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64)

07.

리하르트 켄싱턴의 개인 집무실은 저택 2층 끝에 있었다. 서기 일을 받아들인 이후, 따로 지침이 있었는지 하녀들이 더는 일을 부탁하지 않았다.

샬럿은 일주일 동안 월, 수, 금,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따로 마련된 책상에 앉아 주어진 일을 했다. 그녀의 수준을 배려했는지, 생각보다 서기 일은 힘들지 않았다. 간단한 계산을 하고 의뢰서를 정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주 손쉬운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할 만한 일이었다.

문 옆에 자리 잡은 샬럿과 창을 등진 자리에 앉은 리하르트 사이에는 대여섯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서로 다가가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헤겔 양.”

“예.”

하던 일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여전히 의뢰서에 시선을 고정한 리하르트가 한 손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이것 좀 확인하고 제자리에 놔 주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는 지시할 때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대답을 원했다. 일 처리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오차도 없이 완성해야 그다음 일로 넘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샬럿이 리하르트의 자리에 다가간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리하르트 씨.”

“…키아라 양.”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였다. 우아하고 도도한 인상의 미인은 몸 선이 한껏 강조된 새파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자리에 멈춰 선 샬럿이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는데, 키아라가 샬럿을 힐긋 일별하고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30분이나 기다렸어요. 제가 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셨나요?”

미간을 찡그리던 리하르트가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

“약속 시간이 지났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리하르트는 기억을 되짚었다. 확실히 조금 전에 하인이 문을 두드리기는 했었다.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기다리라 했던 게 불과 5분 전 일 같았는데 30분이나 흘렀을 줄이야.

무심하다 못해 냉정한 리하르트를 내려다보던 키아라가 두 손을 책상 위에 짚더니 밉지 않게 입을 내밀었다. 교태 어린 몸짓이었다.

“너무 심심해서 방금 펠리까지 불렀어요.”

“그를요?”

“네. 백작 내외분도 지금 안 계시고, 달리 말 상대가 되어 줄 분이 없으니…….”

말을 이어 가던 키아라의 시선이 문득 옆에 오도카니 서 있는 샬럿에게 향했다. 그녀의 위아래를 훑더니 곧바로 리하르트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분은 처음 뵙는 거 같은데요. 고용하신 건가요?”

직접 말을 걸지 않는 건 샬럿의 옷차림을 보아 일개 하녀인지 혹은 정식으로 고용한 서기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들이닥쳐 떠들어 대는 키아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리하르트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키아라 양이 궁금해할 정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아…….”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사람.

없는 말을 지어서 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단어 하나하나가 샬럿의 가슴에 와 박혔다. 고작 3일을 같이 일했다고 조금은 가까워진 게 아닌가 혼자 착각했던 건가.

욱신대는 속을 다스리며 샬럿이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벽시계를 보니 어느덧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쯤에서 나가는 게 좋아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

샬럿이 리하르트에게 작게 묵례를 하며 나가려는 때였다.

“어머. 이러면 내가 내쫓은 거 같잖아요. 나 그런 악역은 맡기 싫은데.”

순식간에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키아라가 샬럿에게 몸을 돌렸다. 그것을 보며 리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냥 근무 시간이 다 됐을 뿐입니다.”

그러니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경고였다. 쓸데없이 관계없는 이를 붙잡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

키아라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놓았다. 자신은 에셀우드 어디를 가도 이런 푸대접을 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산책 가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리고, 그녀를 30분이나 홀로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래 놓고도 하나도 잘못했다는 기색 없이 당당했다.

원래라면 성질대로 찬물이라도 머리 위에 뿌리고 뒤돌아 나와야겠지만, 지극히 취향인 저 얼굴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아가씨.”

“…….”

그냥 보내라는 경고를 못 들은 척 키아라가 나가려는 샬럿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그리고 샬럿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 보고도 못 본 척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냥한 태도였다.

“처음 뵙네요. 난 키아라 스펜서예요. 지금은 잠시 클로필드에 있죠. 그곳에 사촌이 있거든요.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

“…샬럿 헤겔입니다.”

얼결에 악수한 샬럿이 대답했다. 클로필드라면 얼마 전 들어 본 이름이었다. 친절하게 자신을 부엌까지 데려다줬던 펠릭스라는 남자가 말했던 곳이었다.

키아라가 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렇구나. 예쁘네요. 샬럿. 동부식으로는 샤를로트라고도 읽히는데.”

“감사합니다.”

살면서 전혀 접점이 없었던 사람들과 한 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샬럿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돌아가서 어머니의 상태를 살피고 약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인사를 하려는데, 키아라가 불쑥 이상한 제안을 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산책하지 않을래요?”

어스름이 내려앉았는데 산책하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무슨 제안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는데 키아라가 조르듯 다시 한번 말했다.

“마침 여자가 나뿐이라 조금 외로웠어요. 같이 가요, 샬럿 양. 네?”

***

축축하고 스산한 공기가 에워싸던 평소와 달리 오늘 그레델 힐의 날씨는 맑고 온화했다.

기름 램프를 손에 쥔 하인 셋과 돗자리, 그리고 와인과 와인 잔을 넣은 산책용 바스켓을 든 하녀 한 명을 대동하고 네 남녀가 오른 곳은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스산하고 안개 낀 저택에서 조금 벗어나니 이름 모를 들꽃들과 산딸기 덤불이 곳곳에 자리한 낮은 동산들이 보였다. 넓게 잎사귀를 드리운 너도밤나무 아래, 하녀가 편평한 곳을 골라 돗자리를 깔았다.

대여섯 명이 앉아도 충분할 정도로 돗자리는 넓었다. 그 위로 억지로 끌려 나왔는지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한 두 남자와 샬럿, 그리고 키아라가 널찍이 자리를 나눠 앉았다.

키아라가 그 짧은 사이에 절친한 친구라도 된 양 샬럿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런 다음 팔짱을 끼고는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 속삭였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죠? 조금만 기다려 봐요. 샬럿 양. 깜짝 놀랄 거예요.”

“너무 부담 드리지 마. 키아라. 억지로 나오게 해서 미안해요.”

키아라가 말했던 사촌은 바로 펠릭스였다. 다소 막무가내인 사촌의 행동이 익숙하면서도 샬럿에게는 미안한 눈치였다. 눈이 마주치자 샬럿은 괜찮다는 뜻으로 옅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나오게 된 이상 부루퉁해 봤자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사정을 알게 된 제니스가 신시아의 약은 자신이 대신 챙기겠다고 했으니 걱정을 던 덕분이기도 했다.

“어머. 내가 뭘? 이곳에 나온 것도 샬럿 양이 결정한 거야. 안 그래요?”

“맞아요. 안 그래도 조금 답답했는데 이렇게 나오니 시원하네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키아라가 새침하게 대꾸한 말에 적당히 대답하며 샬럿이 언덕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대각선 아래쪽에 앉은 리하르트는 내내 별말이 없었다. 펠릭스와 키아라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게 반응의 전부였다.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거의 정치, 사회, 예술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부분 계급이 다른 샬럿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

대화에 끼지 못한 샬럿은 그저 조용히 주위 풍경을 휘 둘러 감상했다. 그러다 문득 갈 곳을 잃은 시선이 리하르트의 옆모습에 닿았다.

조각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콧대와 다문 입술. 노을 녘에 연갈색 머리칼이 짙은 블론드로 보였다. 너무 노골적으로 봤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마침 시선을 옮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창조물에 속절없이 끌리는 예술가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핀에 꽂힌 나비가 된 것처럼 샬럿은 숨 쉬는 걸 잊었다.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남자는 지독하게 완벽했다. 완벽해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 같았다.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될 무언가를 현실에 억지로 끄집어낸, 그런 상상 속 인물 같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헤겔 양.”

그 부름에 샬럿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처음부터 깍듯하게 성(姓)을 부르며 거리를 둔 남자였다. 무례하다고 할 게 분명했다. 서늘한 눈동자에 샬럿이 어깨를 작게 움츠리자,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앞을 봐요.”

주문이라도 걸린 듯 샬럿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언제 어떻게 날아올랐는지 모를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가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인 연출가의 연극 무대보다도 더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어떻게 이런 광경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자 키아라가 싱긋 웃었다.

“거봐. 따라 나오길 잘했죠?”

***

반딧불이가 보여 준 광경은 짧게 끝이 났다. 그렇지만 그 환상적인 장면은 뇌리에 박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뒤이어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사방에 어둠이 깔렸다. 와인 한두 잔을 마신 네 사람은 머지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려갈 때 리하르트의 옆에는 키아라가 붙어 있었다. 키아라가 술에 취한 척하며 리하르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탓이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샬럿의 옆에는 펠릭스가 자리했다.

“앗……!”

조심해서 내려오고 있는데, 어둠에 미처 보지 못한 모난 돌을 밟고 샬럿의 몸이 휘청했다. 키아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꺄악!”

“샬럿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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