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4)

03.

‘모녀가 그다지 닮지 않았군.’

제니스의 말에는 단 한 사람이 빠져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생각이라도 읽은 듯 제니스가 말을 이었다.

“백작님의 동생이신 리하르트 나리를 알고 있지?”

알다마다. 어머니가 7년간 손수 젖을 물리며 업어 키운 도련님이었다. 방금 자신을 늑대의 습격에서 구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과거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쥐 죽은 듯 지냈었고, 조금 전 황무지에서는 역광 때문에.

방금 만났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판단을 마친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네 엄마 앞에서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돌아온 건 의외의 말이었다. 이미 마주쳤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샬럿의 얼굴에 궁금증이 드러났는지, 제니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도 될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네 어머니 신시아가…….”

제니스가 뭐라고 단어를 골라야 할지 망설이듯, 중간에 숨을 한번 들이켰다가 말을 이었다.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그런지, 신경이 조금 쇠약해졌단다.”

“…신경 쇠약이요?”

목이 졸린 듯 동시에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누가 가슴을 움켜쥔 듯 욱신거렸다. 파리해진 샬럿의 안색을 바라보던 제니스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샬럿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별건 아니란다. 그냥 저택 사람들을 종종 못 알아볼 때가 있어.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마렴. 얼마 안 있으면 금방 알아보니까.”

마지막 말에 샬럿이 안도의 숨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단 한 사람……. 오래 떨어져 있던 탓인가, 반년 전부터 리하르트 도련님만은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셔. 보기만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경계하지.”

“…….”

“그러니 딸인 네가 조심해야 할 거 같아서 한 말이란다.”

샬럿은 그녀의 말에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캐물을 수도 알려 달라 조를 수도 없었다.

“네. 알겠어요. 아주머니.”

샬럿의 순순한 반응에 제니스가 다행이라는 얼굴로 다정히 말했다.

“주인 나리는 한 시에 돌아오실 거란다. 그때까지 옷도 갈아입고 좀 씻도록 해.”

***

“펠릭스.”

“응?”

“귀 막아.”

탕!

방아쇠를 당기자 일순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손목까지 흔들리는 충격에 지끈거리던 두통이 멎었다.

탄약은 단번에 먹잇감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끈질기게 도망가려던 사슴은 핏줄기를 그리며 얼마쯤 더 가더니 이내 털썩 쓰러졌다. 리하르트는 안장 위에서 내려왔다.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가자 사슴이 색색 울음을 흘리며 다리를 바르작댔다. 다 부질 없는 반항.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짐승의 머리 위에 다시 장총을 겨눴다. 이번엔 사냥감에 대고 쏜 거라 소리가 크지 않았다. 리하르트가 뺨과 이마에 튄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 내는 사이, 다가온 펠릭스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신성한 주일에 사냥이라니. 나중에 지옥에 떨어질까 걱정도 안 돼?”

“참견 마. 교회에 안 간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난 오늘 살생은 안 했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던 펠릭스가 피로 붉게 물든 손수건을 되돌려 받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거 알아? 너 많이 변했어.”

대답 대신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예전엔, 그 뭐랄까… 책밖에 모르는 소심한 범생이였잖아.”

전형적인 우등생. 착실함의 표본.

그게 리하르트 대니얼 켄싱턴이란 인물의 정체성이었다. 성격도 소심한데 하필 눈에 띄는 외모로 태어나 일부러 안경까지 쓰고 다녔던 놈이었다. 그러던 그가 무슨 이유로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변했을까.

발단은 입대였다. 다들 그러하듯 칼리지를 졸업한 후에 리하르트는 임관하여 외지로 파견됐다. 파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운 나쁘게도 식민지의 정부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매일 사선을 넘나들던 중 실종됐다.

국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고 했다. 모두 리하르트가 오지에서 전사했을 게 분명하다 결론지었을 정도로.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리하르트는 다시 돌아왔다. 어째서인지 조금 변한 모습으로.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그런 날이면 늘 그래 왔듯, 사람들은 미스티무어 홀의 당구실에 모여 있었다.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인 하나가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나, 나리가… 돌아오셨습니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등 뒤의 유리창 너머로 벼락이 떨어졌다. 혼비백산한 사람들 앞에 나타난 건 이미 장례를 치르려 빈 무덤까지 만들어 놓은, 죽었다던 남자였다.

펠릭스는 폭우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덤덤히 묻던 남자를 또렷이 기억했다.

‘왜, 유령이라도 봤습니까?’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은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는 누가 봐도 리하르트 대니얼 캔싱턴이었다. 도플갱어가 아닌 이상.

큰 부상을 입은 채 실종됐다던 전보와 달리, 돌아온 그의 모습은 멀쩡했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칼과 마노(瑪瑙)같은 보라색 눈동자. 더 이상 안경을 써서 얼굴을 가리려 하지 않으니 달려드는 아가씨들이 수두룩했다.

변한 건 내면이었다. 식민지 섬에서의 일이 그의 가장 근본적인 무언가를 변질시킨 것 같았다.

“펠릭스.”

그런 친구의 마음을 읽었는지 리하르트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

“뭐?”

“기분 더럽게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러고는 뭐라 항변할 틈도 없이 뒤로 돌았다. 펠릭스가 다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그런 적 없어. 좀 변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앞서 가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리하르트가 그 손을 뿌리치기 전에 펠릭스가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사냥 같이 와 줬으니, 오늘은 우리 집에 같이 가.”

“또다시 매춘부들을 불러서 문란한 게임이나 하자고?”

차가운 거절의 말이 나오기 전에 펠릭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 거 아니야. 보면 너도 반가울걸.”

각자의 말에 타자 뒤축으로 말의 배를 차며 펠릭스가 먼저 달려 나갔다. 나란히 달린 두 마리의 말이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자, 멀지 않은 데서 숙녀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펠릭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키아라!”

하나로 틀어 올려 묶은 붉은 곱슬머리에 굴곡진 몸매가 매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멈춰 선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왔다. 펠릭스가 먼저 사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벌써 온 줄 몰랐어. 걸어온 거야?”

“여기 있다길래 마중 나왔지.”

그녀의 어깨를 잡고 가벼운 볼 키스를 나눈 펠릭스가 다정히 말했다.

“키아라. 인사해. 리하르트야. 내가 말했던.”

그녀에게 먼저 동행을 소개한 펠릭스가 이어서 뒤를 돌았다.

“리하르트, 오랜만이지? 내 사촌 키아라.”

“…키아라?”

기억을 되짚듯 리하르트가 중얼거리자, 서운하다는 듯 키아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해요. 아무리 못 본 지 좀 됐기로서니, 절 기억 못 하세요? 어릴 적에 우리 셋이 종종 어울려 놀았는데.”

그 말에 리하르트가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잠시의 침묵 후, 옅게 미소했다.

“아아. 오랜만입니다.”

수풀 속에 숨어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

마주한 켄싱턴 백작 내외는 샬럿에게 호의적이었다. 평소에도 인망이 두텁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부부였다.

인사를 하러 온 샬럿에게 백작은 정중히 신시아의 상태에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원하는 한 얼마든지 저택에 있어도 좋다고 말했다. ‘얼마든지’라고 했지만, 그 최대 기한이 한 달이 되리란 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인사가 끝나자 제니스는 고용인들이 모여 있는 부엌으로 그녀를 불렀다.

“이 애는 신시아의 딸이고, 앞으로 당분간 이곳에 머물 거네. 나리께서 가족처럼 대우하라셨어.”

제니스를 제외한 나머지 열두 명의 고용인들과 인사를 나눈 샬럿은 그 뒤 제니스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저택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금세 흘러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돌연 창밖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제니스는 그녀에게 양초를 건넨 뒤 일을 하러 돌아갔다.

양초에 불을 붙인 샬럿이 계단을 오르는 도중이었다. 밖에서 천둥 번개마저 몰아치더니,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르는 바람이 들고 있던 초의 불을 꺼뜨렸다. 동시에 사방이 캄캄해졌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자, 걱정이 찾아왔다.

“어쩌지. 성냥도 없는데…….”

샬럿이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갤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벽을 짚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계단에서 구를 뻔했다.

휘익.

검은 무언가가 그녀 옆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샛노랗게 번쩍이는 그것의 눈과 마주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처 도망도 치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숨을 고르는 사이 웬 나직한 울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심호흡한 샬럿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바로 안도했다.

“야옹.”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정체는 바로 고양이었다. 안 그래도 사방이 어두운 데다 새카만 털을 갖고 있어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거였다. 허탈하게 웃은 샬럿이 다시 고개를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꼭대기 층까지 다 올라왔을 때였다. 분명 닫고 나왔던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엄마……?”

강한 약 기운에 딸이 왔음에도 내내 일어나지 않던 어머니였다. 드디어 일어났나 싶은 기쁜 마음에 샬럿이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며 방문을 마저 열어젖혔다. 그러자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댄 채 앉아 있던 신시아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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