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09)

******* 해의 끝 *******

세월이 훌쩍 흘러 다시 제석이 왔다. 이번 제석은 고요했다. 다툴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망후봉도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아 겉보기에는 예전과 다를 바 없지만 조용히

쇠락해가는 황산의 보천선계, 그 바깥에서는 극에 달한 환주와 흑황의 전운이 폭발해

드디어 양국의 왕과 한이 친정에 나서게 되리라는 소문마저 흉흉한 때.

화영은 부쩍 술이 늘었다. 천수배필은 잠들었고, 후계도 없고, 벗도 없는 신세이니 좀

망가져도 괜찮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따금 선몽을 더듬어 다시 세상으로 나간 자신의

껍데기, 시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낄낄 웃기도 했다. 그래, 나는 원래 저런

인간이었지.

이미 주인을 잃어 기수가 되었는데도 천계에서 좀처럼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며 수안니가

찾아와 노발대발 성화를 부리는 것만 빼고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가끔은

지난해의 그 떠들썩하고 골치 아픈 일들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최소한, 그때는 심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무뚝뚝하긴 하지만 벗도 있었고.

그 벗이 남긴 여자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켜

끝까지 그녀의 꿈만은 꾸지 않았다. 그저 잘살고 있을 거라고 믿는 수박에 없었다.

제석의 밤이 무르익었을 때, 열 병까지 세고 더 이상 세지 않은 새 술병을 막 땄을 때,

갑자기 소동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설화선고의 비명이 들렸고, 엄청난 기세로 수안니가

뛰어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종종 겪는 소동이었기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도대체 언제 기수가 되는 거냐'고 지청구를 늘어놓겠지.

"당장 밖에 나가봐."

어째 시작부터 달랐다.

"왜?"

귀찮은 듯이 반문했더니 길길이 날뛰면서 하늘이 어쩌고 사다리가 어쩌고 은하가 어쩌고

하면 거품을 물었다. 화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하늘을 쳐다보고 안색이

돌변해서 당장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광명정 상고에 올라보니 천기의 변화가 확연했다. 한쪽에서는 은하의 흐름이 기묘하게

뒤틀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예의 천제하강, 하늘 사다리가 드리워지는 징조가 보였다.

그것도 상당히 큰 놈으로, 파라천선 같은 보통 체형의 천선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것이

내려올 규모였다.

"황건역사를 생으로 내려보내기라도 할 참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전부터 감정이 가히 좋지 않았던 천계 쪽을 향해 중얼거리고, 은하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천제하강은 이제 더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은하의 변화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확연하게 강이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도대체 저건 뭔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뒤따라 나온 수안니가 숨 밭게 말했다.

"늙은이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남화궁에 갔었나?"

"그래, 그놈의 신수부 문제 때문에‥‥‥. 그런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 

그놈의 늙은이."

"뭐라고?"

"하계인이 모태에서 모습을 갖추고 나오는 데 열 달이 걸리니, 선인은 그보다 조금 더

걸리겠지? 일 년이면 되려나, 라던가."

"일 년."

"그래, 일 년이다."

기대감에 찬 눈으로 수안니는 화영을 바라보았다. 화영은 갑자기 술기운이 싹 달아나버렸다.

"그럼, 천제하강은 왜?"

"뭐? 그거야 천계에서 무슨 볼일이 있는 거겠지. 우연히‥‥‥."

"멍청한 놈. 우연이 어디 있어!"

화영은 일갈하고 다시 광명정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잠시 후 광명정에서 비합전서들이

황산의 각 봉우리로 흩어졌다. 잠자는 선인들, 선녀들, 영수들을 모두 깨워 천기의

변화를 알리고 각각의 자리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는 데 밤이 꼬박 넘어갔다.

새벽녘, 화영은 비검을 타고 수안니와 함께 보천선계의 경계로 갔다. 은하로부터

누군가가 이곳으로 온다면 거쳐야 할 하늘 길목이었다.

동이 터올 때쯤, 그는 기다리던 이가 오는 것을 보았다. 비검도 비륜도 타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밟고 걸어왔다. 몸에 걸친 것은 검은 옷, 그러나 천의는 아니었다.

하계의 화공들이 그리는 시황의 옷과 닮았다. 눈동자며 머리칼은 붉거나 푸른 기운이

없었다. 그저 검었다. 화영은 그가 천군인지, 지한인지 알 수 없었다. 수안니 역시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그 표정은 천군이었다.

"그 애는?"

그러나 화영이 답을 하기 위해 입을 떼기도 전에 묻는 성급함은 지한이었다.

"하계로 내려갔네. 무한계를 거꾸로 밟아서."

놀라지 않는 담담한 표정은 천군 같기도 했다.

"올라오는 데 천 일이 걸리는 길이었던가. 그럼 아직 내려가고 있겠군."

"아니, 내려가는 길은 훨씬 짧지. 아마 하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걸."

화영은 심술궂게 덧붙였다.

"아직 살아 있다면 말이지."

"살아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고 씩 웃는 모습은 지한인 듯도 싶었다. 화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화영이 뭐라 말하기 전에 수안니가 버럭 소리쳤다.

"도, 도대체 뭐냐. 말 좀, 설명 좀 해봐!"

"뭐, 달리 설명할 게 있나."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추썩이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시해 전으로 돌아간 거지."

화영이 말했다.

"어이,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 한번 갈라진 것이 어떻게 다시 합해진단

말인가! 시해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건 인간으로 돌아가는 거야. 불로불사를 버렸다면

바로 그 순간에 죽었어야지!"

"인간이 되긴 했지만 죽지는 않는군. 그 이유를 내가 어떻게 다 알겠어? 아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인간이 된 것 같지도 않은데? 인간이 어찌 하늘 길을

밟아서 내려올 수 있나? 선인도 이 길을 가려면 비구를 타야 하는 법인데!"

천군인지 지한인지 알 수 없는 자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시한이 있는 거라네. 마중 나온 이가 자네가 처음은 아니거든."

"노군?"

"그래. 해가 뜨기 전에 지상으로 내려가라고 하더군. 그때까지만 가능하게 해주겠다고."

"나 원‥‥‥."

"그래서 말인데, 빨리 처리해주게."

"뭘?"

"선적 파기."

화영은 기가 막혀서 웃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천제하강이 일어나는 거군."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냐?"

물은 것은 수안니였다.

"전란의 화신이었던 자를 간신히 정화시켜 반으로 뚝 잘라 선인으로 만들어놨는데

이제 다시 하나가 되어 하계로 내려간다? 쑥대밭이 시작되는 거지. 그것도 환주!

모든 일은 환주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인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옛날에도 환주에서부터 시작했지."

"막고 싶을 테지. 오죽 막고 싶으면 황건역사를 내려보냈겠나."

"날이 밝기 전이라면, 하나 정도는 상대해볼 만한 텐데."

보천궁 쪽을 지그시 바라본 수안니가 말했다.

"셋이다."

화영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주 끝장을 내려고 작심을 했어. 망할. 이번에는 몇 달이나 경을 읊어야 하는 거지?"

'그'는 빙긋이 웃고 다시 걸음을 옮겨 화영 옆을 지나갔다.

"가능한 한 빨리 끝내겠네."

"그래주면 고맙지만‥‥‥. 아니, 아니. 다시 생각해보게."

화영은 그를 붙잡았다.

"자네가 하계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면 아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꼭 가야겠나?"

"뭘 물어, 새삼."

"그 애는 망선수를 마셨어. 다 잊었을지도 몰라. 게다가 자네도 숱하게 겪어봤잖아.

갖지 못했을 때나 귀한 것이 여자의 마음이지, 막상 가져보면 별것도 아냐. 게다가

쉬이 변하기는 오뉴월 나물맛 같고."

"자네, 잊었군."

어깨에 올려진 화영의 손 위에 손을 덮고서, '그'는 말했다.

"내가 버렸던 나까지 안으려고 했던 욕심 많은 여자야. 잊었을리가 없어."

그리고 '그'는 화영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화영은 다시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아주 자신만만하구만."

그저 그렇게 말하며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고, 고개를 돌려

수안니를 보고는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촉감에 수안니는

불분명한 소리로 으르렁 댔으나 이내 얌전해졌다.

"내 선적이 발탁되는 순간에, 너 또한 자유다. 네가 원하던 대로 기수로 살아가라."

"쳇, 네놈이 시키지 않아도 어차피 그렇게 돼. 잘난 척하기는."

투덜거리면서 그의 손에서 머리를 빼낸 뒤, 수안니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혹시 나중에라도 만나면, 그러니까 네놈이 너무너무 급하다고 사정을 한다든가

그러면, 뭐, 한 번쯤 태워주지. 뭐, 한 번만이지만. 그러니까 급하다고 하면 말이ㅏ.

애걸을 하면, 옛정을 봐서."

"그럴 일이 없기를 서로 빌자, 수안니."

아직은 '그'가 부르는 그 이름에서 힘이 느껴졌다. 수안니는 움찔거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화영을 바라보았다.

"선적 박탈은?"

"아직 보패는 쓸 수 있나?"

"해가 뜨기 전까지는."

"그럼, 선인으로서 얻은 보패로, 천계의 보물인 황건역사를 범 할 때, 그 죄를 물어

선적을 빼앗기로 하지."

"좋아."

발아래 어둑한 황산 보천궁에서는, 하강해온 세 기의 황건역사로 인해 벌써 큰 소동이

일어났는지 희미하게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화영이 다시 불러 세웠다.

"보패를 뽑아봐, 여기서."

"왜?"

"보패를 봐야 확신할 수 있겠다. 내가 박탈할 선적이 천도봉의 것인지, 연화봉의 것인지."

화영은 정말 궁금했다. '그'가 뽑을 보패가 화혈삼첨도일지, 용설창일지.

'그'가 크게 웃었다.

"보고 싶다면 따라와. 위에서 구경하며 배웅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니!"

'그'는 말과 함께 황산 칠십이 봉의 새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화영과 수안니도 제각각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새로운 해, 새로운 태양이 밝아오는 원단.

황산 보천선계에 속한 두 개의 선적이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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