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괜찮습니까?”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뱀의 비늘처럼 차갑고 매끄러웠다. 누군지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역광이 비쳐 윤곽만 보였다. 아마도 젊은 남자 같았다.
그는 잠시 넋을 놓은 그녀가 대답하기를 인내심 깊게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샬럿이 어물거리자,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마치 누군가 목덜미에 얼음물을 들이부운 느낌이었다.
“두 번 물어야 합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화들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그림자가 드리워 보이지 않았지만, 뒤늦게 대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고가일 게 분명한 승마복. 이 주변에서 말을 타고 다닐 만큼 부유하며 총을 갖고 다니는 젊은 남자.
바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급히 보닛을 벗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나리.”
“…나를 압니까?”
“켄싱턴 백작님의 아우이신 리하르트 님이시죠? 전 신시아 헤겔의 딸 샬럿 헤겔입니다.”
그렇게 추측한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샬럿이 알기로 이 근방에 이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다. 켄싱턴 백작 일가. 그중 백작의 연치는 마흔을 넘겼다고 들었고, 그의 아들들은 나이가 어렸다. 그렇게 소거하고 나자 한 사람이 남았다. 백작과 거의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하나뿐인 남동생, 리하르트 켄싱턴. 한때 어머니 신시아가 돌봤던 도련님.
그녀의 빠른 머리 회전에 놀랐는지 남자가 잠시 침묵했다. 긴장으로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깊은 우물 같던 정적을 가르고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모녀가 그다지 닮지는 않았군.”
“…네?”
샬럿이 고개를 기울이자, 언제 하대를 했냐는 듯 남자가 뒤이어 말했다.
“도의상 데려다주는 게 맞지만, 약속이 있어 유감이군요.”
***
그렇게 말한 것과 달리, 리하르트 켄싱턴은 심부름꾼을 통해 사람을 불러 주었다. 황무지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자, 머지않아 짐마차를 탄 나이 든 노인이 다가왔다. 조금 전과 대비될 정도로 구수한 사투리로 노인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신시아 딸인겨?”
“아. 네. 샬럿 헤겔이라고 합니다.”
“난 한스라고 혀. 보다시피 마부고.”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마부가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부탁하기도 전에 샬럿의 손에 들린 짐 가방을 짚이 쌓인 마차 위에 실었다. 그런 뒤 물 흐르듯 조금 전까지 앉았던 마부석으로 되돌아가더니, 멀뚱멀뚱 바라보는 샬럿을 향해 옆자리를 가리켰다.
“뭐 혀, 안 타고.”
그 말에 샬럿이 서둘러 올라탔다.
시골이라 하나 역시 사람 사는 곳이었다. 행인들이 밟아 다져 놓은 흙길 위를 마차가 이따금 덜컹거리며 아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앞으로 나갔다. 두 마리 말이 느려지려 할 때마다 적당히 고삐를 흔들며 한스가 이야기를 꺼냈다.
“신시아가 그간 많이 기다렸구먼.”
“어머니가요?”
“그라믄. 어째 어머니랑 똑 닮았네.”
그래. 이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눈 색깔만 다를 뿐 어머니인 신시아와 딸인 샬럿은 판박이였다. 5피트 3인치(약 160cm) 정도의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키와 살짝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새카만 머리카락.
그런데 조금 전에 본 리하르트 켄싱턴은 다른 말을 했다. 속으로 의아해하며 샬럿이 대꾸했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샬럿이라 부르면 되는가?”
“네. 편하게 부르세요. 한스 아저씨.”
수더분한 마부는 말이 많았다. 대화는 주로 그가 묻고 샬럿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지금 가는 곳 이름은 알어?”
“미스티무어 홀. 맞죠?”
기억을 더듬으며 샬럿이 대답했다. 켄싱턴 백작저의 명칭은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미스티무어(misty moor). 안개 낀 황야. 솔직할 정도로 직설적인 이름이었다. 동시에 더없이 어울리기도 했다.
인가가 드문드문한 마을에서 미스티무어 홀까지는 말을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거리가 멀었고, 주변에는 온통 황무지뿐이었다. 설상가상 비나 눈이 내리면 낮게 물안개가 깔려 주변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안개를 뚫고 다다르면 아름다운 정원을 품은 대저택이 나왔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신기루 같은 곳이었다.
“잘 알고 있구먼. 맞네.”
정확한 답변에 한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샬럿의 차례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어머니 증세는 어떠세요?”
“그게, 좀 심각혀. 어제도 피를 한 바가지 쏟았구먼.”
“…앞으로 얼마나 사실 수 있을까요?”
피. 샬럿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대답했다.
“듣기로는 길어 봐야 한 달이 고비라던디…….”
“한 달…….”
신시아의 병명은 비전염성 폐결핵이었다. 그 소식을 전보를 통해 들었을 때, 샬럿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충격이었다. 좋은 집에서 좋은 것만 먹고 지내는 줄 알았는데.
오랜 고용인에 대한 백작 일가의 신뢰는 꽤 높았고, 봉급도 다른 곳의 유모 자리에 비해 배로 받았다. 그렇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환경에서 지낸다 해도 가난한 병은 끝까지 그 숙주를 찾아내는 법인가 싶었다.
“그래도…….”
점점 침울해져 가는 샬럿의 얼굴을 바라보던 한스가 머뭇거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는 다 받았구먼. 그건 알아야 혀.”
그가 뒤이어 한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조금 전에 그녀를 구해 줬던 리하르트 켄싱턴이 신시아를 위해 몸소 한밤중에 멀리 사는 의사를 저택으로 데려왔다는 것. 거기에서 끝이 아니라 비싼 왕진비와 약값도 한 번에 계산했다는 것. 하지만 발 빠른 대처가 무색하게, 신시아의 병은 이미 말기에 다다른 후였다고 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제. 아무리 한때 유모였다고 해도 고용인에게 그렇게까지 하시는 분은 또 없다니께.”
“그렇네요…….”
한스의 말에 샬럿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에 보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늑대를 쏴 죽이던 남자. 그 순간 안도와 함께 차오른 건 두려움이었다. 야생 속에서 피식자가 어둠에 숨은 포식자를 알아보듯.
하지만 그런 그녀의 본능은 오판이었구나 싶었다. 첫인상은 틀릴 수도 있으니까. 가슴 한구석에서 아니라고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는 애써 그렇게 결론지었다.
한스는 그녀의 침묵이 깊은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샬럿의 생각은 흐르고 흘러 어머니 신시아에게 닿았다.
이제 와 떠올려 보니 어머니를 보는 건 3년만이었다. 그리 살갑지 않은 자신의 성격 탓도 있지만 자주 보지 못한 건 저금 때문이었다. 사귀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 나이 이제 스물. 여자로서 이제 슬슬 결혼을 대비할 나이였다. 휴가와 명절을 반납하면 평소보다 두 배로 일당을 받으니 쉴 수가 없었다.
샬럿은 몇 년 만에 보는, 죽어 가는 어머니와 어떤 식으로 재회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냥 다가가 포옹하는 정도로 괜찮을까? 아니면 양 볼에 키스라도 해야 하나? 아무리 부모와 자식 사이라지만 거기까지 하는 것은 어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매정한 딸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별것 아닌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자욱한 안개가 차츰 걷히더니 시야가 한층 선명해졌다. 말없이 앞을 보던 한스가 머지않아 도착을 알렸다.
“거의 다 왔네.”
그 말에 시선을 드는 것과 동시에 샬럿의 입이 벌어졌다. 과연 장대한 석조 저택이 보였다.
잘 다듬어진 관목들과 붉은 히스꽃이 흐드러진 정원. 유구한 세월을 품은 신비롭고도 고풍스러운 고택. 미스티무어 홀은 여전했다.
이윽고 짐마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퉁이를 지나 미스티무어 홀의 외곽 입구 쪽으로 접어들었다. 저택의 뒤쪽, 고용인용 출입문이 있는 곳이었다. 샬럿은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오랜만이구나. 샬럿.”
“아주머니.”
도착한 샬럿을 맞은 건 가정부 제니스였다. 고용주인 켄싱턴 백작이 집사를 따로 두지 않았기에 그녀는 이곳의 고용인 중 직위가 가장 높았다. 어느덧 쉰에 접어든 그녀는 미스티무어 홀의 노련하고 우수한 지휘관이었다.
샬럿이 짐마차에서 내려오자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간 잘 지냈니?”
“네. 잘 지냈어요.”
“다행이구나. 저번에 봤을 때가 네가 열… 여섯 살 때였나?”
“열일곱 살 때였어요. 3년 전이었죠.”
엄한 인상 때문에 아랫사람들에게 깐깐하고 엄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샬럿에게는 예외였다. 제니스는 그녀의 어머니 신시아와 오랜 친구 사이였기에 샬럿에겐 늘 친절했다.
보통 유모와 가정부, 그리고 요리사는 저택 내에서 상급 고용인이었다. 비슷한 지위였고, 유일하게 나이가 맞아 떨어진 그들이 가깝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가벼운 포옹을 끝내자 제니스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세월이 빠르네. 꼬마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젠 아가씨티가 물씬 나는구나.”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띄운 샬럿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주머니는 더 젊어지신 거 같은데요?”
“빈말인 줄은 알지만, 괜히 기분은 좋구나.”
그렇게 간단한 안부 인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고용인용 뒤쪽 계단을 올랐다. 샬럿이 이곳에 올 때마다 죽 다녔던 곳이었다. 쭉 위로 올라가면 지붕 아래, 어머니 신시아의 방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제니스가 입을 열었다.
“방은 어머니와 같이 쓰렴. 신시아는 약을 먹고 잠들었단다. 진통제 겸 수면제라 아마 저녁쯤에나 일어날 거야.”
“…….”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구나.”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10년 넘게 함께 동고동락해 온 동료가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슬프고 걱정되는 일이었다. 함께한 시간만 놓고 본다면, 딸인 자신보다도 어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니. 번뜩 든 생각에 씁쓸하게 웃으며 샬럿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받을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그간 어머니께 잘 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택은 지하를 포함해 총 네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 번째 계단참을 지나자 어느덧 목적지인 마지막 층이었다.
“샬럿.”
동행은 여기까지였다. 앞서 걷던 제니스가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주말이라 백작 내외분과 자녀분들, 그리고 저택 고용인들 모두 교회에 가서 조용하구나. 나리마님께 인사는 점심 식사 때 드려도 될 거다.”
샬럿이 눈을 동그랗게 뜬 건 ‘주말’이란 단어를 들은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오늘은 예배를 드리는 한 주의 마지막 날이었다. 신분을 막론하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교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가는 날. 그때 번뜩 한 목소리가 귓가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