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64)

꽃을 얽은 뱀

01.

샬럿은 확신했다. 또다시 그 꿈속이었다.

황량한 벌판에서 그녀는 또다시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싸늘한 공기가 코와 입으로 스며들었다. 가차 없이 몰아치는 북풍은 끝없이 긴 진녹색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도망쳐야 해.

본능이 속삭였다. 절대 잡혀서는 안 돼.

헉헉……. 그녀는 대체 무엇에게서 벗어나려는 건지도 모른 채 달리고 또 달렸다. 턱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숨에 호흡이 흔들렸다. 설상가상으로, 제멋대로 풀려 엉킨 검푸른 머리칼이 목매는 밧줄처럼 숨통을 옥죄어 왔다.

더 빠르게 달리고 싶었지만 비 온 뒤 축축한 진흙땅에 구두가 계속 벗겨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낮게 깔리기 시작한 물안개가 거센 바람과 함께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온통 침묵뿐인 황야를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무저갱으로 만들었다.

발길이 무거웠다. 발목에 추를 매단 듯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 샬럿.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바리톤 음색처럼 낮고 깊었다. 노래로 사람을 홀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간다는 인어가 생각났다.

금방이라도 뒤돌아 갈 것 같은 충동이 들었다. 소스라치며 간신히 걸음을 재촉하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 넌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불현듯 욱신거리는 통증이 심장에 밀려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샬럿이 왼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본능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떠나야 해. 떠나는 게 옳아. 떠나야 살 수 있어.

그때, 눈앞에 환영처럼 아른거리는 한 남자가 보였다.

- 영원히 내 것이야.’

그에게 본능적으로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

“…아가.”

“…….”

“아가!”

누군가 다급하게 어깨를 흔들었다.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샬럿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불편한 합승 마차 안이었다.

그녀를 깨운 건 앞자리의 노파였다. 샬럿은 주름진 눈과 마주했다.

“괜찮은가? 하도 괴로워해서 깨웠구먼.”

“아…….”

“무슨 꿈을 꾸길래 그리 몸을 뒤척이누?”

“그게…….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샬럿이 대답했다. 정말이었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서운 꿈이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그녀는 손을 뻗어 차창을 가린 커튼을 걷었다. 광활한 들판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대도시에서 벗어난 이래, 쭉 같은 풍경이었다.

길을 떠난 지 어느덧 이틀이었다. 수도에서 이 시골까지, 그녀는 먼 거리를 달려왔다. 그간 덜컹거리는 합승 마차 안에서 오랜 시간 꼿꼿이 앉아 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꼼꼼히 둘러쓴 보닛 틈으로 잔머리가 삐져나오기 십상이었고, 딱딱한 좌석에 엉덩이가 얼얼한데 함부로 몸을 뒤척이면 올바른 숙녀의 몸가짐이 아니니 눈총을 받기 딱 좋았다.

물론 샬럿은 숙녀라는 경칭을 달기에는 입장이 빈약하긴 했다. 세탁 하녀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그리 존중받는 위치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샬럿은 열세 살부터 하녀 일을 시작해 지금은 버젓이 7년 경력을 가진 일손이었다. 그런 만큼 오라는 곳도 많았고, 그런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게 유능한 샬럿이 한창 바쁜 시기인 성(聖) 미카엘라 축일을 앞두고 시골로 향한 건 갑자기 들려온 어머니의 병환 소식 때문이었다.

샬럿의 어머니 신시아는 그레델 힐의 유지, 켄싱턴 백작가의 유모였다.

정확히 27년 전, 켄싱턴 백작가의 귀한 둘째 아드님이 태어난 해, 에셀우드 각지에서 유모를 구한다는 전보가 떴었다. 마침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는 그 자격에 맞아 떨어졌다. 가장인 남편이 막일을 하다 크게 다친 후라 당시 집에는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신시아는 울며 어미를 찾는 젖먹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떠났다.

샬럿이 태어난 건 그로부터 7년 후였다. 돌보던 도련님에게 더는 유모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아졌을 때. 언니와 달리 샬럿은 3년 동안 엄마의 보살핌 속에서 평온하게 자랐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던 어느 날이었다. 그레델 힐에서 전보가 도착했다. 백작가의 장남이 결혼한 지 십여 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신시아가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또다시 그레델 힐로 떠났다. 아이에게 직접 모유를 먹이겠다 결심한 백작 부인 덕에, 신시아는 드라이 너스(Dry nurse, 모유를 주지 않고 아이를 돌보기만 하는 유모)로서 재고용됐다. 그리고 7년 후에도, 17년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상하듯 백작 부부에게 잇따라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뒤로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았고, 신시아는 현재 세 살배기 막내의 유모였다.

신시아가 다시 그레델 힐로 떠난 이후 그들 모녀가 얼굴을 보는 것은 1년에 사나흘이 전부였다. 나라의 큰 명절날이거나 도련님이 마님과 함께 외가로 떠날 때. 간혹 그레델 힐을 담당하는 우체부가 쉬거나 다쳐서 휴가를 낼 때에는 샬럿이 백작저로 찾아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샬럿은 가족의 편지를 가지고 갔고, 신시아는 식구들이 생활할 돈을 어린 딸을 통해 직접 보냈다. 말을 타고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라, 도착한 날에는 지붕 밑 방에서 모녀가 오붓하게 하룻밤을 같이 잘 수 있었다. 전부 소중한 추억이었다.

유일한 자매였던 언니는 지난해 산에서 발을 헛디뎌 죽었고, 아버지는 그 전해에 도박장에서 많은 빚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샬럿에게 남은 가족은 이제 어머니가 유일했다.

먼 거리에 지친 나머지, 다시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때였다. 정차를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레델 힐입니다.”

“아가씨. 여기서 내린다고 하지 않았누?”

조금 전 그녀를 깨워 준 정 많은 노파였다. 경력 있는 산파로 곧 태어날 손자를 보러 간다고 했다.

“아, 감사합니다.”

샬럿은 그녀에게 인사를 한 뒤 외투를 여미고 보닛을 고쳐 썼다. 곧이어 마차가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땅으로 발을 딛기가 무섭게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뺨에 달라붙었다.

“이랴!”

뒤이어 마차 위의 짐을 내려 준 마부가 바로 고삐를 휘둘렀다. 샬럿은 광야에 홀로 남았다.

***

“대체 여기가 어디람……. 하아…….”

지도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샬럿은 실오라기처럼 죽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갔고, 조금 뒤 창백한 안개 속에서 인가가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까지의 거리는 턱없이 멀어 보였다.

그나마 손이 가벼워서 다행이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르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라 짐은 많지 않았다. 문제는 이 안개 속에서 어떻게 저택을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용기를 낸 샬럿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겨우겨우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어쩐지 가면 갈수록 끝이 보이질 않았다.

정말로 길을 잃어버린 건가 싶은 생각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려는 순간.

“…저게 뭐지?”

그녀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의 깊게 응시했다. 자세히 보니 마중 나온 사람은 아니었다. 네발 달린 짐승이 저 멀리서 보였다.

백작저에서 사냥개를 기르던가? 샬럿이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진실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 사냥개라면 목줄을 하고 있고 뒤따르는 주인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목줄도 차지 않은 채 대놓고 낯선 이에게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황야를 헤매는 들개일 가능성이 컸다.

샬럿이 본능적으로 두 어깨를 감싸 안았다. 먹잇감을 찾아 떠도는 들짐승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는 세 살배기도 아는 법이었다.

전신을 휩쓰는 긴장에 샬럿의 목덜미 털이 쭈뼛 섰다. 손등에 오스스 닭살이 돋았다. 도망쳐야 한다고 본능이 끊임없이 소리쳤지만 못이 박힌 듯 그녀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짐승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회색 털을 가진 그것이 제 정체를 드러내자 샬럿은 몸을 덜덜 떨었다.

“이럴 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샬럿이 침음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것의 정체는 들개가 아니라 늑대였다.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만한데 문제는 더 심각했다. 그 뒤로 두세 마리가 더 보이기 시작했다. 늑대는 무리 지어 생활하는 짐승이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개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가장 큰 늑대와 눈이 마주쳤다. 세로로 가늘어진 노란 눈동자는 오로지 야만과 본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샬럿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자신뿐이었다. 늑대 떼에 습격당해 한순간에 뼈밖에 남지 않을 자신을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다 모난 돌 하나에 발을 헛디뎌 그대로 주저앉았다. 먼 데서 몸을 낮추고 천천히 다가오던 늑대가 사냥감의 허점을 노린 건 당연한 결과였다.

“크르릉…….”

귓가에 와서 박히는 으르렁거림에 겁에 질린 샬럿이 눈을 꼭 감았다. 앞으로 펼쳐질 참극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자신의 목덜미에 박히는 걸 상상하며 숨을 멈춘 순간이었다.

타앙!

어디선가 총소리가 났다. 뒤이어 깨갱 하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총소리가 몇 번 더 들리더니 별안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

희미한 화약 냄새에 샬럿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달려들던 늑대 무리가 다리를 절뚝이며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샬럿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시선의 끝에 놓인 건 말을 탄 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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