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다음 날, 메인홀을 가로지르던 새빨간 핏자국은 언제 있었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마치 기괴한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누가 뒤처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고용인들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지난밤의 일이 마치 그녀의 악몽이었다는 것처럼.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샬럿은 그 경고를 철저히 지켰다. 그 보상인지 우연으로라도 리하르트 켄싱턴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각자가 속한 영역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리는 소식이었다. 이를테면 일손을 돕다 듣게 된 하녀들의 대화 같은. 그것들이 잊으려 해도 계속 그 밤을 상기시켰다.
“맞다. 샬럿. 리하르트 나리는 뵀어? 꽤 유명한 변호사셔. 갖고 있는 재산을 보면 굳이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사실 수 있는데 말이야.”
그야말로 묻지도, 원하지도 않은 말이었다. 샬럿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가요, 하고 대답했다.
군식구로 지내며 마냥 먹고 자고 할 수 없어 자발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지만 이제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잡일 하녀들은 빨래하고, 청소하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특히 상사인 제니스가 자리를 비우면 더욱 심했다.
“그나저나, 군대도 다녀오셨고 나이도 차셨으니 머지않아 격에 맞는 부인을 맞이하시겠지?”
“하아… 그렇게 되면 따로 독립하시는 거 아니야? 그 미모를 못 보게 되는 건 좀…….”
“바보 같은 소리. 백작님이 애지중지하는 동생을 독립하게 놔두겠니? 거의 아들처럼 여기시는데.”
“그러고 보니 요즘 가까이 지내시는 여성분이, 아마 친구분의 사촌 동생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어머? 얘, 어디 가니?”
스리슬쩍 사라지려 했던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샬럿은 옆에 있던 양동이를 발로 찼다. 대걸레를 적시기 위해 받아 놓은 물이었다.
쏴아아아.
양동이 반쯤 차 있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놀란 척 벌떡 일어났다.
“아차!”
“어이구, 조심 좀 하지!”
흙바닥을 흥건히 적신 물에 하녀가 혀를 쯧쯧 찼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샬럿이 양동이 손잡이를 잡았다.
“죄송해요. 새로 담아 올게요.”
“그래. 그렇게 하렴.”
샬럿은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빈 양동이를 들었다. 빠르게 하녀들 사이를 벗어나 그대로 모퉁이를 돌 때였다.
탁.
누군가와 부딪히며 샬럿은 단단한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앞에 남자 구두가 보였다. 설마……. 혹시나 싶은 불길함이 스멀스멀 심장을 옭좼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려 하는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위팔을 잡더니 끌어 올렸다.
“이런…….”
제일 먼저 보인 건 적갈색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겨울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
이 남자 역시 훤칠한 미남이었으나 리하르트 켄싱턴은 아니었다. 안도한 샬럿이 속으로 참았던 숨을 내쉬는데, 그 모습을 오해한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미안하네. 괜찮아요? 아픈 건 아니죠?”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치맛단에 묻은 먼지를 털고, 연달아 고개를 내저은 샬럿이 마저 걸음을 재촉하려는 순간이었다. 불쑥, 배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익숙한 복통이었다. 입 안의 살을 깨물며 샬럿은 머릿속으로 마지막으로 달거리를 한 지가 언젠지 생각했다.
그대로 서서 숨을 고르고 있자 그녀의 고통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다가와 그녀 앞에 등을 보였다.
“업혀요.”
목소리는 확실히 들렸지만 머리까지 와 닿지 않았다. 멀뚱히 바라보는 샬럿을 향해 살짝 무릎을 굽힌 그가 말했다.
“업히라니까.”
“네……?”
“방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정말로…….”
“고집 참 세네.”
미처 거절을 할 새도 없었다.
“다쳤잖아요.”
남자가 멍하니 둥근 눈만 끔뻑이는 샬럿의 뒤로 가 그녀의 무릎 뒤와 어깨를 감싸 안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샬럿의 시야가 휘청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공주님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
“……!”
샬럿이 뭐라 반항할 새도 없이, 그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펠릭스 바커라고 소개한 남자는 친절했다. 고용인들의 방이 있는 4층까지 올라가려는 그에게 샬럿은 부엌이면 충분하다며 사양했다.
“정말 그냥 가도 돼요? 아직 아파 보이는데.”
“괜찮아요. 지금까지 보여 주신 호의만으로도 감사해요.”
다행히 아무도 부엌에 없었다. 샬럿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늘로 찌르듯 아랫배가 욱신거렸지만, 간신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조금만 앉아 있으면 나을 거 같아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펠릭스 또한 찡긋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나선 건데요.”
그때, 메인 홀과 연결된 문이 열리고 계단 위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펠릭스 나리? 여기는 어쩐 일로…….”
제니스였다. 그녀가 펠릭스와 샬럿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펠릭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혹여 하녀를 희롱하고 있다 오해를 받을까, 펠릭스가 바로 대꾸했다.
“이분이 아파 보여서 데려다준 것뿐입니다.”
“…그랬군요. 리하르트 나리는 방에 계십니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곧 올라가려던 참이었는데.”
리하르트, 라는 단어에 샬럿의 몸이 움찔했다.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나무의자에 앉은 샬럿을 걱정스레 내려다본 펠릭스가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아니라고 한다면 의사라도 불러 줄 기세였다. 하녀에게 이렇게 친절한 남자는 드물었다. 이 남자에게 어떤 음흉한 속내가 있을까 걱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공연히 추문에 휩싸이는 건 싫었다. 샬럿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네. 바쁘실 텐데 신경 쓰지 마세요.”
“샬럿은 제가 돌보겠습니다. 펠릭스 나리.”
제니스가 뒤이어 덧붙이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펠릭스가 일어섰다.
“이름이 샬럿이군요. 예쁜 이름이네요.”
“…감사합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도움이 필요할 일 있으면 클로필드에서 날 찾아요. 바로 옆 지역이니까.”
잠깐 부딪힌 것뿐인데 펠릭스가 보이는 호의와 친절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한 듯 그가 자리를 떠났다.
그와 교대하듯 마저 계단을 내려온 제니스가 샬럿에게 말을 붙이려던 때였다.
“샬럿……!”
제니스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
커튼을 닫아 놓아 넓은 방 안은 어두침침했다. 굴속에 웅크린 짐승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그의 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펠릭스는 방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리하르트.”
“…….”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이불이 뒤척이는 소리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망설임 없이 다가간 펠릭스가 이불을 빼앗았다.
“일어나. 지금이 몇 신 줄은 알아?”
“…몇 신데.”
“오후 두 시. 해가 중천에 뜨고도 남을 시간.”
리하르트는 강박적이리만치 단정한 평소와 다르게 잔뜩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그 모습에서 묘하게 느껴지는 색기에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던 펠릭스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창문으로 다가간 그가 커튼을 걷자,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빛을 참을 수 없었는지 리하르트가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서 이렇게 쳐들어온 이유는?”
잠이 채 다 깨지 않아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으르렁대는 맹수 앞에 선 기분이었다.
“키아라가 궁금해하더라. 엊그제부터 왜 소식이 없는지.”
궁금해할 뿐인가, 사촌 오라비인 자신을 독촉하기까지 했다.
만난 지 고작 이틀 만에 그 콧대 높고 도도하던 공작가의 아가씨가 완전히 목을 매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고 친절하게 굴면서도 어느 순간 차갑게 뒤를 도는 그에게 길들여진 듯했다. 그에 비해 그저 사소한 변덕이었는지 리하르트의 태도는 처음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펠릭스의 말에 잠시 목을 풀던 리하르트가 입매를 뒤틀었다.
“궁금해할 만한 사이던가?”
“뭐……?”
“마음을 나눈 사이도, 몸을 섞은 관계도 아닌데.”
노골적이다 못해 헐벗은 말이었다. 어안이 벙벙한지 할 말을 잃었던 펠릭스가 잠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여지를 준 건 사실이잖아.”
“무슨 여지?”
“그, 그건…….”
따지고 들자니 또 할 말이 없었다. 키아라와 리하르트가 단둘이 된 적도 없었다. 어울릴 때는 늘 자신과 함께였다. 추문에 휩싸일 만큼 은밀한 접촉을 한 것도, 눈에 보이는 유혹이 오간 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침대에서 벗어나 옷장에서 옷을 갈아입은 리하르트가 뒤를 돌았다.
“그건 그렇고.”
“…….”
“여기 오기 전에, 한바탕 뒹굴기라도 했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펠릭스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가까이 온 리하르트가 그의 넥타이를 집더니 체취를 맡는 사냥꾼처럼 코에 갖다 댔다.
“꽃 냄새가 나는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검은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여자.”
뭔 신소리를 하냐며 대꾸하려는 순간, 자신의 말을 가로막는 리하르트의 말에 펠릭스가 커진 눈을 끔벅였다. 넥타이를 손에서 놓은 리하르트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쥐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숨통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펠릭스를 덮쳤다.
“하녀 일을 돕는다고 하더군. 그래서 아마, 착각했을 수도 있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리하르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냉랭한 목소리 너머로 선연한 불쾌함이 느껴졌다.
“손을 댔나?”
“무슨…….”
“손을 댔냐고 물었어.”
그제야 펠릭스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검은 머리, 초록색 눈동자. 분명 조금 전 맞부딪혔던 여자는 그런 외모였다. 쉽게 볼 수 없는 청아한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키아라처럼 단번에 눈에 도드라지는 그런 미모는 아니었지만 깨끗한 인상이 볼수록 매력적인 느낌의.
처음이었다. 돌아온 이래, 아니 그 이전에도 리하르트가 관심을 가진 여자는 없었다. 사교계에서 절벽 위의 꽃이라 불리는 키아라조차 그 대상에 들지 못했지 않은가.
조금 놀려 볼까 불쑥 짓궂은 충동이 들었지만, 금방이라도 저를 죽여 버릴 듯한 눈빛에 펠릭스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방금 우연히 부딪혔어. 아파 보이길래 안아서 부엌까지 옮겨 줬지. 그뿐이야.”
답답했던 목이 놓인 건 그와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