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누구…….”
말은 중간에 툭 끊겼다. 샬럿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신시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놀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문득 샬럿의 뇌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신경 쇠약. 샬럿은 불안감에 입 안을 깨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샬럿.”
옅게 미소 지은 신시아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쉰 샬럿이 그제야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어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칼과 해쓱해진 뺨이 보였다. 3년 만이었다. 자신과 똑 닮은 이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은. 목이 멨다.
“엄마…….”
“우리 딸 왔구나.”
신시아가 머리맡에 멈춰 선 샬럿에게 팔을 뻗었다. 엉겁결에 끌어안겨 침대에 앉게 된 샬럿이 그리운 느낌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곳으로 올 때 했던 걱정은 전부 쓸데없었다. 부모 자식 사이에 어색함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조용히 포옹을 푼 뒤, 마주 앉은 모녀는 그간 미뤄 놓았던 긴 대화를 나눴다. 신시아는 슬슬 결혼이 오가야 할 중요한 시기에 엄마로서 곁에서 챙겨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고, 샬럿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신시아가 갑자기 작게 기침했다.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웠다. 샬럿이 비쩍 마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염려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신시아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응. 그냥 목이 건조해서 그래. 사실 며칠 전부터는 한결 가벼워졌단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물이라도 한 잔 떠다 드릴까요?”
“그래 줄래? 고맙구나.”
고개를 끄덕인 샬럿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번에는 바람에 꺼지지 않게 한 손으로 촛불을 가리면서 긴 계단을 내려갔다. 다들 잠자리에 들었는지 저택은 온통 조용했다. 그녀는 떠들썩한 분위기보다 어쩐지 이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올라갈 때와 달리 내려올 땐 놀라는 일 없이 평탄했다. 샬럿은 혹여 누가 깨지 않을까 싶어 조심히 행동했다. 그러나 일단 아무도 없는 지하로 내려오자 움직임은 한결 편해졌다. 샬럿은 신속하게 선반에서 컵 하나를 꺼내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그리고 곧장 다시 계단을 올랐다.
“…뭐지?”
올라가다 말고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1층 메인 홀과 이어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의아함에 걸음을 옮기는데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뭔가 길게 이어진 흔적이 보였다.
호기심에 양초를 가까이 들이댄 찰나, 샬럿은 그대로 들고 있던 걸 떨어뜨릴 뻔했다.
“이, 이건…….”
피였다.
“아냐. 그럴 리가…….”
공포 소설을 좋아해 많이 읽어 왔지만, 그런 상황이 자신에게 들이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간신히 떨리는 심장을 진정한 샬럿이 고개를 내저었다. 잘못 본 게 분명했다. 붉기는 하지만 무슨 물감일지도 모르지.
무릎을 굽힌 샬럿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그리고 검지에 묻어난 것의 냄새를 맡았다. 혈액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피가 맞았다.
정신이 아찔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그 핏방울이 이어진 곳으로 향했다. 홀린 듯 자취를 따라가던 걸음은 그대로 1층 응접실 앞에서 끊겼다.
쿵쿵쿵. 귓가에 들릴 만큼 샬럿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혹시 이 험한 날씨를 틈타 침입한 강도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우연히 고용인과 마주치고, 그대로……. 너무나도 끔찍해서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도, 도움을 청해야 해…….”
샬럿은 사람들을 부르려 가려다 멈칫했다. 우선 무슨 일인가 파악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았다. 자신은 잠시 이곳에 머무는 객식구일 뿐이었고, 오늘은 들어온 첫날이었다. 호들갑을 떨고 저택 사람들을 다 깨웠는데 혹시나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면 그것도 큰일 아닌가.
심각한 고민 끝에 샬럿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곤 결심한 얼굴로 천천히 닫힌 응접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발꿈치를 들어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놋쇠 손잡이를 잡았다.
“…….”
문은 아주 쉽게 열렸다. 경첩에 기름을 먹이는지 고용인 방처럼 요란한 소리도 없었다. 샬럿은 숨을 참은 채, 매끄럽게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들여놓았다.
곳곳에 초상화와 장식장이 자리한 넓은 방에서 제일 먼저 보인 건 컴컴한 주변에서 유일하게 불빛을 내뿜는 벽난로 옆 등이었다. 그 앞에는 안락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체격으로 봐서는 남자였다. 키가 큰지 작지 않은 등받이 위로 머리통이 보였다. 언뜻 금발로도 보이는, 옅은 연갈색의 짧은 머리칼이었다.
강도일까. 혹은 피의 주인일까.
전자라면 당장 등을 돌려 도망치는 게 맞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어쩌면 그녀는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을 외면한 셈이 된다.
고민은 짧았다. 샬럿은 결국 조용히 손에 든 양초의 불을 입으로 후 불어 껐다. 그리고 조심히 촛대에서 양초를 뽑았다. 양초를 고정했던 촛대의 끝은 꽤 날카로웠다. 여차해서 괴한이 달려들면, 어깨나 다리를 단번에 찌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운도 없이 잡힌 사람을 구해 내고.
있는지도 몰랐던 사명감에 불쑥 솟은 용기가 활활 타올랐다. 굳게 마음을 먹은 샬럿이 붉은 카펫을 디디며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잊고 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옆으로 돌아가 얼굴만 슬쩍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의자 옆을 돌아 침입자 앞에 선 순간이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샬럿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생각이 멎었다.
사람이 아닌 정교한 비스크 인형이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얇디얇은 백짓장을 겹쳐 만든 것 같은 새하얀 피부에, 그린 듯이 단정한 이마. 위로 올라가며 사선을 긋다 날카롭게 꺾인 갸름한 눈썹과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짙고 섬세한 속눈썹. 굴곡 없이 시원하게 뻗은 콧대.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은 여자보다 색조가 짙었고, 그 아래 날렵한 턱 선이 자리했다.
시선은 계속 내려갔다. 남자는 조끼를 걸치지 않은 편한 셔츠 차림이었다. 살짝 풀어진 옷깃 너머로 뚜렷한 목울대가 보였다.
홀린 듯이 이어지던 시선이 뚝 멎은 건 두 손이 깍지 낀 채 얹어진 배에서였다. 하얀 위와 달리 복부 주위는 온통 새빨갰다. 샬럿은 그게 뭔지 단번에 알아맞혔다.
“피, 피가…….”
저도 모르게 뇌까린 샬럿이 입을 막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언가 등에 닿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작은 서랍장이 바닥에 엎어지며 소음을 냈다. 동시에 갈퀴처럼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뭐야.”
마치 까마득한 동굴 바닥을 긁어내리는 듯한, 낮고 깊은 목소리.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끌어당기는 힘에 몸이 앞으로 기운 샬럿이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어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 누군가 보면 마치 그녀 쪽이 의자에 앉은 남자를 덮치는 듯한 자세였다.
두 코끝이 맞닿았다. 숨결이 뒤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
그 순간 샬럿은 눈을 의심했다. 아주 찰나, 날 선 남자의 동공이 세로로 수축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찾는 맹수의 눈과 같았다.
남자의 눈동자는 머루를 짓이겨 바른 듯한 짙은 보라색이었다. 가장 고귀하면서도 천한, 매혹적이면서도 악마의 색이라 불리기도 하는.
갑자기 목덜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사로잡힌 팔이 홧홧했다.
“하녀인가?”
옭아맨 사냥감을 확인하듯 남자가 샬럿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다 뭔가에 놀랐는지 짧은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손아귀의 힘이 풀린 틈을 타 샬럿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괜찮으세요?”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샬럿이 말허리를 끊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피로 물든 복부를 가리켰다.
“피가…….”
“…….”
“사, 사람이라도 불러와야…….”
샬럿에게 당장 이 남자가 누구인지 어떤 신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이 정도로 피를 흘리면 보통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아까는 과한 출혈로 기절한 게 아닐까 싶었다.
사색이 된 샬럿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샬럿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다가온 만큼 뒷걸음질 쳤다. 양손에 꼭 쥐고 있던 양초와 촛대가 데구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추격은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뒷걸음질 치던 샬럿의 등에 벽이 닿았다. 눈앞에 그녀를 가리고도 남을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제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샬럿의 왼 얼굴 바로 옆 벽에 길고 단정한 손이 맞닿았다. 그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허리를 숙였다. 시선을 맞추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가 손을 짚은 반대편 귓가에 속삭였다.
“그 눈은 장식인가 보지?”
“…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샬럿이 감았던 눈을 떴다. 벽에서 손을 뗀 남자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스레 말했다.
“이건 내 피가 아닙니다.”
“그럼…….”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등을 돌렸다. 불빛이 닿지 않은 곳으로 성큼 사라진 그가 발로 무언가를 굴렸다.
“이, 이건…….”
샬럿의 발치에 굴러온 건 무언가를 담은 낡은 천이었다. 바닥에 질질 끌렸는지 보이는 밑부분이 조금 닳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피에 젖어 있었다. 경직된 샬럿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초록색 눈동자를 그에게 향했다. 팔짱을 낀 남자가 짧게 설명했다.
“사냥.”
야만스러우면서도 직설적인 단어였다. 또한 마치 무언가의 신호 같았다.
이상하게도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진정됐다. 샬럿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말은 아마, 사냥감을 담은 자루를 가져 왔다는 말 같았다. 셔츠의 피는 사냥감의 것이고. 현관홀의 핏자국은… 들어온 순간 바닥에 떨어뜨린 뒤 질질 끌고 왔기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
“아아…….”
그제야 온몸을 집어삼켰던 공포와 긴장이 한결 누그러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샬럿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치 갓 태어난 새끼 영양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차게 웃었다.
“아침부터 가지가지 하는군요. ‘샬럿 헤겔’ 양.”
싸늘한 말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샬럿은 홀린 듯이 눈앞에 놓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다 귀를 의심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건 틀림없는 제 이름이었다.
“…절 아세요?”
“황야에서 봤잖습니까.”
황야. 그 말에 샬럿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자신을 늑대 무리에서 구해 준, 역광을 받아 잘 보이지 않던 그 남자가.
세상에, 그럼 지금 이 사람이 리하르트 님이라는 거야?
눈앞이 아찔했다. 큰 결례를 범한 것 같아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눈썹을 살짝 치켜뜬 리하르트가 친절은 딱 여기까지라는 듯 잡았던 손을 뗐다.
“카펫 위에 떨어뜨린 물건 챙겨서 나가요. 당장.”
여차하면 무기로 쓰려고 했던 촛대와 양초를 그가 눈짓으로 가리키자 샬럿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는 재빨리 그것들을 주워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려는 순간, 조용하지만 단호한 경고가 뒤따랐다.
“한 번만 더 밤중에 나다니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겁니다.”
대답을 바라는 어조는 아니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눈인사를 한 샬럿이 그대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한 손엔 잠시 내려놓은 물컵을 들고 한 손엔 미처 불을 붙이지도 못한 양초를 든 채였다.
컴컴한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오르면서, 그녀는 뒤늦게 떠오른 남자의 이름을 속으로 뇌까렸다.
리하르트 대니얼 켄싱턴.
본능이 속삭였다. 다시는 마주쳐서는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