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09)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전쟁이 있기 마련이다. 전쟁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죽음이 난무하는 곳에는 비겁자가 있는 것이 당연하고, 비겁한 도망자는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하늘 아래, 땅 위 어디나 도망자를 환영하는 곳은 없다.

용우(龍羽)는 사실 평범한 사내였다. 보잘것없는 하급 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좋은 혼처 만나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천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온 나라가 전쟁에 휩싸이면서 그의 천수도 달라졌다. 그는 병사가 되었다. 창을 꼬나 쥐고 적군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모든 일이었다. 아무도 일개 병사에게 살아남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적을 향해 달려가는 장기판의 졸이 되라고 할 뿐이다. 고향을 떠날 때 부모는 이미 둘째 아들을 죽은 사람으로 여겼다. 집안을 이어야하는 맏형을 대신해 군역을 떠나던 날, 혼담이 오고가던 집 처녀가 다른 혼처를 잽싸게 정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도 그에게 꼭 살아 돌아오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우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격전 중인 전장에서 달아나, 산을 넘고 핏물 흐르는 내를 첨벙첨벙 건넜다. 며칠을 달렸는지 모른다. 그는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아니, 애초에 어딘가로 가야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전쟁터로부터 좀 더 멀리 달아나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가 그가 탈영병이라는 것을 알아챈다면 군율을 어긴 죄로 끌려가 벌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벌은 둘째 치고 다시 전쟁터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나무뿌리를 씹고 흙탕물을 마셨다. 용우는 사람을 두려워했으나, 용우의 위장은 그렇지 않았다. 나무뿌리와 흙탕물에 지친 위장이 통증을 호소하며, 사람이 지은 따뜻한 밥과 국을 졸라댔다. 눈앞이 빙빙 돌고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 되어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날, 용우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몹시 토실토실한 놈이었다. 게다가 무방비해보이기까지 했다. 털가죽은 묘하게도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앉아 앞발을 모으고 꼬박꼬박 졸고 있는데, 용우가 꽤나 가까이 다가가도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사냥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짐승이라도 잡아먹으려다가 몇 번이나 놓쳤던 용우가 보기에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발짝, 두 발짝. 용우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조금씩 토끼 뒤로 다가갔다. 무척 잘 먹고 자란 녀석인지 살집은 두툼하고 털에는 윤기가 흘렀다.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와락 덮치려는 순간, 토끼가 갑자기 폴짝 뛰더니 한 발짝 앞으로 움직였다. ‘아차 놓쳤구나.’ 했는데, 그 이상은 도망치지 않았다. 마치 용우를 알아차리고 도망친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한 발짝 뛰고 싶어서 뛰어본 듯 것처럼 도로 앞발을 모으고 꼬박꼬박 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 걸음 쫓아가자, 또 폴짝. 또 쫓아가자 다시 폴짝. 용우는 점점 약이 올라서 쫓아가는 속도가 빨라졌고, 토끼가 달아나는 속도 또한 빨라졌다. 하지만 절대 한 발짝 이상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기묘한 추격전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용우는 자신이 토끼의 뒤를 좇다가 외딴 계곡 안에 들어왔음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산들에 둘러싸인 고요한 계곡이었고, 햇빛이 가득 고인 우물처럼 따사로웠다. 계곡의 가장 안쪽에 작은 초가집이 그림처럼 숨어 있었다.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토끼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뛰던 방향으로 보아 초가집 쪽으로 간 것 같았다.

‘꼭 여우요괴에게 홀린 것 같군. 아니. 토끼요괴인가? 날 꼬드겨서 이리로 데려온 걸까?’

용우는 얼이 빠진 채 한동안 그 집을 바라보았다. 멍하던 그의 눈에 차츰 핏발이 섰다. 지금껏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쳐 왔지만, 배고프고 지친 용우는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여겼다. 저 집안에 아무리 무서운 요괴가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요괴가 나타나면 잡아 죽이고 저 집을 차지하리라. 음식이 있다면 다 먹어치우고 지붕과 벽이 있는 방에서 한껏 늘어져 자리라. 만약 잡아 죽일 수 없다면 요괴 손에 죽어도 상관없다. 

악만 남은 용우는 그렇게 결심하며, 전장에서 달아날 때부터 꼭 쥐고 있던 무기를 움켜잡았다. 창대가 반으로 뚝 부러진 창이었다. 그는 초가집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쩌자고 또 막 돌아다닌 거야? 여기는 선계가 아냐. 배고픈 늑대라도 만나면 넌 한입에 삼켜진다고.”

초가집 안쪽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요괴가 사람을 꼬드겨서 소굴로 데려오면 보통 여자로 변신해서 홀리고 간을 빼먹는다고 들었다.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용우는 심호흡을 하고 창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하나, 둘, 셋을 센 뒤에 초가집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단숨에 요괴를 찔러 죽이기로 했다. 하나, 둘…….

그때, 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 용우는 깜짝 놀라 셋을 세는 것을 까먹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과연 젊은 여자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하얀 옷을 입고 있고, 머리는 단정히 묶었다. 요괴 같지는 않았다. 까만 두 눈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것을 빼면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다. 그녀는 용우를 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아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발치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너 또 사람을 주워 왔구나? 하여간.”

여자의 발치에는 예의 그 발그스름한 토끼가 앞발을 들고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딴청을 부리는 듯 했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쳐들어갈 순간을 놓쳐 얼이 빠져 있는 용우를 향해 불쑥 물었다.

“뭐해요?”

용우는 그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른 창을 고쳐 잡고 외쳤다.

“나, 나는……!”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이 없다보니 어떻게 말을 해야 가장 그럴 듯 하게 들릴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더듬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짜냈다. 

“가, 가진 것 있으면 다 내놔. 먹을 것도, 돈도. 반항하면 죽인다!”

여자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여자를 향해 겨눈 창끝이 부르르 떨렸다. 여자는 한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배고파요?”

그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와요.”

여자는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용우는 여자의 등에 창을 겨눈 채로 따라 들어갔다. 초가집은 덜렁 방 한 칸짜리로, 살림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휑했다. 이불 한 쪽 보이지 않았다. 방바닥에 꽤 커다란 짐승의 털가죽 하나가 깔려 있는 게 전부였다. 여자는 거기 철퍼덕 주저앉았다. 토끼가 그 옆에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용우는 방 안을 둘러보고, 창끝을 여자에게 다시 겨누며 물었다.

“밥은?”

“지금은 못 줘요. 기다려요.”

“뭐, 못 줘? 이거 안 보여?”

용우는 창을 여자의 목 가까이 들이댔다. 창대가 부러져 반만 남긴 했지만, 그래도 창날은 여전히 날카롭다. 그런데 여자는 마치 그게 무슨 막대기라도 되는 것처럼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못 준다니까요.”

“시, 시끄러! 당장 저 토끼라도 잡아서 가져와. 말 안 들으면 정말 죽여 버린다.”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토끼를 턱으로 가리켰다.

“얘요? 잡을 수 있으면 한 번 잡아보세요. 잡아만 오면 끓이든 굽든 할 테니까.”

용우는 토끼를 바라보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무방비한 자세로 앉아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잡히지 않는 놈이라는 것을 그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용우는 잠시 딴 곳을 바라보는 척 하다가 다음 순간 갑자기 홱 돌아서서 들고 있던 창을 냅다 꽂았다. 창은 무른 방바닥에 푹 꽂혔다. 토끼는 꽂힌 창 바로 옆에 앉아 앞발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정확히 겨눴는데!’

용우는 코앞에 있는 토끼를 바라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아무래도 이 토끼는 요괴야. 이 집에서 제일 무서운 요괴일 거야.’

여자가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용우는 방바닥에 꽂힌 창을 도로 뽑아 여자에게 겨누며 외쳤다. 

“뭐, 요, 요괴든 뭐든 상관없어. 토끼 말고 다른 거라도 뭐든 먹을 걸 내놔! 빨리! 나 화났어!”

“그렇게 배고파요? 얼마나 굶었어요?”

“나무뿌리만 먹은 지 보름은 된 것 같…….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놓으라면 내놔! 빨리 아무 거나 차려와!”

“정말이죠? 후회 안할 거죠?”

여자는 기묘하게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뭔가 미심쩍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어쩐지 신이 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요. 그럼 지금 차려줄게요.”

방 한 칸짜리 초가집에는 따로 부엌이라고는 없었다. 집 옆구리에 군불 때는 아궁이가 있는데 거기 솥 하나 걸어두고 그 옆에 깨끗이 물로 씻은 돌 하나 갖다놓은 것이 전부였다. 마치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는 그 돌을 도마 삼아 산나물을 쑹덩쑹덩 썰더니, 솥 안에 쓸어 넣었다. 솥 안에서는 희멀건 쌀죽이 끓고 있었다. 

혹시 여자가 먹을 것에 약이라도 탈까봐 옆에 앉아 창을 겨누고 감시하던 용우는, 나물죽이 끓는 냄새가 본격적으로 풍기자 군침을 삼켰다.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산촌의 거친 음식이지만 지금은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맛있을 것만 같았다. 충분히 다 끓기를 기다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충 가져와!”

용우가 호령하자 여자는 나무사발에 죽을 담아 내밀었다. 용우가 허겁지겁 죽을 받으려 하자, 여자는 죽사발을 꼭 잡은 채 놓지 않고 다시 한 번 다짐하듯이 물었다.

“정말 후회 안할 거죠?”

용우는 뼈다귀를 빼앗긴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손이나 놔.”

여자는 손을 놓았고, 용우는 죽사발을 두 손으로 잡고는 급히 입으로 가져갔다. 문문 풍기는 김이 콧속으로 들어가자 선계의 향기라도 맡은 것처럼 황홀했다. 위장이 마구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여자가 숟갈을 내밀었지만 그걸 받을 정신도 없었다. 용우는 두 손으로 그릇을 잡은 채 죽을 마셨다.

죽사발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죽이 흙바닥에 쏟아졌다. 용우는 죽 묻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게 굳었고,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여자는 낙심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 되나?”

용우는 두어 번 눈을 껌뻑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독 탔지?”

“안 탔어요. 옆에서 계속 지켜봐놓고 무슨 소리람.”

용우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독이라도 탄 게 아니면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맛이 없을 수가 있어!”

정말 맛이 없었다. 시고 쓰고 짰다. 굶주릴 대로 굶주려 뭐든 먹을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던 용우의 위장조차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맛이었다. 여자는 입을 삐죽거렸다.

“거봐요.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요. 누가 그렇게 졸라대래? 좀 기다리라니까 말 안 듣고서는.”

“아무리 기다린다고 돼지도 못 먹을 음식이 먹을 만한 거로 바뀌겠냐!”

“바뀌죠.”

“어떻게?”

“요리하는 사람이 바뀌니까.”

용우는 흠칫 놀라며 옆에 내려놓았던 창을 얼른 잡았다.

“다른 사람이 있었나?”

“지금은 없어요. 잠깐 나갔어요. 좀 기다리면 올 거예요.”

용우는 미심쩍은 눈으로 여자를 훑어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냐?”

여자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순간, 용우는 이 평범하게 생긴 여자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월계화 흐드러지게 핀 정원. 용우는 손에 땀을 쥔 채 최대한 당당한 자세로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월계화 덤불을 사이에 두고 정혼녀가 될 여자와 상견례를 하는 순간이다. 예를 어기고 함부로 정혼녀에게 접근하려고 했다가는 월계화의 가시가 용서치 않는다. 그런 법도가 아니더라도 용우는 언감생심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다지 뛰어날 것 없는 평범한 관인의 집안에, 물려받을 재산도 많지 않은 차남에게 시집 와 준다는 고마운 여인에게 초면부터 예를 어기는 짓을 할 심장은 못 된다. 게다가 집안끼리는 다 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이 상견례에서 여인이 퇴짜를 놓으면 만사 도루묵이 되고 마니 무례한 짓은 할 수 없다. 신랑감이 마음에 들면 여자는 제 이름을 가르쳐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면 거절하는 것이다. 

월계화 붉은 꽃 너머로 면사 드리운 여인이 보인다. 얼굴은 가렸지만 서있는 태가 몹시도 고와서 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우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더듬더듬 인사말을 건넨다.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설마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퇴짜를 놓는 걸까.

여인이 섬섬옥수를 뻗어 월계화 꽃송이 하나를 딴다. 그리고 그것을 덤불 너머로 내민다. 용우는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고 서 있다가, 여인의 입에서 짤막한 웃음이 흘러나오자 얼굴이 그만 새빨개지고 만다. 

-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용우가 묻자 여인은 다시 웃더니 돌아서서 화단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다. 갈 때까지 이름자를 말해주지 않는다. 용우는 정신이 아뜩해진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용우는 퍼뜩 꿈에서 깨어났다.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딱히 무서운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온몸이 축축했다. 

그는 방 안 벽에 기대어 졸던 참이고, 여자는 토끼와 놀고 있었다. 좀 기다리면 올 거라던 그 ‘남자’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깜빡 방심했던 사이에 창을 빼앗기거나 포박 당하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자신을 닦아세웠다.

‘새삼스럽게 옛날 일을 꿈꾸다니. 집구석 비슷한 곳에서 쉬게 되었다고 그새 풀어져버렸군.’

꿈 탓인가, 아니면 비록 사람 입에 넣을 음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죽 비슷한 걸 맛이라도 본 탓인가. 용우는 더욱 허기가 졌다. 여전히 솥 안에서는 죽이 끓고 있었지만 차마 그걸 다시 먹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용우는 토끼와 노닥거리는 여자를 향해 창을 겨눈 채 물었다.

“온다는 남자는 네 서방이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에헤헤 웃어댔다. 아까부터 이 여자가 전혀 겁도 안 먹는 것이 마치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용우는 발끈했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실실 웃지 말고! 네 서방이냐고.”

“그냥……, 하늘님이에요.”

“무슨 소리야?”

여자는 뭐가 그리 좋아 죽겠는지 얼굴 가득 웃음만 물었다. 용우는 이 여자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뭐 하늘같은 서방이든 뭐든 상관없어. 어쨌거나 그놈이 돌아오면 네가 잘 말리는 게 좋을 거야. 괜히 그놈이 나한테 덤비게 부추겼다가는 과부 될 줄 알아.”

창끝을 흔들며 협박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겁내는 기색이 없다. 뿐인가. 여전히 그 남자 생각을 하는지 저 혼자 실실 웃고 있다. 용우는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말로 물어봤자 멀쩡한 답이 나올 리가 없을 것 같았다. 배는 고프고, 달리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남아돌기에 그는 여자를 찬찬히 관찰해보기 시작했다.

갓 스물 정도일까? 얼굴을 보면 더 어릴 수도 있겠다. 산에 사는 사냥꾼이나 심마니 족속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 것 치고는 입은 옷이 좀 묘했다. 낡기는 했지만 깨끗한 백의였다. 양민들이 입을 옷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인의 여식이 입을 옷도 아니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것이 도관에서 수련하는 여도사들이 입는 옷이다. 하지만 여자는 어딜 봐도 여도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해먹고 살길래 집구석에 제대로 된 이불 하나 없는 거냐?”

참다못해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여기 우리 집 아니에요.”

란다.

“우리도 여기 온지 보름 밖에 안 됐어요.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그나마 솥도 산 아래 가서 얻어온 거고, 이건 하늘님이 잡아와서 내가 가죽 벗긴 거고.”

그러면서 깔고 앉은 털가죽 귀퉁이를 슬쩍 들어 보였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던 용우는 문득 그 털가죽을 들여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무슨 짐승의 가죽이지?”

“곰이죠.”

용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만한 크기의 곰을 잡는 사냥꾼이라면 얼치기 강도 따위도 순식간에 가죽을 벗겨버릴지 모른다. 

“언제쯤 돌아온다고?”

묻는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아침에 내려갔으니까 이제 올 때가 되었을 텐데. 산 아래 마을에 다녀온다고 했거든요.”

용우는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은 이 산에 들어온 지 보름이 넘었다. 물론 길을 헤맸다고는 하지만 높이만 봐도 산 아래 마을까지 하루 반나절에 오락가락 할 거리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여긴 요괴 소굴인 모양이다. 아무리 먹을 게 좋아도, 힘센 대장 요괴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도망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손님인가?”

집 근처로 다가오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문간에서 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문간 쪽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반색하며 외쳤다.

“하늘님!”

용우는 화들짝 놀라 창을 겨누며 돌아섰다. 시커먼 옷을 입은 당당한 체구의 인영이 문가에 서있는 걸 얼핏 봤다 싶은 찰나, 그 그림자가 팟 사라지는가 싶더니 뭐가 어찌 된 건지 알 수도 없는 사이에 갑자기 손이 허전해졌다.

“비록 지금은 반 토막 초라한 몰골이긴 하되, 한 때 용맹하게 휘둘러지던 전장의 창이로다.”

한 사내가 용우의 손에서 빼앗은 창을 가볍게 휘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걸친 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무부의 남루한 검은 옷이었지만, 체격이 하 당당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첫눈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무기를 빼앗기고 제압당한 용우가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그 사내는 손목만 이용해 창을 몇 바퀴 돌려보더니 싱긋 웃고 용우의 손에 돌려주었다. 그러더니 시선을 여자에게로 돌리고 불쑥 말했다.

“배고프다.”

“응. 안 그래도 아까부터 죽 끓이고 있었어.”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는 안한다더니?”

“저 사람이 배고프다고 하도 졸라서.”

“아하.”

사내는 다시 한 번 용우를 바라보더니 뜻 모를 미소를 빙그레 머금었다. 용우는 찔끔 놀라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나, 나는…….”

이제 와서 강도라느니, 가진 것 다 내놓으라느니 하는 소리를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힘의 열세를 인정하고 냅다 밥 좀 달라 살려 달라 구걸하기에는 아직 용우의 가슴 밑바닥에 자존심이라는 쓸데없는 것이 남아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물쩍거리는 사이에 사내가 여자의 어깨를 감싸며 돌아섰다.

“손님도 있으니 얼른 먹자.”

“응.”

남녀가 함께 집 밖 솥을 걸어놓은 곳으로 나갔다. 용우는 혼자 방 안에 남아있기도 뭐해서 졸졸 따라 나갔다. 그의 발치에 토끼가 졸졸 따라붙었다. 꼭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봐도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여자는 너무 평범하고, 사내는 너무 비범해 보였다. 하지만 죽이 끓는 솥뚜껑을 조심스레 여는 여자를 등 뒤에서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그 어깨에 턱을 얹고 여자와 솥 안의 내용물을 번갈아 살펴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시종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때 보여?”

여자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냄새는 괜찮은데.”

사내가 대답했다. 용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냄새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맛은!’

여자가 숟갈로 죽을 조금 떠서 어깨 너머 남자에게로 내밀었다.

“맛 봐.”

사내는 망설이지도 않고 덥석 그 숟갈을 물었다. 용우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았다. 저 비범한 사내가 오만상을 다 찡그리고 죽을 토해내는 모습을 기대하며.

“먹을만하군. 많이 좋아졌어.”

“정말?”

사내의 평이 내려지자 여자는 환한 웃음을 지었고 용우는 입만 떡 벌렸다. 오늘은 아무래도 그의 턱이 떨어질 천수인 모양이었다.

“응. 그럭저럭. 마을에 내려가서 사온 게 몇 가지 있으니 좀 넣으면 더 좋아지겠다.”

그리고 사내는 집 앞쪽으로 돌아가더니 잠시 후에 곰 한 마리 크기는 될 것 같은 커다란 자루를 들고 와서 솥 옆에 내려놓았다. 여자가 자루를 헤쳐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웅담과 산삼이 생각보다 비싸게 팔리는 모양이야. 뭐 며칠 기다리면 값을 더 쳐주겠다고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다 가지라고 하고 필요한 것만 사왔다.”

용우가 호기심을 느끼고 여자의 어깨너머로 슬쩍 자루 안쪽을 엿보니 먹을거리도 있고 옷도 있고 등잔이며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꽉 들어차있었다. 사내는 그 안에서 기름종이에 싼 것을 꺼내 풀었다. 나온 것은 소금이었다. 그걸 좀 쥐고 죽 솥 안에 뿌리면서 다시 맛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네.”

하고 용우를 불렀다. 흠칫 놀라는 용우의 품에 바가지 하나가 안겼다.

“저쪽으로 가서 물 좀 떠와.”

용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가리킨 방향으로 갔다. 과연 졸졸 맑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 우선 한 움큼을 움켜 마시고, 얼굴도 씻었다. 머리가 차가워지자 얼떨떨하던 기분도 나아졌다. 바가지에 물을 뜨다가 갑자기 자기 처지가 한심해서 확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장에서 도망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이런 산촌의 필부들 심부름이나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게 되는 건가.’

한심천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저 여자라면 모르되 사내 쪽은 산촌의 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싶었다. 곰을 척척 잡아대는 걸 보면 이름난 사냥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웅담을 팔아본 것도 처음인 듯이 말했다. 사냥꾼은 아니다. 그럼?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사람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도망자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여자 쪽은 아마 산에 살던 무지렁이가 맞을 거다. 도망자 신세로 의탁하게 되어 어느 덧 정이 든 거다. 그러니까 저리 어울리지 않는 쌍이 맺어졌으리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저쪽도 같은 도망자 신세라면 이쪽을 밀고할 위험도 없다. 아니, 빨리 이쪽 사정도 불어버리는 편이 괜한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물을 떠오라고 보내놓고 자신을 처리할 방도를 궁리 중인지도 모른다. 도망자의 입장에서 낯선 나그네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용우는 물바가지가 출렁거리도록 서둘러 돌아갔다. 

“형씨. 진작 말을 했어야 하는데 나도 그쪽과 별 다르지 않…….”

집 귀퉁이를 돌아서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바가지를 떨어뜨릴 뻔 했다. 남녀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용우의 목소리를 듣고 여자가 꿈틀거렸지만 사내는 놓아주지를 않고, 되려 용우를 향해 자리 안 비키고 뭐하냐고 나무라는 시선을 던졌다. 용우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아니……. 급한 건 아니니, 그럼……. 잠시 후에…….”

용우는 어물어물 말하고 집 앞 바위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오래 전 기억이 났다. 형이 처를 얻어 장가를 들게 된 후였다. 아무 생각 없이 평소 버릇대로 형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형수를 무릎에 앉히고 귀를 물고 있던 형을 보고는 대경실색해서 뛰쳐나온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와 기분이 똑같았다. 갑자기 그는 아무런 위험도, 희망도 없던 관인의 둘째 아들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도망자였다. 갈 곳도 없고 받아줄 사람도 없는 도망자.

병사가 된 뒤에 지금까지 오직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옛일이 많이 떠올랐다. 한때의 정혼녀와 화원에서 만나 선을 보던 일이며, 집안을 물려받을 형에 대한 일들. 형을 대신해 군역을 살게 되었던 날, 형수와 형이 그를 찾아와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던 일들. 

용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발치에 토끼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자, 들지.”

작은 한 칸짜리 방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각자의 손에는 죽 그릇과 숟갈이 들려 있다. 사내가 용우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렸네. 우리도 임시로 머무는 곳이라 세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손님 접대가 소홀한 것을 양해하게.”

사내가 인사치레를 하는 사이 여자는 벌써 맛있게 죽을 퍼먹고 있었다. 용우는 기가 막혀서 그 꼴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간을 새로 했다고 해도 아까 그 죽이다. 도저히 사람 먹을 음식이 못되는데 저렇게 잘도 먹다니 비위도 좋지. 

사내도 용우에게 한 번 권하고는 제 몫을 먹기 시작했다. 하긴, 저 사내는 간도 새로 안한 죽을 먹고는 ‘먹을 만하다’고까지 말했던 비위였다. 용우는 한동안 두 사람이 먹는 것을 구경만 했다. 아까 그 맛을 생각하면 다시는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니 점점 참기 힘들어졌다. 시험 삼아 딱 한 숟갈만 먹어보기로 했다.

죽 한 술을 입에 떠서 넣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아까 그 죽과 같은 것인가. 심하게 뒤죽박죽이던 맛이 하나로 곱게 정화되고, 풋풋한 산나물의 정취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멀건 죽이 아니라 고기 건더기도 더러 걸렸다. 도대체 무슨 신묘한 재주로 그 못 먹을 음식이 이렇게 바뀐 걸까. 하지만 그걸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용우는 허겁지겁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몇 그릇 더 달라고 청해서 먹은 것은 물론이다. 여자 역시 지지 않고 더 달라고 했다. 사내는 달라는 대로 더 퍼 주었다. 

간신히 배가 좀 찼을 때, 더욱 기쁜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속은 좀 달랬으니 이제 술이나 한 잔 해볼까?”

사내가 마을에서 가져온 자루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술 한 병을 꺼냈다. 다시 손을 넣더니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오리구이 하나도 꺼냈다. 또 손을 넣더니 이번에는 꿀을 바른 과자를 꺼냈다. 자루 안에서 이것저것 나올 때마다 용우의 눈은 커졌고, 여자는 좋아라고 꺄꺄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으로 사내는 자루에 손을 넣었다가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홍당무를 꺼냈다. 토끼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아니, 이런 성찬이 있으면 왜 진작 꺼내지 않고서.”

물론 맛있게 먹긴 했지만 그 죽은 성찬이라기엔 좀 거친 음식이 아니었던가 싶어 용우가 말하자, 사내가 씩 웃었다.

“보아하니 며칠 제대로 못 먹은 사람 같은데 기름기 있는 음식부터 먹으면 속이 제대로 남아나겠나? 사실 술도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데.”

“먹고 죽더라도 마셔야겠소.”

용우는 행여 술을 안 줄까봐 덥석 술병부터 잡았다. 사내는 그저 껄껄 웃어댔다. 잔이랄 것도 없어 여자가 냇가에 가서 부셔온 죽사발을 잔으로 삼았다. 그래도 술맛은 더 좋았다. 별달리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늘어진 소매를 잡고 공손히 고개 숙이며 술을 따르는 관인 사회의 주도 같은 것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그저 제 잔이 비면 제가 알아서 따르고, 제가 마실 만큼 마시고 먹고픈 안주를 먹으며 편한 자세로 앉거나 비스듬히 누워 조용히 술을 마실 뿐이었다. 이 집과, 이 집이 있는 계곡 안에서는 세상과 달리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어느 틈엔가 여자는 사내에게 기대어 앉았다. 용우도 벽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앉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평온했다. 문득 사내 쪽을 바라보다가 그는 물었다.

“당신도 도망자요?”

사내는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되물었다.

“자네는 도망자인가보군?”

새삼 부정할 이유도 없었다. 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용우요.”

사내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 그런가.”

그렇게 말했을 뿐, 사내는 자기 이름을 대지 않았다. 대신 여자가 나섰다.

“내 이름은 가스라기에요.”

희한한 이름이었다. 물론 관인이 아닌 보통 양민 여자들은 다 저 비슷한 이름을 갖지만 그런 것 치고도 꽤 특이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용우의 관심은 여자가 아니라 사내에게 있었다. 

“당신 이름은……?”

용우는 조심스레 물었다. 여자가 사내를 흔들며 졸라댔다.

“그래, 하늘님. 어서 이름 말해봐.”

사내는 그저 웃기만 할뿐 말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름을 대려하지 않다니, 역시 도망자가 아닐까. 용우는 점점 의심이 짙어졌다. 한 번 떠보자 하고 물었다.

“당신 이름이 하늘님이오?”

이번에도 여자가 대신 대답했다.

“그건 그냥 내가 붙인 이름이야. 진짜 이름이 있을 텐데 이야기를 안 해줘.”

“그 이름은 어차피 네가 부르지도 못하잖아.”

“그때 쓰던 이름 말고. 그 전에, 속세에 있을 때 이름말이야. 그때도 이름 있었을 거 아냐. 기억도 다 돌아왔다면서 왜 이야기 안 해줘?”

이야기가 어째 맹랑하게 돌아간다. 속세에 있을 때라니? 용우는 끼어들지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 난 그냥 하늘님이면 된다.”

여자는 계속 투덜거렸지만, 사내가 재빨리 용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용우라. 좋은 이름이군.”

용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창한 이름이지.”

그는 벌컥 술을 들이켰다. 급하게 마신 탓일까. 이번 잔은 유달리 독하게 느껴졌다.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나 같은 놈에게는 너무 과분한 이름 같지 않소? 용의 날개라니 말이야.”

용우의 자조적인 말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는 성수라 날개가 없네.”

술기운 탓에 대범해진 용우는 킥킥 웃었다.

“꼭 용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시는군.”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용에게 날개가 있다 여기고, 제 자식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며 그런 이름을 지어주곤 하지.”

“그래, 맞소. 부모님도 나를 낳았을 때는 나름대로 기대를 품고 계셨던 모양이지. 하지만 결국 이 꼴이야.”

용우의 혀가 점점 꼬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 차려야지. 술 취하게 만든 다음에 나를 꽁꽁 묶어 밀고해버릴지도 몰라.’

머리도 어수선했다. 그는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술을 마셨다. 정신은 점점 멀리 나들이를 나갔다. 여자가 다시 사내를 붙잡고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님. 딴청 좀 피우지 말고. 이름 말해줘, 이름.”

“그만 좀 졸라.”

용우는 술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어지간하면 말해주시오. 어차피 밀고할 것 같지도 않은 사인데 이름 하나 말해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용우를 바라보았다. 용우는 점점 대범해졌다.

“나, 나 말이지. 나한테도 정혼녀가 있었어. 한때 정혼녀지. 그 여자랑 화원에서 선을 봤어. 우리 고향 풍습이지. 여자 쪽에서 마음에 들면 이름을 말해주게 되어 있었어. 그런데 그 여자, 어찌 했는줄 아시오? 이름은커녕 한 마디 말도 안하고, 월계화 한 송이를 꺾어서 내밀더군. 가시가 많은 꽃이지. 난 퇴짜 맞은 줄 알았소. 그런데 그 여자 집안에서만 부르는 방명이 바로 ‘월계화’였어. 흐, 그 소리를 매파한테 듣고는 아주 날아갈 것 같았지. 몇 달만 더 있었으면 그대로 혼사 치를 예정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된 거야. 난 군에 끌려왔고, 그 여자는 다른 집으로 잽싸게 혼처를 옮기더군. 망할. 그럴 거면 아예 꽃을 주지 말았어야지! 당신도 그렇게 뜸들이지 말고 말해줄 거면 후딱 말해주라고!”

우다다 말해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고 입이 말랐다. 그는 술병 째로 거꾸로 들고 탈탈 입에 털어 넣었다.

“술 다 떨어졌군! 더 없나?”

“있지.”

사내가 자루에서 술 한 병을 더 꺼내 내밀었다. 용우는 신이 나서 벌컥벌컥 마셔댔다. 방안이 빙빙 돌았다. 용우는 그대로 옆으로 쿵 쓰러졌다. 누운 채로 맞은편을 바라보니 사내도 껄껄 웃고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여자가 사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놀려댔다.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대.”

사내가 눈을 껌뻑거리더니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메.”

“끝까지 대답 안 해주는 고집불통 황소 같으니.”

그렇게 사내를 비난하는 여자의 눈에는 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취해서 흐린 눈으로 그꼴을 보고 있자니, 용우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월계화라는 이름을 지녔던 정혼녀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여자가 방 한 구석에 놓인 자루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무리 소처럼 먹어대도, 저건 너무 많이 사온 거 아냐? 한 달은 먹겠던데.”

“두 달은 먹을 거다.”

“응?”

사내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대답했다.

“너 혼자 먹을 양식이니까.”

여자는 사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왜?”

“중주에 다녀와야겠다.”

“어째서?”

“전쟁이 점점 번지고 있어. 삼라 전체가 휩싸일 날도 머지않았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성황의 기운이 쇠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그래서 가봐야 한다.”

중주니, 삼라 전체니, 성황이니. 이 궁벽한 산골의 초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었다. 용우는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 벌써 자신이 꿈에 반쯤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 애초에 털가죽 붉은 토끼를 따라 이 계곡에 들어섰을 때부터가 기묘한 꿈의 시작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토끼는 지금 그의 가슴팍 위에 올라앉아서 그곳이 햇볕 쪼이는 따스한 바위 위라도 되는 양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확 덮쳐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기분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꼭 가봐야 한다고? 만난지 이제 한달도 되지 않았는데?”

여자가 조용히 묻자 사내는 사이를 두었다가 천천히 여자의 얼굴로 손을 올려 뺨을 쓰다듬었다. 

“나도 세상 모든 걸 잊고 이곳에서 살다 지고 싶다. 삼라만상의 운명이 다 무슨 상관일까. 나한테는 너 하나면 되는데…….”

여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내의 가슴,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두냐고 하지?”

사내도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중주의 성황은 따지고 보면 내 후손, 만약 그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나는 방도를 세워볼 수도 있을 테니까…….”

하늘과 같은 성황을 자기 후손이라 하는 사내의 말을 듣고도 용우는 놀라지 않았다. 이것은 꿈이다. 꿈에 무슨 말인들 못 들으랴.

“하지만 위험한 곳이다. 중주에는 산짐승은 없지만 산짐승보다 더 위험한 인간들이 많아. 더러운 일도 해야 할지도 몰라. 어쩔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혀야할 경우도 있을 거야. 그래서 널 데려갈 수는 없어. 그런 위험한 곳에는……. 여기서 기다려. 여기라면 안전할 거야. 사람도 쉽게 찾아올 수 없는 곳이니까.”

“겨우 다시 만났는데 나보고 또 기다리라고?”

“미안하다. 하지만…….”

사내가 뭐라 더 말을 하려 했으나, 여자는 고개를 저어 그 말을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늘님은 바보야.”

용우는 옆으로 누운 채 그녀가 제 무릎 위에 누운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얼굴을 취한 듯이 바라보았다. 분명히 평범한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얼굴에서, 아니 온몸에서 따뜻하고 흰 빛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하늘님하고 좋은 것만 같이 하고 싶은 줄 알아? 같이 놀고, 같이 쉬고, 같이 잠들고. 다 좋아. 하지만 그것만 좋아하는 게 아냐. 어딜 가든 같이 갈 거야. 더러운 길이든, 위험한 길이든. 나쁜 것도 같이 할 거야. 그럴 게 아니면 따라가지도 않았어. 그 높은 계단을 올라가지도, 은하에 대고 외치지도 않았어. 정말이야.”

여자는 심호흡을 하고 사내의 얼굴에 대고 똑똑히 말했다.

“그러니까, 같이 가. 그게 어떤 길이든.”

용우는 눈을 비볐다. 여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흰 빛이 사내를 감싸 안는 듯이 보였다.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여자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보다 못한 용우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여자 말대로 해.”

상관할 바 없는 남의 일에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이성적인 사고 따위는 술잔 바닥에 가라앉아 버린 지 오래였다.

“당신 참 운도 좋군. 저런 여자 만나는 게 쉬운 줄 알아? 데려가. 같이 가! 남겨 두고 갔다가 후회하지 말라고! 나도, 나도 그렇게 기다려주는 사람 한 명만 있다면……, 그러면……!”

술 탓인가, 목이 막혀서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점점 흐릿해졌다. 아무래도 빈속에 기름진 안주와 술을 먹은 것이 정말 탈이 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은 시원했다. 꼼짝 않고 여자를 바라보기만 하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감이야.”

그건 용우의 참견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내는 팔을 들어 여자의 목을 안더니 천천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는 매번 나를 가르쳐주고, 구해주는구나.”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면서 여자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선인을 구하는 가스라기니까.” 

용우는 눈을 감았다. 온몸에 신열이 불덩이처럼 끓어올랐지만, 그래도 몹시 기분 좋게 정신을 잃었다

아마도 새벽녘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용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입에 차가운 물 사발이 대어졌다. 용우는 일단 허겁지겁 받아마셨다. 꿀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깨운 사람을 바라보니 바로 그 사내였다. 놀라서 멍하니 쳐다보자 사내가 씩 웃었다.

“우리는 이제 떠나네.”

“에……?”

그러고 보니 방안에는 토끼도,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사온 식량은 자넬 위해 남겨두고 가지. 그 안에 꿀도 들어 있어. 숙취가 심하거든 아침에 한 그릇 더 타서 마셔. 술은 내가 가져가겠네. 자넨 정말 술이 약하더군.”

“하, 하지만 어디로?”

“우리가 가야할 곳으로 가지. 자네도 아마 여기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거야. 식량 떨어지기 전에 갈 곳 찾아보게. 몸과 마음이 성할 때라면 그렇게 헤매지는 않을 거야.” 

“그, 그렇지만…….”

사내는 용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네를 기다려줄 사람만 있었다면 도망자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지? 내 말 잘 들어. 산 아래로 가게, 삼라는 넓어.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있어. 아직 자네가 못 만났을 뿐이야.”

“나는…….”

“내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주지. 저 여자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내 날 때부터의 이름말이야.”

사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용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 사내의 입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오래전이긴 하지만, 내 부모가 내게 지어준 이름은 바로 용우였어.”

용우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버렸네. 한때는 용우였고, 또 한때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 그러나 지금 내게 가치 있는 삶은 하나뿐이니, 내 이름 또한 하나. 저 여자가 지어준 이름 이외의 것으로는 불릴 생각이 없어. 그래서 말 안 해 준 거야.”

사내는 용우의 어깨를 한 번 꾹 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에게 새로운 삶을 줄 사람이 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내려가지 않을 생각인가?”

“잠깐만!”

사내가 방을 나서려는 순간 용우는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당신은……, 당신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내의 대답은 이러했다.

“한 때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사람으로 죽을 자일세.”

사내가 밖으로 나간 뒤, 용우는 잘 안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막, 토끼를 안은 여자를 등에 업고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사내와 여자가 용우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여자는 손을 흔들었고,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달빛 청청한 산 아래를 향해 사내는 여자를 업은 채 날듯이 빠른 속도로 껑충껑충 뛰어 내려갔다. 용우는 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았다. 용우는 한 번도 선인을 본 적이 없었다. 선인이 하늘을 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게 실제로 어떻게 나는 건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내가 산을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선인을 생각했다. 선인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다. 자신의 삶도 달라지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보름 뒤 용우도 그 초가를 떠났다. 그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산을 내려갔다. 혹시나 그 남녀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천수는 그에게 두 번 다시 그럴 기회를 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삶은 달라졌다. 그 사내가 말했던 것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몇 사람이 이 인적 없는 산의 계곡에 찾아왔다. 한 명은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이었고, 나머지는 그 노장군을 공손히 배행하는 호위병들이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쓸리고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거의 허물어져 흔적만 남은 초가집 앞에서 노장군은 한참을 서성였다. 

급한 군무로 이 근처를 지나가는 와중에 시간을 내어 이곳을 굳이 방문하겠다 했을 때부터 매우 호기심을 품고 있던 노장군의 부관이 참지 못하고 결국 물었다.

“장군. 이곳에 예전에 오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랬지.”

노장군은 쓸쓸히 대답했다. 햇빛이 고인 우물처럼 따스한 계곡과 초가집의 잔해를 바라보며 그는 뜻 모를 소리를 흘렸다.

“내가 만약 이 집에 살던 그 남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되지 못했을 테지.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었네.”

“마치 선인이라도 보신 듯한 말씀이십니다.”

“선인이라.”

노장군이 웃자, 또 다른 부관이 말했다.

“그러나 선인이라는 것은 그냥 전해지는 이야기일뿐, 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러나 내가 만난 것은 분명히 선인이었을 걸세. 그 인연으로 내 삶이 바뀌었으니 말이야.”

노장군은 자신과 이름이 같았던 한 사내와, 그 사내에게 다른 이름을 주었던 여인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분명히 선인들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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