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09)

26-2.

칠흑의 낮. 모든 보천궁 선인 선녀들이 지켜보는 운중석해에서 보천궁주의 제석회 개회

선언이 있었다. 궁주의 후계자인 두 선인은 예장을 갖추는 짧은 제의 후 각자 비륜과 

영수에 올라타고 반천계인 은하를 향해 출발했다.

보천선계를 벗어나기 직전, 지한은 전음이 천군의 귀에 파고들었다.

ㅡ알고 있어? 우리는 형제가 아니야.

아직 중극에 이르지 못한 천군은 그 말의 진의를 헤아리기 위해 잠시 생각하다가

답을 돌려보냈다.

ㅡ인간의 속사를 다 아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우리처럼 서로를 증오하는 형제도

드물겠지. 숫제 형제라고 할 수도 없을 거다.

지한은 쿡쿡 억눌린 웃음을 흘렸다.

ㅡ헛다리짚고 있군. 너는 나를 증오한 적도 없어. 중요한 건 언제나 나였지.

무슨 의미인지 물으려 했으나, 그 순간 보천선계의 경계를 지났다. 지한의 웃음이

헐거운 대기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래, 언제나 나는 너를 증오했다. 네가 나를 벗어버렸으므로 증오했어. 그 증오 때문에

나는 살을 얻고 피를 얻었다. 그 힘으로 무한계를 걸어 올라와서, 선인이 되었다. 

네가 부정한 나. 친구를, 부모를, 아내를 죽이면서 울었던 나. 세상을 떠받칠 선인이

되기에는 약하다고 버려진 나. 그렇지 않다고 증명하고 싶었어. 너보다 먼저 중극에

이르러, 그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금이 아물지 않은 비륜에서는 전보다 듣기 싫은 굉음이 울렸다. 

그 소리는 어쩐지 슬프게도 들렸다.

'그러나 네 말이 옳았다. 나는 약했다. 한 여자가 이 약한 나더러 함께 죽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으니, 약한 것이 옳다. 내가 졌다. 그러니 승자의 전리품으로

가져가라. 세상을, 그리고‥‥‥ 그 여자도.'

드문 바람을 가르며, 두 개의 선흔이 칠흑의 낮, 천공을 엇갈려 지나갔다. 이 어두운

낮이 지나고, 밤이 오고, 새로운 해의 태양이 뜰 때까지 이어질 싸움을 향하여.

기다려야 할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운중석해에 모여든 선인 선녀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석해 가운데 드리워진 천포 휘장 아래 누워

있는 미사린과 앉아 있는 수하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 쌍의 눈동자만이 두 상아로부터 벗어나 석해 아래쪽을 훑어보고 있었다. 화영의

눈이었다. 일식이 끝나고 밤이 왔지만 그의 노을빛 눈동자는 까마득히 먼 석해 저 

건너편에서 벌레처럼 움직이는 작은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어차피 늦었을 텐데. 뭐‥‥‥ 그냥 마음의 위안이나 삼아야지."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치고는 목소리가 좀 컸다. 석해에 와 있던 세 번째 상아, 자무린이

그를 힐끔 돌아보더니 그가 보는 곳을 내다보았다. 자무린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흐응, 어디 입 싼 녀석이 또 나불나불한 모양이네."

화영은 시침을 뚝 뗐다.

"무슨 말씀이신지."

"난 네가 싫어. 음흉해."

"제랑을 아끼는 미덕을 키우십시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스라기는 멈출 수가 없었다. 깨끗하게 목욕한 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새 옷이 걸레가 되도록 산을 오르고 내렸지만 아직도 석해는 멀었다.

아니, 가야 할 곳은 석해가 아니었다. 가스라기는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걸었다. 걷다가 기었다.

자무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질렀으면 끝까지 책임을 질 것이지 왜 저렇게 내버려둬?"

화영은 팔짱을 끼었다.

"짐은 나눠져야 하는 법이지요. 감당 못할 짐을 혼자 지다가는 허리가 휘어집니다."

"넌 허리 좀 휘어도 돼."

"미운 제랑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시렵니까? 일월쌍검의 일도 있는데."

자무린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두 상아에게 온 정신을 쏟고 있던 석해의 선인 선녀들이

뭔가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자무린의 작은 몸은 석해를 벗어났다.

비탈길에서 미끄러질 뻔하다가 늘어진 나뭇가지를 잡고 간신히 버틴 가스라기의 눈앞에,

자무린의 치맛자락이 내려섰다.

"늦었어."

눈을 들어 자무린의 얼굴을 바라본 가스라기가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니?"

반말을 듣고 자무린은 생긋 웃었다.

"그건 진선들에게 정해진 비천수 중의 하나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화영과 나, 할아버지 정도일까?"

"더 있어."

"아아, 그래. 지한도 알아버린 것 같지? 놀랐어. 껍데기들은 보통 그 원신이 가진 잠재력에

따라 힘이 달라지지만, 선골도 없이 선인이 되는 경우는 처음 봤어. 게다가 원신보다 먼저

중극에 도달하다니. 천계에서 왜 그의 일에 그렇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이해가 가.

그걸 알았으면서도 그 녀석이 왜 끝까지 침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이, 이용한 거야?"

가스라기가 진정하려고 애쓰면서 묻자 자무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아마도 성질 급한 내 동생 파라천선과 달리 천계에서 네 일을 느릿느릿 

처리한 것도 그런 계산 때문일 거야. 정말로 강한 극진선이 되려면, 진선은 자기 과거를

죽여야 해.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게 쉽지 않았어. 그 과거가, 망집이, 생각 외로

너무 강했거든."

"하지만, 궁주의 껍데기는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화영 그놈이 그 모양이지. 제가 맡은 환주 흑황에서 전쟁이나 일어나게 하고."

가스라기는 숨을 몰아쉬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무린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자무린이 물었다.

"내가 밉지?"

가스라기는 씹어 뱉듯 말했다.

"관심 없어."

"헉."

자무린은 놀랐다는 듯이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취급 처음 받아봐."

가스라기는 자무린의 치마에 매달렸다.

"천계고 천수고 다 관심 없어. 아무래도 상관없어. 제발, 제발 한 가지만‥‥‥."

"뭘?"

"나,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어. 더 늦기 전에 말하게 해줘. 

이대로는 죽지도 살지도 못해. 제발 한 번만‥‥‥."

자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에게?"

"누구든 상관없잖아! 그만 좀 물어!"

가스라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자무린은 흠칫했다.

"아이, 무서워라. 치겠다."

가스라기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지금은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원래 낮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일로 상처받지도 않았다.

"제발, 제발, 응? 이렇게 빌게. 제발!"

자무린이 몰래 미소를 지으며 눈대중을 하듯이 실눈을 뜨고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적네. 조금 힘들겠는데."

스르릉, 월음신검을 뽑아 들었다. 여전히 그 날은 무뎠으나, 무뎌도 신검은 신검이었다.

머리 위로 크게 원을 그리자 검이 지나간 모양 그대로 둥근 달빛의 테가 내려와 가스라기와

자무린을 감쌌다.

"꼭 잡아. 엉성한 월륜교니까."

그렇게 해서, 가스라기는 자무린의 치맛자락을 잡고 천군과 함께 갔던 은하수를 향한 길을

다시 한 번 올라갔다. 급한 여행이었고, 자무린이 천군처럼 가스라기의 몸을 한껏 

배려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은하에 도착했다. 아예

정신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이 말만은 하고 죽더라도 

죽어야 한다고 악착같이 버텼기 때문이었다.

악머구리 들끓는 소리가 들리는 은하의 기슭에서, 자무린조차도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가스라기는 한사코 좀 더, 좀 더라고 재촉했다.

"진선들도 들어가면 존재가 흩어지는 강이야. 위험해. 여기서 그냥 해!"

은하의 흐름을 따라 위태하게 흔들리는 월륜교의 테를 붙잡고 자무린이 외쳤다.

가스라기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안쪽이지? 반천계라는 곳."

"그래. 하지만‥‥‥."

가스라기는 테를 붙잡고 은하를 향해 몸을 굽혔다. 월륜교가 휘청 기울어지고 

자무린이 비명을 질렀다.

파직, 파직, 은하의 불꽃이 손에 닿았다. 가스라기는 다시 한 번 무수한 소리들을 들었다.

그 어디에도 그녀가 사랑한 두 사람, 아니 한 사람의 목소리는 없었다. 여긴 아냐.

좀 더 안쪽이야. 가스라기는 더울 몸을 기울였다. 은하의 불꽃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물속에 얼굴을 담근 것처럼, 방금까지 들리던 자무린의 비명이 뚝 그쳤다. 

대신 무수한 소리들이 그녀의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욕망들이 그녀를 사방에서 잡아당기고 밀어댔다.

더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대로 있다가는 혼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다고 한계를 느꼈을 때.

그 무수한 소리들 속에서 귀에 익은 소리 하나를 얼핏 들었다. 수안니의 울부짖음이었다.

비슷하지만 훨씬 음산한 짐승의 포효와 뒤섞여 싸우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도 금세

다른 소리의 큰 너울에 감겨 사라졌다.

닿을 수 있을까? 제발. 어쩌면.

가스라기는 거기서 외쳤다. 너무나 많은 소리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들렸다 해도 금세 또 다른 너울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녀는 은하의 파도에 대고 빌었다. 거친 파도야, 네가 거친 것을 탓하지 않을 테니

제발 내 소리를 실어가다오.

그리고 미루고 미루었던 일을 했다.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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