기를 살펴보던 젊은 의사가 말했다.

“상태를 보아 이틀 정도는 갈 거 같네요. 당분간 빨리 걷는 건 삼가는 게 좋겠군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젯밤 접질린 발목은 다행히 상태가 심각하진 않았다. 의사는 샬럿의 발목에 연고를 바른 뒤 능숙하게 붕대로 감았다.

“신시아의 병세는 어때요?”

어머니 신시아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 왕진을 부르지 않았다. 피차 시간 낭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니스는 마침 신시아의 약을 받으러 갈 때라며 그녀를 그레델 힐 외곽의 진료소로 보냈다. 접질린 발목도 겸사겸사 치료받으라는 의미에서였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요즘엔 밤중에 뒤척이시는 일도 별로 없고요.”

“잘됐네요. 그럼 조금 약한 진통제를 처방해야겠군요.”

처치가 끝나자 의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등을 보였다. 선반 위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원하는 걸 찾지 못한 듯, 빈손으로 다시 뒤를 돌았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는 건 어떻게 돌아가죠? 걸어가는 건 힘들 텐데.”

“10분 후에 한스 아저씨가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근처에서 볼일을 보신 다음에요.”

고개를 끄덕인 의사가 대꾸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 밖에서 약 가져올게요. 잠시 기다려요.”

“네.”

뒤이어 방문이 닫히고 샬럿은 혼자 남았다. 그녀는 천천히 콘솔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골 의사의 집무실 겸 진료실은 전체적으로 간소한 공간이었다. 리하르트의 집무실에 있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책상과 의자, 그 뒤로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장.

벽난로 앞 장의자에 앉아 있던 샬럿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 모를 의학서로 빼곡한 책장이 신기했다. 예전에 잠깐 다녔던 학교에선 상급생이 수십 번 읽은 책뿐이었다. 어떤 책들은 종이가 닳아 문장을 다 읽기 어려울 정도였다.

책장으로 다가간 샬럿이 손끝으로 책등을 훑었다. 해부학, 신경학, 심리학……. 그러다 하나의 책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이게 뭐지?”

그녀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양장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비정상적 흡혈 충동 및 혈액 의존 장애 연구에 관한 고찰〉

다른 책들과 다르게 유독 새빨갛고 두꺼운 책이었다. 출간된 지 꽤 됐는지 표지가 낡고 페이지 군데군데 좀이 슬어 있었다. 들고 있기가 무거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샬럿이 몇 장을 넘겼다.

[본 연구에서 실험자는 ‘비정상적 흡혈 충동 및 혈액 의존 장애’의 원인을 혈액과 조직에 영향을 주는 유전성 혈액 대사 이상증으로 놓고 실험을 진행했음을 명시한다. …먼저 피실험자들의 특징을 기술하겠다. 이들은 햇빛과 마늘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하며,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대할 때 빈혈과 두통을 호소한다. 다만 개개의 차이가 존재한다.]

넘기는 손이 떨렸다. 스산한 무언가가 피부를 스쳐 지나간 느낌이었다. 목덜미가 오싹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샬럿이 더듬더듬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중 가장 큰 특징은 채혈한 결과, 이들의 피는 상온에 있을 때 놀라울 정도로 자가 소멸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짐승의 피를 투여하면 미친 듯이 흡수하여 양을 유지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않는다. 사람의 피의 경우에는 그보다 더 지속되지만 그 역시도 한계가 있다. 결국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의 피가 필요한 셈이다. 그것도 적지 않은 양의 피가.]

인기척이 들린 건 마지막 줄을 읽어 가던 때였다.

툭.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책상 위에 올려 둔 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샬럿이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샬럿 양? 뭐 하고 있었어요?”

처방한 약봉지를 든 의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벌게진 얼굴로 샬럿이 허리를 굽혀 떨어진 책을 주웠다.

“죄,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아. 책을 보고 있었군요.”

샬럿에게서 책을 받은 의사가 전체를 훑듯 책장을 휘리릭, 넘기더니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확실히 흥미로운 책이긴 하죠.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피. 흡혈. 죽은 동물.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에 샬럿이 벌벌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입술은 생각과 달리 멋대로 움직였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나요?”

“글쎄요. 사실, 학계에서는 의견이 갈리긴 해요. 저는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어째서요?”

“절 지도하셨던 교수님이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시다 하더군요. 남녀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아름답다고 하던데. 왜, 생존을 위해 특화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야 먹이가 꼬일 테니까.”

먹이. 그가 말하는 건 분명 사람일 터였다. 샬럿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보던 의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믿는다고 했던 말과 다르게, 조카에게 무서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삼촌 같은 어조였다.

“오싹한 건 둘째 치고, 한 번 보고 싶기는 합니다.”

“…….”

“아, 대낮부터 너무 어두컴컴한 이야기를 했나요?”

너무 겁을 줬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한 얼굴로 의사가 들고 있던 약봉지를 내밀었다.

“저녁에나 활동한다고 하니 밤에 밖에 나오지 않는 이상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뭐, 이런 시골에 있을 리도 없겠지만. 이거, 약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 샬럿이 약봉지를 받자마자 문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하여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막 문을 열려는데 의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것도 가져가요. 백작님이 의뢰하신 약인데 마침 다 만들어져서.”

의사가 건넨 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약병이었다. 안이 잘 들여 보이지 않는 새카만 유리 재질이었다.

“아마 사냥개를 새로 들이셨나 봐요. 꽤 거친가 보죠? 이만한 억제제를 사용할 일은 많지 않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